〈 59화 〉 오프라인 모임 3
* * *
‘묘한 일이네…….’
시럽 넣은 커피의 달콤씁쓸함으로 조금 전에 입은 마음에 상처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내 심정을 이해하고 나를 잠시 내버려두는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단 레반과 레테라도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하며 서툴게나마 그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덕분에 침착하게 그들을 관찰할 여유가 생긴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어.’
멋대로 착각해서 온 정수야 논외로 치고, 배진환 씨와 연성화 둘 중 플레이어가 있다면, 그래서 내가 올린 사진에 이끌려 나타난 거라면 뭐라도 반응이 있어야 할 텐데?
역시 이쪽에서 먼저 찔러 들어가 하나?
‘이 질문은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거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수다만 떨고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뭐라도 해봐야 했다.
나는 마시던 커피에서 입을 떼며 그들에게 물었다.
“저기,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네?”
내가 기운을 차리고 말을 걸어온 것에 반가움을 느끼는 건지 배진환 씨가 반색하며 돌아봤다.
“여러분들의 플레이 타임은 어떻게 되시죠?”
캐릭터 당 500시간 이상의 플레이가 플레이어의 조건이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여, 그들의 말을 들어본다면 뭔가 갈피를 잡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기대했던 대로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플레이 타임이요? 죄송해요. 눈여겨봤던 적이 없어서 기억에 없네요.”
“저도요.”
“난 엄청 많이 했어!”
두리뭉실한 대답을 내놓는 꼬맹이는 제쳐놓고, 나는 그들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확실히 모든 게이머가 플레이 타임을 일일이 신경 쓰며 게임을 하진 않을 것이다.
어느 날 한 번 보다 ‘와, 내가 이 정도나 했구나’라고 생각하며 놀라워하거나, 게임 페인 인생을 보내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괴감을 느끼는 정도겠지.
이들의 대답이 이러한 이유는 정말로 플레이 타임을 기억 못하는 걸까?
아니면 플레이어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감추는 것일까.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배진환 씨가 갑자기 입을 열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네?”
나는 당황했다.
모임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빠진단 말인가? 게다가 아직 플레이어가 누군지도 특정 짓지 못했다.
빠지고 싶을 만큼 모임이 지루하고 답답했나?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볼 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의자에서 일어난 배진환 씨는 우리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실 오래 있지 않고 잠깐만 왔다가 갈 생각이었거든요. 이 다음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말이죠.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배진환 씨가 그렇게 사과하고 있을 때, 작은 진동음이 들렸다. 아까와 같은 카페의 진동벨은 아니었다.
연성화는 교복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라도 온 듯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은 좌우로 움직였고,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저도 가봐야겠네요.”
“네!?”
배진환 씨에 이어 연성화마저 가보겠다는 말에 나는 소리를 높였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동시에 빠진다고?
“학교 땡땡이치고 모임에 나온 걸 가족에게 들켰어요. 빨리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아요.”
“……학교를 땡땡이 치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수업이 지루했거든요.”
여자아이에게 중요한 아이돌 콘서트라면 모를까, 단지 지루했다는 이유로 이미 끝나버린 게임 모임에 왔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연정화를 붙잡을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플레이어일 가능성이 높았던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섰다.
남은 건 아무리 봐도 들러리인 초딩 한 명이었다.
“핫초코 더 시켜도 돼?”
“……마음대로 해라.”
싹 비워진 컵을 내보이며 묻는 김정수에게 나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주며 말했다.
정수 녀석은 좋다구나 그 돈을 받고 카운터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허탈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모임은 뭐였던 거지? 애새끼한테 음료수 사주기?
별 소득도 없이 모임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형님. 조금 전의 남자는 가게 밖으로 나가 오른쪽으로 한 블록을 지난 뒤 골목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라버니. 조금 전 여자는 정면의 큰길을 통해서 처음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거 같아요.”
“…….”
의자에 몸을 묻히고 있던 나는 떠나가는 일들의 기척을 감지하며 추적하는 레반과 레테라의 보고를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나는 이내 몸에 감도는 허탈함을 쫓아냈다.
역시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레반, 레테라. 너희들 다른 캐릭터의 기척을 느꼈던 거 확실하지?”
“네, 형님.”
“한순간뿐이었지만, 틀림없어요.”
“……캐릭터가 정말로 이 근처에 있다면 분명 주인 플레이어와 합류하려 할 거야. 플레이어를 밝혀낼 기회는 지금이 절호일 수도 있어.”
“그럼 둘을 바로 쫓을까요?”
“아니. 그건 안 돼.”
아까 만나본 바로는 그 두 사람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
충분히 전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상정해야 한다.
저쪽 플레이어가 나처럼 다수의 캐릭터를 가졌을지 모르는 이상 우리 쪽의 전력을 분산시킬 순 없다.
우리가 쫓을 건 한 사람이다.
마침 아까 헤어질 때 위화감을 느꼈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역시 그쪽을 쫓아가야겠어.”
결심을 굳힌 나는 레반, 레테라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정문으로 빠져나가는 그때 주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정수와 마주쳤다.
“어? 형아들, 어디가?”
“오늘 모임은 여기서 끝이야! 너도 집에 돌아가!”
“에엑!?”
갑작스런 산회 선고에 정수는 납득하지 못한 듯 소리를 높였다.
레반과 레테라가 먼저 빠져나가고, 나는 정문 틈 사이로 빼곰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너무 게임만 하지 말고 공부도 좀 해. 그래야 부모님 걱정도 덜하지.”
“우리 엄마 같은 잔소리 하지 마!”
공부와 게임 문제로 부모와 대판 싸운 적이 있는 인생 선배로서 한 마디 해준 건데, 녀석은 그저 잔소리로 받아들였다.
뭐, 알아서 잘 해보라는 식으로 정수를 놔두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직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동작이 빠른 레테라가 인적이 드문 골목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신을 향한 시선이 없다는 걸 인지하고 폭발적으로 스피드를 올렸다.
마치 하나의 묘기를 부리듯 건물 벽을 타고 내달리던 레테라가 드디어 대상을 발견하고 그 앞을 가로막듯 내려앉았다.
쿵!
“허억! 뭐, 뭐야!?”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레테라에게 놀란 남자, 배진환 씨가 엉덩방아를 찍을 뻔한 것을 겨우 면하며 외쳤다.
뒤늦게 그를 따라잡은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배진환 씨.”
“시, 신요현 씨? 이게 대체 무슨…….”
배진환은 갑자기 골목의 앞뒤를 가로막은 듯 포위한 우리에게 심히 당황한 듯싶다.
특히 방금 전까지 태연하게 얘기를 나누던 사람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며 바닥에 균열까지 남겼으니 약간의 공포감마저 느끼는 듯 보였다.
“겁먹지 마세요. 우린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캐릭터가 근처에 숨어 있다면 공격하지 말아말라고 전해주시고요.”
“네? 캐릭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는 내 말은커녕 이 상황 자체를 이해 못하겠다는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겉으로만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 같았다.
하지만 정말 일반인라고 생각하기엔 그가 보인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시치지 떼지 마시죠. 당신은 아까 헤어질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만 왔다가 갈 생각이었다. 이 다음에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말이죠.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요.”
“저, 정말로 약속이 있었습니다! 지금 바로 가야한단 말입니다!”
“저는 당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플레이어라는 가능성이 있는 한 의심되는 행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요. 그리고 당신은 거기서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면서 한 박자 늦게 손목시계를 확인했거든요.”
“그게 무슨 문제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당신은 단 한 번도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위치는 카페 내에 놓인 시계가 보이지 않는 위치였고, 도중에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적도 없죠. 손목시계를 본 것도 가야한다는 생각을 품은 직후였고요. 당신은 어떻게 시계를 보지도 않고 다음 약속까지의 시간을 잰 거죠? 몸속에 시계라도 박아두셨습니까?”
“……!”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행동이었음을 자각한 모양이다. 배진환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이 모임에서 나갈 타이밍을 잡은 건 단 하나. 제가 당신들의 플레이 타임을 물어보았을 때였습니다. 그 질문을 받은 것으로 당신은 모임의 온 목적을 달성한 듯이 떠났습니다. 아마 확인하기 위해서겠죠? 모임을 개최한 제가 플레이어인지 아닌지를.”
그리고 플레이어만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질문을 받고 원하던 확신을 얻은 그는 그대로 모임을 파한 것이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내가 한 걸음 나서고 말했다.
“자아. 갑갑하게 숨기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해드리지요. 저는 플레이어가 맞습니다. 당신도 이제 정체를 드러내시죠.”
내가 압박하듯 그렇게 말하자 더욱 당황한 것처럼 입을 더듬고 있던 배진환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그 플레이어라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전 아닙니다!”
“배진환 씨! 여기까지 와서 아직도 시치미를 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항의하자 그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아니란 말입니다! 전 누가 부탁해서 대신 모임에 나온 것뿐이라고요!”
“……네?”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말이 배진환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레반도, 레테라도, 어리둥절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의심의 눈길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자 배진환은 서둘러 설명을 이어갔다.
“저도 SoR를 플레이하긴 했지만 옛날에 잠깐 했을 뿐입니다! 최근 그게 서비스 종료한 줄도 몰랐다고요! 그런데 그때 SoR에서 만나 잠깐 알고 지냈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 대신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줄 수 있겠냐고. 가서 하는 건 별로 없고 그냥 가서 상대방이 플레이 타임을 먼저 물어오지 않나 확인만 하면 된다며, 물어본다면 바로 모임을 끝내고 나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연락하는 게 이상했지만 정말 그냥 모임인 듯싶고, 소정의 사례도 준다기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급하게 꾸며낸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그의 표정은 너무 간절해보였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거짓을 꾸며낼 이유도 없고, 정말 대리로 참가한 거란 소리인가?
“……그럼 제 게시글에 참가 희망 댓글을 남긴 게 당신이 아니었다는 겁니까?”
“네! 모임 장소와 시간도 그 사람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전 그 사람이 시킨 대로 나온 것뿐이고요!”
당했다.
설마 직접 만나는 위험부담을 없애려고 대리를 쓸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건 내 존재만 알리고 저쪽은 꼭꼭 숨는 상황이 되지 않았는가.
“대리를 부탁한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 어디 있죠?”
“그건…….”
배진환은 이걸 말해도 되는 건가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딱히 자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언질을 받은 적은 없는지 그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푸욱!!!
그러나 열린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목소리가 아니었다.
바로 날카롭게 달여진 단검.
“……?!!?”
나는 너무 놀라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아지랑이처럼 구불구불하고 불길한 현상을 한 단검이 배진환의 뒷목을 파고들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런 그의 뒤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감싼 인영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인영은 손에 쥔 단검으로 잔인하게 배진환의 뒷목을 찔렀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한 그는 그대로 동공이 풀리며 축 늘어졌다.
푸슉!!
검은 인영이 단검을 뽑고, 나와 가까이 있던 레반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레테라가 인영을 향해 몸을 날린 건 거의 동시였다.
카앙!!
콰아아아앙!!!!
레반은 정확히 나를 향해 투척된 피 묻은 단검의 옆면을 맨주먹으로 후려쳐 튕겨내었다.
레테라는 나를 공격한 인영의 머리를 향해 다리를 내려찍었다.
그러나 그녀의 다리는 애꿎은 땅만 부술 뿐, 인영은 어느새 그 자리를 빠져나와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르며 달아나고 있었다.
레테라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로 뒤쫓았다.
그러나 건물을 끝까지 올랐을 땐 이미 인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건지 강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뭐야!?”
“적입니다! 직업은 아마도 암살자!”
“은신 스킬로 가까이 접근한 거예요! 지금은 도주했고요!”
은신.
SoR 게임에서 주로 암살자 캐릭터가 사용하는 스킬이다.
모습과 기척을 절대적으로 감춰주는 건 아니라서 가까이 접근하면 존재를 들키지만, 그건 게임 캐릭터에 한한 경우였다.
인간인 배진환은 등 뒤로 뭐가 접근한지도 모른 채 뒷목을 관통 당했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이 간혈적으로 움찔거리고, 바닥에는 흥건한 피가 고여 갔다.
지체 없이 그에게 다가가 상체를 안아든 내가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아무나 포션 좀 줘봐!! 아직 치료할 수 있을지 몰라!!”
“관두는 게 좋을걸? 포션만 낭비하는 꼴이라고.”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그곳에 고개를 돌렸고, 레반과 레테라는 자세를 바짝 낮추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거기엔 낯이 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에 후줄근한 검은 츄리닝을 입은 남자.
그는 손가락으로 배진환 뒷목에 난 상처를 가리켰다.
“봐봐. 칼날이 완전히 연수를 관통하고 끊어놨지? 즉사야. 죽은 인간은 포션이 아니라 여신의 눈물을 써도 못 살려.”
“……율.”
지금 일어난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것 자체를 즐기는 건지.
갑자기 나타나 실실 얼굴을 쪼개고 있는 이 빌어먹을 게임의 주최자는 우리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