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첫 이벤트 1
* * *
갑돌이…… 박일봉 씨는 우리가 찾던 악성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가 죽음을 가까이 접하고 있다는 것도, 과거에 나날을 후회하며 혼자 은둔하는 것도, 손자를 떠올리며 접하게 된 SoR을 플레이한 것도, 그러다 만나게 된 지그문트를 위해주는 것도 어느 것 하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수첩을 펼쳤다.
박일봉 씨의 커뮤니티 아이디였던 ‘갑돌이’에 펜으로 선을 직직 그었다.
하는 김에 초딩 김정수의 아이디인 ‘간다간다뿅간다’도 선을 그으며 지웠다. 이놈도 용의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플라즈마’, ‘나그네12278’, ‘나그네19402’
남은 건 이 셋.
이 중에 우리가 보는 앞에서 사람을 죽인 그 빌어먹을 자식이 숨어있는 걸까.
겨우 셋뿐이지만 단서가 전혀 없는 지금 그 셋조차 많았다.
숫자를 조금만 줄였으면 좋으려만…….
‘그러고 보니 연성화의 아이디는 듣지 못했어.’
오프라인 모임에 나왔던 교복 차림의 그녀를 떠올린다.
연성화에 대해서는 판단하기가 많이 애매하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분명 신월 여자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지. 거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만날 수 있을까? 성인 남자 혼자서 그 앞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좀 그러니까 레테라를 대동해야겠지.’
그래도 남을 죽일 만한 인물로는 보이진 않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거니 의심스러운 게 있다면 확실히 확인해두는 게 나았다.
아니라면 그녀의 아이디만 듣고 용의 선상에서 지우면 되는 거고, 만약 그녀가 어떻게든 여기에 관련된 플레이어라면…….
“…….”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캐릭터들은 본래 이쪽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 녀석들 시켜 사람을 죽이게 했다면 그 값을 어떻게 치르게 하지?
이능력 배틀 만화처럼 내가 직접 심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난 그저 지나가던 시민 하나에 불과하다.
길가에 떨어진 불씨를 발견하고, 때문에 화재가 나려는 걸 사전에 막으려는 것뿐이다.
그런 내가 그 사람의 죄를 심판할 권리가 있을까?
‘됐어. 그냥 패는 것만 생각해.’
나는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철학자도 아닌데 이런 걸로 고민해야 하겠는가.
일단 불씨를 놓은 놈부터 쥐어 팬 뒤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뒤에 그놈 캐릭터를 저쪽 세계에 돌려보내든 해야지. 율이 뻥을 친 게 아니라면 돌려보내는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와서, 연성화가 범인이 아닐 경우엔 다른 아이디의 주인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이것도 문제였다.
‘배진환 씨의 휴대폰을 얻을 수만 있으면 한결 수월했을 텐데…….’
배진환은 문제의 플레이어에게 대리로 모임 참가를 부탁받았다. 분명 거기에 관련된 연락처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 휴대폰을 그의 시체와 함께 율이 어디론가 날려 보냈다는 것이다.
다른 장소에서 발견될 거라고 말하더니 그와 관련된 뉴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뜨질 않는다. 율 그 망할 자식, 시체를 어디다가 처박아 놓은 거야?
악성 플레이어, 아이디의 주인, 연성화, 캐릭터를 돌려보내는 방법, 시체의 행방…….
생각할 것은 산더미였다.
그렇게 수첩에 글을 휘적이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옆에서 가느다란 손가락이 튀어나와 내 손에서 수첩을 쏙 빼갔다.
“……응?”
“이런 곳에서 보시면 멀미 나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레테라가 내게서 가져간 수첩을 흔들며 쓰게 웃고 있었다.
뒷자리에 있던 레반이 고개를 내밀었다.
“형님 머리에서 김 피어오르는 모습이 여기서도 보일 지경입니다.”
“신체 튼튼한 저희야 괜찮지만 오라버니는 이틀 간 너무 많이 움직였어요. 거기에다 며칠째 머리 쓰는 일에만 몰두하셨잖아요. 돌아갈 때만이라도 조금은 쉬세요.”
확실히 며칠째 지금 안고 있는 문제로 신음하긴 했다. 근데 그 모습을 두 사람에게 걱정을 끼칠 줄은 몰랐다.
다른 것에서만 신경 쓰느라 바로 옆에 있는 그들의 기분은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민망해졌다.
그런 내가 아무 말 못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내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형님은 조금씩 확실하게 나아가고 있으니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도 확실하게 아군이 되어줄 만한 사람들을 찾아냈잖아요? 고민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잠시 쉬는 게 좋아요. 피곤할 때 생각하지 못했던 게 번뜩일지 모르잖아요.”
레테라는 다시 수첩을 돌려주며, 그것과 함께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왠지 안심이 되어서 자연스레 미소가 나왔다.
“……그래. 그럼 한숨 잘 테니까 도착하면 깨워줘.”
““네!””
씩씩한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안심하며 나는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환승장을 착각한 두 사람이 세 정거장이나 지나치고 나서야 나를 깨우긴 했지만 말이다.
***
도중에 작은 헤프닝이 있었지만, 우리는 큰 문제 없이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겨우 이틀간 나가 있는 거였지만 이렇게 집을 올려다보니 긴 여행에서 돌아온 것 같았다.
어흐흐흑!!!
들어가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건 바로 유령인 미경이 귀곡성이었다. 어째 우리의 귀환을 환영하는 흐느낌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서러움?
미경의 모습과 말은 알아들을 수 없던 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집 지키던 유령이 우리가 오자마자 눈물콧물 질질 짜며 달려 나왔습니다.”
“오라버니가 거짓말을 했다고 하네요.”
“거짓말? 내가?”
특별히 문제될 만한 말은 한 적이 없는데?
떠나기 전에 레아가 집에 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녀에겐 유령을 공격할만한 수단이 없었기에 괜찮을 거라고 말하긴 했다.
어흐흑!!!
“그 괜찮을 거라는 말이 거짓말이었답니다.”
“어제는 정말이지 지옥이었다고 해요.”
“???”
미경의 말을 들어보면 레아가 결국 이 집에 찾아오긴 한 모양이다.
그런데 지옥이라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
요현 일행이 홍련 마을로 떠난 직후, 그 공포스러운 레반과 레테라에게서 해방된 미경은 행복을 부르짖었다.
지금이라면 이 고양감만으로 성불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요현 일행이 없는 동안 이 집은 자신의 차지.
레아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에겐 레반이나 레테라처럼 유령을 공격할 수단이 없으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떠나기 전의 요현이 확실히 언급해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
만약 온다면 겁을 줘서 쫓아내며 이 집을 독차지하겠다는 생각까지 품었다. 확실히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사라지지 옛날 성격이 나오려는 기미가 보이는 미경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집 안을 헤엄치듯 그녀가 룰루랄라 하며 공중을 떠다니던 때였다.
“흐응. 여기가 그 녀석의 집인가? 제법 넓고 괜찮네.”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경은 그게 레아라는 여성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기어코 오다니!
미경은 자신의 공간을 레아와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식을 방해받을 생각도!
그렇기에 그녀는 바로 벽을 통과하며 현관에서 막 들어선 레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경의 모습을 발견한 레아는 별로 놀란 듯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 집에 유령이 하나 살고 있다고 요현에게 귀띔을 받은 상태였으니 당연했다.
“네가 이 집 식구라던 유령이냐?”
나가!
“뭐?”
다짜고짜 면전에 대고 나가라는 미경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레아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난 이 집 주인에게 쉬다가라며 초대 받고 온 건데?”
그딴 거 몰라! 지금 내가 주인이야! 당장 꺼져!
완전히 어린애의 생떼였다.
레아의 표정이 점차 위험한 쪽으로 바뀌고 있었지만, 미경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면 그녀가 무얼 하든 무서울 것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쿠구구구구구구……!!!!!
레아를 중심으로 온 세상이 떨려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숨이 막혔다.
유령이 숨이 막힌다는 것도 정말 이상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미경은 그 순간 질식할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레아가 뿜어낸 기운 때문이다.
살기는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형상적인 기운이다.
레아에게서 사람으로서의 그림자가 사라져 간다.
그녀를 뒤덮는 건 짐승으로서의 그림자.
당장이라도 하룻강아지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지만, 생과 사라는 벽이 가로막혀 있어 이빨만 갈고 있는 분노한 짐승의 형상이었다.
“내게 만드라셀의 독액이 없는 게 정말 유감이네. 하다못해 원래 무기만이라도 있다면 당장 개작살을 내버리는 건데.”
커허…억……!!
미경은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소리를 내기는커녕 당장이라도 자신의 형태가 갈기갈기 찢겨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레반과 레테라가 보여주던 것과 다른 종류의 고통에 그녀의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이었다.
후욱.
돌연, 미경을 괴롭히던 그 숨 막히는 기운이 사라졌다.
레아가 스스로 기운을 거둔 것이다.
“그 녀석이 괴롭히지 말라고 해서 이 정도에서 끝내주는 거야.”
공중에 떠 있을 힘도 없는지 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은 미경을 지나쳐가며 레아는 말을 이었다.
레아는 그 녀석이라고만 말했지만 그게 요현을 지칭하는 거란 것쯤은 쉽게 짐작이 갔다.
무슨 인연인지 그가 미경의 목숨을 수없이 구하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게 옆에서 같이 따라다녀서 문제였지.
“난 샤워 좀 해야겠어. 이 집에 욕조는 있어? 있으면 온수 좀 채워놔. 온도는 사람 체온 보다 약간 높은 정도로.”
아직 정신이 회복하지 않은 차에 난데없는 명령을 받은 미경은 당황하며 말했다.
레아를 무시하고 쫓아내려 했던 그녀의 말투는 어느새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네, 네!? 전 유령인데요?
“그래서 뭐? 너희들 유령은 강한 집념만 있으면 일시적으로 현실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잖아. 그런 집념이 없으면 생기게 해줄까?”
미경을 노려보는 레아에게서 아까와 같은 기운이 날아오려 하자, 주저앉아 있던 미경은 신병처럼 빠릿빠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며 바로 움직였다.
바, 바로 보일러 틀겠습니다! 악을 써서라도 해보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이 옷도 빨아야 하니까 샤워할 동안 갈아입을 옷 좀 가져와. 덩치 큰 놈의 옷은 냄새날 거 같고, 빈약한 년은 사이즈가 안 맞을 거 같으니까 아버…… 신요현, 그 남자 걸로. 키가 비슷하니 옷 사이즈도 얼추 맞겠지.”
네…….
그렇게 미경은 한동안 레아의 별의별 수발을 들어야 했다.
요현이 일행이 집을 떠나면서 생긴 줄 알았던 그녀의 휴일은 그걸로 끝났다.
***
“자업자득이잖아.”
미경의 한탄을 듣고 내가 한 말이었다.
그렇게 지적당하니 할 말이 없어진 건지 미경이 앉아 있다던 방바닥에선 침묵이 감돌았다.
집 주인도 아닌 주제에 주인 행세를 하며 내가 초대한 손님을 쫓아내려 했는데 어찌 좋은 반응이 나오겠는가.
레아를 싫어하는 레반과 레테라가 보기에도 이번 경우는 미경의 과실이 컸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마지막에 레아가 한 말이 그들의 신경을 건든 모양이다.
“그 가슴만 년이 누구더러 빈약하다는 거야…….”
“난 냄새 안 나! 매일매일 청결하게 샤워하고 있다고!!”
그들은 이미 집을 떠나고 없는 레아를 향해 성토했다.
그런 그들을 두고 나는 미경이 그녀가 당했다던 그 기운의 정체를 설명 주었다. 그녀가 이해할진 모르겠지만.
“네가 당한 건 ‘프레셔’라는 스킬이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의지를 가진 자를 압도적인 힘의 크기로 짓눌러 지속적인 데미지와 디버프를 주는 기술이지. 레벨 차이가 크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데, 너에겐 제대로 들어갔나 보구나.”
SoR에서 유령 몬스터는 고레벨군이 많아서 프레셔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런 스킬이 미경에게 통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 뒤엔 어떻게 됐는데?”
으흑!!
“뭐래?”
“냉장고에 있는 맥주와 안주도 먹고, TV도 보고, 잠도 자고 할 건 다하고 갔다네요. 그리고 그걸 전부 본인이 수발들었데요.”
“그거 참 다행이네.”
어째 그녀의 모습이 생생히 머리에 그려지는 듯 했다. 그녀의 거침없는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그녀가 우리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직 시달린 게 많았는지 별의별 귀곡성을 흘려대는 미경을 두고 나는 가까이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쪽지가 있었다. 누가 남겼는지는 쉽게 짐작이 갔다.
쪽지에는 서툰 글씨로나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잘 쉬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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