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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25화 (125/173)

〈 125화 〉 화해의 한 잔 ­ 2

* * *

쿠궁……!!

주위를 둘러싼 무쇠 투구에 전해지는 진동이 커진다.

잔해를 파헤치는 캐릭터들과 점차 위치가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동맹…… 말인가요?”

점차 커져가는 진동 속에서 안범석이 되물었다.

“동맹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어요. 그냥 자주 교류 좀 하자는 거죠.”

“그런 거에 무슨 의미가…….”

“적어도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처럼 서로 경계하다가 이 지경까지 가는 일 없이 말이죠.”

“윽…….”

아픈 부분을 찔린 안범석이 신음을 흘렸다.

“믿을 수 있는 동료를 늘리고 싶어요. 사실 이미 친분을 맺고 있는 한 플레이어도 있는데, 외딴 곳에 사셔서 인터넷 메일이 아니면 만나기 힘들거든요. 헤븐즈 게이트의 능력이 있으면 그쪽과도 교류하기 원활해질 것 같네요.”

“하지만 전 아직 신뢰받지 못하는 단계 아닙니까?”

“그러니 더더욱 팔 안쪽에 두고 주시하고 싶어지는 거죠.”

“직설적이시군요.”

“여기선 솔직하게 나가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아서요.”

허심탄회하게 말을 늘어놓는 내 모습이 싫지는 않은지 안범석도 슬쩍 웃음을 흘렸다.

“굳이 효용성에 대해 따지자면 안범석 씨 쪽에는 ‘능력’이, 저희 쪽에는 ‘무력’이 있다는 점일까요. ‘헤븐즈 게이트’ 같은 공간이동형 능력은 귀해요. 횟수가 제한된 스크롤보다 훨씬 효율적이기도 하고요. 만약 동맹을 맺어서 서로의 진영을 잇는다면…….”

“……그렇다면 신요현 씨와 달리 진짜 적대적인 플레이어의 등장에 보다 확실하게 대처할 수 있겠군요.”

“바로 그거죠.”

내가 수긍하자 안범석은 잠시 고민하듯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쿠우웅……!!

진동이 한 번 더 느껴질 즈음, 그가 다시 입을 열며 물었다.

“한때 이성을 잃어서 당신을 공격한 저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안범석 씨야말로 통제하지 못하는 캐릭터를 데리고 다니던 절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있습니다. 캐릭터와 갈등하면서도 최대한 양쪽에 피해가 없고자 움직이던 당신의 모습은 기억에 남아요.”

“저도 믿습니다. 자기통제력과 별개로, 당신은 도저히 악한처럼은 보이지 않아요.”

씨익.

미소가 그려진다.

안범석 씨과 나, 둘에게서 동시에 나타난 미소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안범석이라고 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죠, 신요현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안범석과 악수를 나눴을 때였다.

쿠우웅!!

무쇠 투구의 벽이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흔들렸다.

잠시 뒤, 투구가 통째로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은은한 달빛이 내리는 밤하늘이 우리들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찾았다!”

“범석 씨!”

“형님!”

“오라버니!”

소리가 울리는 답답한 공간이 사라지자마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레아와 진혜는 물론, 어느새 돌아와 있는 레반과 레테라까지 가세해 잔해를 뒤지고 있었나 보다.

그들은 거인족의 투구가 차지하던 반경만큼 파헤쳐진 땅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곤 환호성을 지었다. 우리들의 무사가 무엇보다 기쁜 모양이다.

“진혜야아아아아아아!!!”

기뻐하는 건 캐릭터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캐릭터에게 남다른 애정을 주는 안범석은 상처투성이의 진혜를 발견하자마자 반쯤 울먹이며 구멍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그녀의 몸을 으스러지듯 안아주었다.

그들을 몰랐을 때에 이 모습을 본다면 캐릭터에게 너무 마음 쓰는 게 아닌가 생각했겠지만, 안범석의 이야기를 들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시련이 사랑을 키운다고 했던가. 이들은 플레이어와 캐릭터지만 함께 시련을 견디고 뛰어넘어왔다.

서로를 향한 감정은 남녀의 그것을 닮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마음의 세기만큼은 내가 캐릭터들을 가족으로서 대하는 것 이상일지 모른다.

“정말 손 많이 가게 하는 부모라니까.”

말로는 틱틱 대지만 여전히 나를 부모로 여겨주는 레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가장 나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히죽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진혜를 살려주었구나?”

“김빠졌거든. 싸움을 포기한 데다 숨넘어가기 직전인 녀석 괴롭히는 취미는 없어.”

“응.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뭘 실실 쪼개고 있어? 이대로 구멍 속에 파묻어 달라는 거냐?”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내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레아는 표정을 찡그렸다가 팔을 마저 당겨 나를 구덩이에서 꺼내주었다.

구덩이를 나오자마자 양쪽에서 그림자가 덮쳐왔다.

“형니이이임!!! 큰일 나신 줄 알았습니다!!!”

“오라버니이이!!!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꾸엑!!”

양쪽에서 힘껏 짓누르는 압력에 단말마 같은 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대략 7시간 반 만에 재회한 나를 보고 기쁨을 주체 못한 레반과 레테라가 달려든 것이다.

신체능력 차이를 생각해 힘조절은 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숨이 막혀오는 포옹이다.

게다가 레테라의 작으면서도 부드러운 가슴과 레반의 크고 단단한 대흉근 사이에 끼인 기분은…… 뭐랄까,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기분이었다.

온도 차이는 달라도 결국 둘 다 사후세계다.

이대로 있으면 진짜 둘 중 하나의 세계로 가버릴 것 같았기에 압력에서 무사한 두 팔로 두 사람에게 탭을 걸었다.

내가 숨넘어가기 직전이라는 걸 알아차린 두 대형견이 서둘러 팔을 풀었다.

“뭐하는 짓인지…….”

“……일단 너도 감당해줄 수 있으니 삐지진 마.”

“진짜 때려줄까?”

너도 어서 들어오라는 듯 두 팔을 벌린 나에게 레아는 그녀의 이미지인 늑대처럼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다 한쪽으로 시선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저것들은 어떡할 거야? 보는 사람 남사스러워질 만큼 꽁냥 대고 있는데?”

“이런…….”

서로를 격렬히 껴안는 안범석과 진혜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낯이 절로 뜨거워질 정도였다.

마치 영화 끝에 극적으로 다시 만난 연인의 재회를 보는 것 같달까.

레테라는 흥미가 생기는지 저들을 향해 눈을 빛냈고, 레반은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목소리로 ‘혹시 쟤들 떡도 치는 사이입니까?’라고 물어왔다. 거참 단어 선택 좀.

“설마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저놈들이야. ‘당하면 갚아준다’……. 그게 우리의 룰 아니었어?”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지만 레아는 확실한 마무리를 원하는 모양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계산은 끝났어.”

“뭐?”

“일단 레반과 레테라를 날려 보낸 건, 진혜의 단독행동이었으니까 그녀가 충분히 대가를 치렀잖아?”

겨우 마음이 진정됐는지 안범석의 품에서 벗어나는 진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오늘 낮에 보았던 아리따운 동양계 미인의 모습은 어디 가고 좀비 같은 모습의 여성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멈추라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신나게 두들겨 팬 레아의 작품이었다.

만약 진혜가 레반과 레테라를 이 장소에서 배제해버리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가는 일이 없었겠지. 충분히 자기 행동 때문에 돌아온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 말을 들은 레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틀린 부분은 없었기에 반박하기도 뭐했다.

“하! 그래, 캐릭터끼리의 문제는 그렇다 쳐. 그럼 댁은? 이미 캐릭터와 플레이어에게 한 번씩 공격 받았잖아? 자기가 참을 테니 넘어가 달라는 소리라도 나오면 내가 다 뒤엎고 갈 줄 알아.”

플레이어를 공격하는 행위는 캐릭터가 가장 거슬려하는 것이었다.

내 몸에 남은 자잘한 상처가 그저 무너지는 건물에 휩쓸리면서 생긴 게 아니라는 걸 눈치 챈 레반과 레테라의 분위기마저 흉흉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그들이 분노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이미 충분히 값을 받았어.”

그렇게 말한 내가 발끝으로 우리가 서 있는 콘크리트 잔해를 두드렸다.

“건물 부서진 거? 그게 뭐?”

“넌 건물주에게서 건물을 빼앗는 행위가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지 알지 못하는구나? 심지어 이건 보험도 힘들 거라고.”

레아가 다시 안범석 쪽을 바라보았다.

진혜와 다시 만났다는 것에 기쁨을 충분히 나눈 안범석은 이젠 무너진 건물터로 시선을 돌렸다.

황량하기까지 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눈앞에 처참한 현실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모습이었다. 옆에서 진혜가 열심히 다독이고 있지만 바로 회복하진 못했다.

내가 저 기분 알지.

원룸집 단칸밤이 레반, 레테라에 의해 날아갔을 때 기절할 뻔했는데, 자기 소요 건물, 심지어 운영하던 헬스클럽의 모든 운동기구까지 그대로 날려버린 안범석이라고 멀쩡하겠는가.

내 경우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뭔가 좀 더 날뛰고 싶어 하는 듯한 세 사람이었지만, 저런 망연자실한 상대를 보고 싸울 마음이 들지 않는지 결국 나를 따라서 잠자코 있었다.

잠시 뒤, 쇼크에서 회복될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린 안범석이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진혜와 함께 다가왔다.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말 여러모로 폐를 끼쳤습니다.”

안범석이 허리를 숙이자 몸이 불편한 진혜도 따라서 숙였다.

“아닙니다. 저도 이렇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나도 허리를 숙이자 레반과 레테라도 당황하다 함께 숙인다. 그 모습이 어째 부모를 따라하는 어린애들 같아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레아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늬들끼리 잘 해보라는 듯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이제부터 어쩌실 건가요?”

안범석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답했다.

“우선…… 분주히 움직여야겠죠. 무너진 건물의 뒤처리도 해야 하고, 회원들에게 연락도 해야하고, 그 중에서는 이용비 환불도 해줘야 할 겁니다.”

“뭔가 진짜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그냥 비싼 수업료 치렀다고 생각하려고요. 이번 일로 무작정 플레이어에 과민 반응해서 좋을 거 없다는 걸 알았고, 제가 몸에 비해 마음에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으니까요.”

헬스클럽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훨씬 후련해진 표정으로 안범석은 말하였다.

“그리고 당신들처럼 강한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되어서 차라리 다행인 걸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 꼭 지켜봐주세요.”

“저희도 위험한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드릴게요. 아니지. 이런 얘기를 이런 삭막한 데에 서서 말하는 것보단…….”

내가 말을 아끼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이봐. 수다는 늬들끼리 잘 떨어봐. 난 이제 간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지 작별을 고한 레아가 등을 돌리며 떠나려하였다.

그런 그녀의 발걸음을 내가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 봐, 레아.”

“으응?”

아직 볼 일 남았냐는 듯 띠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레아.

나는 같이 가자는 듯 엄지를 흔들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도 같이 한 잔 하러 가자.”

“아앙?”

마치 업무 끝낸 뒤의 직장 상사 같은 내 말에 뭔 헛소리냐는 듯 레아가 인상을 구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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