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화해의 한 잔 3
* * *
[삐용! 삐용!]
건물 붕괴가 일어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게임이라는 강제적인 요소가 지나가고 현실의 기능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 같았다.
건물이 있던 지점으로 모이는 빨갛고 파란 불빛을 먼 곳에서 바라보았다.
이곳은 무재시 가장자리 쪽에 붙어 있는 달동네가 자리한 지점이라 지대가 높았다.
밤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빛을 잃지 않는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들이키며 도시를 바라보았다.
술기운이 하루의 끝을 알려주기 때문일까. 저 도시 숲 사이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다 멀게만 느껴졌다.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캔맥주를 쥐고 있는 안범석의 넋이 반쯤 나가 있는 게 보였다.
입가에서 하늘하늘 거리는 저건 절대 요즘 날씨가 쌀쌀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진짜로 영혼이 빠져나오기 직전인 것이다.
“……괜찮으세요?”
“허억……!!”
내 부름에 그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입가에 희끄무레한 물체도 입안으로 쏙 들어간 상태였다.
“이거 실례. 잠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다 막막해져서…….”
“모아둔 돈은 없으세요?”
“그것만으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터라…….”
“…….”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편의점 앞에 마련된 테라스에는 캐릭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레반, 레테라, 진혜는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았고, 약간 떨어진 테이블에선 레아가 맥주 안주로 산 땅콩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딴 데로 향한 틈을 타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안범석을 향해 슬쩍 내밀었다.
“……? 이건?”
“쉿. 조용히 받아요.”
내가 건넨 게 게임 속 금화라는 걸 안 안범석이 놀란 눈을 하였다.
“저쪽 세상의 금은 현실세계의 금과 동일하더라고요. 다른 점이라면 엄청 널널한 자원이라는 것 정도? 하긴 그러니까 멸망해가는 와중에도 화폐로 유통한 거겠지만요. 순금 함량이 높아서 팔면 도움이 될 거예요.”
“신요현 씨…….”
금화를 받아든 안범석은 갑자기 그것을 꽉 쥐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는 행동이었다.
“플레이어와 관련된 거면 대부분 안 좋은 기억뿐이라 최대한 피해 다녔었는데……. 저희를 처음 발견한 플레이어가 당신이라서 다행입니다.”
훌쩍이는 소리는 내는 안범석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려주었다.
각자 나름의 사정으로 현실의 고됨을 견디는 사람들끼리의 동병상련이었다.
***
“그래서, 사귀어?”
캔맥주를 홀짝인 레테라가 물어왔다.
진혜는 두 손을 무릎 앞에 모으고 우물쭈물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뇨. 저 같은 게 무슨 범석 씨 같은 분과…….”
“그런 것치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던데?”
레테라의 지적에 진혜의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간다.
레아에게 처맞고 좀비에 가깝게 망가졌던 모습은 더는 없었다. 전투 중 날아간 포션을 회수해서 신체를 회복시키고 옷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진혜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심플하게 귀여웠다.
“전 안범석 씨와 맞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그분을 절 한 명의 여성으로 대해주셔서…….”
“오오.”
레테라는 짧게 감탄을 흘렸다.
그건 여성으로의 본능인 걸까. 요현에 의해 만들어진 태생과는 별개로 레테라는 이러한 이야기에 흥미가 많았다.
그때 옆에서 맥주를 비우고 있던 레반도 진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떡도 치냐?”
빠아아아아악!!!
“뭐하는 짓이야!!”
느닷없이 뒤통수로 날아온 손바닥에 레반의 푹 꺾였다가 분노와 함께 치솟았다.
뒤통수를 맞아서가 아니라, 푹 꺾인 머리가 맥주캔을 찌그러뜨린 바람에 내용물이 전부 쏟아졌기 때문이다.
맥주에 흠뻑 젖은 레반이 사나운 얼굴로 외치자 레테라 또한 사나운 반응을 보였다.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냐. 달달한 연애 토크를 나누고 있는데 성희롱 아저씨 같은 말투로 끼어들어서 초치지 마. 확 담가버린다.”
“저, 저기, 진정하세요…….”
레반과 레테레 사이에서 터질 것 같은 기류가 흐르자 진혜가 끼어들어 말리려 하였다.
정말이지 레아의 경우도 그렇고, 이들은 왜 이렇게 서로 사이가 나쁘단 말인가?
그런데 진혜가 나서서 말릴 것도 없이, 레반과 레테라는 서로 알아서 물러난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자리에 앉았다.
스위치가 바뀐 듯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에 진혜가 놀라고 있을 때, 곧 이들이 싸움을 멈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범석과 함께 도시를 바라보고 있던 신요현이 소란의 기운을 느끼고 이쪽을 돌아본 것이다.
지금 레반, 레테라의 모습은 부모에게 혼나기 싫은 어린아이들 같다고 진혜는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 일 없던 듯 각각 맥주캔과 찌그러진 맥주캔을 입에 대고 있던 두 사람 중 레테라가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밤일에 대한 여부는 나도 궁금하긴 해.”
“결국 묻는 건가요!?”
덕분에 대부분 맥주를 쏟았던 레반도 발끈하며 외쳤다.
“나랑 다를 바 없잖아!”
“완전히 다르지! 이런 건 돌직구가 아니라 에둘러서 표현해야 예의인 거라고!”
“지랄! 밤일이나 떡치는 거나 결국 그게 그거지!!”
또 싸우기 시작한다.
어차피 내버려 두면 어느 정도의 선에서 알아서 멈출 거란 걸 조금 전에 학습했기에, 진혜는 그들을 가만히 두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적절한 선에서 다툼을 끊은 그들은 진혜를 돌아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진혜는 아까보다 더 말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런 걸 말하는 건…….”
“참고로, 말하지 않는다면 저쪽에서 들키지 않는 선에서 네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릴 거야.”
“…….”
진짜 이런 사람들과 동맹해도 되는지 심히 걱정되는 진혜였다.
“그래서, 해봤냐?”
“우리가 이 세계에 출현한 지 한 달하고 조금밖에 안 됐으니까 선을 넘긴 이른가?”
“그…… 이쪽 세계에서 범석 씨와 직접 만난 건 한 달 전이지만, 서로를 보고 의식하기 시작한 건 5년이라서요……. 그래서, 그……. 자연스럽게…….”
“했구만.”
“했네, 했어.”
두 사람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진혜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 위에 파묻어 숨겨야 했다.
이건 대체 뭐지? 수치심 고문?
다른 경우였다면 힘을 써서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 텐데, 상대는 한 명조차 진혜보다 훨씬 강했다.
맹수 두 마리 사이에 끼인 가녀린 새 한 마리가 이렇지 않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레테라가 테이블 위에 바짝 엎드리듯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변한 눈으로 묻는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네, 네?”
“애초에 우리의 신체는 이 세계의 사람들에 비하면 심하게 강하잖아? 관계를 맺을 때마다 다치진 않겠어? 아니면 저 정도로 몸을 단련한 인간이면 버틸 수 있나?”
목소리에 담긴 진중함으로 볼 때 이전 질문은 밑밥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묻고 싶었던 질문 같았다.
진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물음에 답했다.
“그, 그게……. 처음 시도할 땐 ‘구도자의 팔찌’를 사용해도 범석 씨가 다칠 수준이어서, 신체 강화 포션까지 사용해야 겨우 안전하게 할 수 있었어요.”
“능력치를 레벨1 수준으로 제한하는 구도자의 팔찌와 신체능력을 강화 시키는 강화 포션이란 말이지…….”
진혜의 말을 듣고 레테라는 자리로 돌아온 뒤 입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곤란하네. 오라버니는 강화 포션을 필요할 때만 만들고 사용하는 타입이라서 지금 인벤토리에 없을 텐데…….”
“잠깐 기다려, 이 년아. 너 그걸 가지고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문뜩 불길함을 느낀 레반이 식음땀 한 방울과 함께 물었고, 레테라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난 ‘형님’으로 만족하는 네놈과 다르게 ‘오라버니’라는 호칭에서 끝낼 생각 없어.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 남남 관계에 비해 남녀 관계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 아니겠어?”
그 말에 레반은 한 번 상상해보았다.
신요현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자신이, 그 옆에 있는 레테라를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상상을.
……당장 이 여자의 대가리를 쪼개서 죽여 놔야 한다고 확신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노골적인 살의를 담은 주먹이 레테라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그 여파가 어찌나 센지 그녀가 앉고 있던 플라스틱 의자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지만, 정작 레테레의 피해는 미미했다.
레반의 공격을 읽은 그녀가 두 팔을 들어 주먹을 가드 했기 때문이다.
“어머나? 갑자기 왜 이리 흥분하고 그러실까? 오라버니를 뺏길까 화가 나? 유감이네. 오라버니는 남자에게 흥미 없어. 전에 인터넷에서 읽던 웹소설이 갑자기 BL물로 드리프트 했다고 쌍욕하시는 모습을 봤거든.”
“ㅈ까는 소리 하지마라, 이 년아. 난 형님을 가슴 깊이 우러르며 존경한다. 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인내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런 나조차 참지 못하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는 네 년을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미래고, 또 하나는 그런 너에게 형님이 잡혀 사는 미래야!”
“잡혀 살긴!! 난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아내가 될 거거든!! 아이는 한 30명 낳고 말이야!!”
“이 자식!! 형님을 종마랑 착각하는 거냐!?! 형님 몸이 그걸 버틸 수 있을 리 없잖아!! 그에게는 모든 남자들이 우러러보며 부러워할 삶이면 족해!! 가량 아내 30명을 두는 하렘이거나!!”
“이 개자식이!! 그게 더 종마 같잖아!! 그딴 같잖은 여자들이 내 눈에 띄기만 해봐!! 전부 처죽여 버리겠어!!!”
두 사람의 살기가 부딪치며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그들과 가장 가까이에 앉아 살기를 쐐야 했던 진혜가 땀을 뻘뻘 흘렸다.
그래도 그녀를 향한 구원은 금세 찾아왔다.
“그래. 아내가 30명이라니, 전부 처죽이겠다니……. 무슨 얘기를 하다가 싸우는 건지 전혀 짐작도 안 가지만 말이야…….”
움찔!!
맞부딪치는 살기 속에서 선명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레반과 레테라는 동시에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린 그곳엔, 소란을 감지하고 달려온 신요현이 웃는 낯으로 서 있었다.
“일단 둘 다 대가리 박을까?”
***
“오오! 놀라운 자세야. 팔을 쓰지 않고 이마만 땅에 대어 물구나무를 서는 것으로, 오로지 목의 힘만으로 몸을 지탱하는 건가? 목 근육을 웬만큼 단련하지 않으면 바로 병원행이겠어.”
“혹여라도 따라 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범석 씨…….”
편의점 테라스 옆에서 레반과 레테라가 그랜드 대가리 박기를 실시하는 모습을 안범석은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반쯤 정줄 놓고 생각해낸 자세에 헬스 트레이너의 마음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던 모양이다.
편의점 직원에게 그들이 부순 의자값을 물어주고 온 나는 새 맥주와 함께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맥주를 마시며 모든 난리를 지켜보고 있던 레아가 있었다.
“……댁들은 평소에도 이래?”
“뭐, 평소엔 더 심하지.”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형님, 오라버니, 하던 거 뭐야? 그쪽 취미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마음에 드는데? 도원결의라고 알아? 옛날에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쥐뿔만큼도 안 궁금하거든.”
내 말을 끊은 레아가 말을 이었다
“나 가는 거 붙잡은 게 이런 생쇼 보여주려고 한 거야?”
“아니, 그냥…… 화해하고 싶어서.”
“……화해?”
레아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되물어 온다.
나는 새로 산 맥주를 까며 말했다.
“전에 심한 말해서 미안해. 넌 게임 속 데이터가 아니라 엄연히 자아를 가진 존재인데……. 분명 그날의 사건에 엮인 당사자인데, 난 자신의 일로만 생각해서 선을 그으려 했어.”
레아와 처음 재회했을 때, 파업중인 공사장 위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감정이 앞 나가는 바람에 그녀의 입장을 이해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통제를 듣지도 않고, 그녀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위급한 순간에 그녀의 도움을 받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 화해하고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 이걸로 묵힌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테니, 조금씩이라도 천천히 풀어가 보자고.”
뚜껑을 딴 맥주를 레아에게 내밀었다. 건배의 제스쳐였다. 캐릭터들과 처음 현실에서 만나 정신없는 시절, 나와 레반, 레테라는 캔맥주를 부딪치며 서로의 관계를 인정했다.
삼국지의 도원결의처럼, 그들을 가족으로서 내 안에 받아드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 레아와는 나누지 않았다.
그런 미련이 지금 내밀어진 맥주에 담겨 있었고, 그런 내 손을 바라보던 레아도 따라서 맥주캔을 내밀었다.
그렇게 캔끼리 부딪치려 한 순간,
쪼르르르륵.
“아.”
레아는 그대로 맥주를 기울여 바닥에 쏟아버렸다. 그 행위에 놀란 내가 소리를 내었다.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탕.
빈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난 안 돌아가.”
그것은 레아의 협력을 얻어내기 직전에 한 약속이었다.
레아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내가 한때 게임을 완전히 접으려 했던 계기가 된 ‘친구’의 존재.
그 녀석을 찾는 것.
“번지수 잘못 찾았어. 난 더 이상 당신을 원망 안 해. 그러니 이런 건 필요 없지. 화해의 한 잔은 나 말고 그 녀석과 나눠줘. 그럼 나도 오빠든 뭐든 불러줄 테니까.”
그렇게 자기 말만 남기며, 레아는 바닥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높이 떠오른 시선은 도시에 야경 사이로 사라져갔고, 안범석과 진혜가 갑작스레 머리 위를 지나는 그녀의 그림자에 놀라 시선으로 쫓는 모습이 보였다.
도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레아를 지켜보던 난 무심코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도원결의 알고 있었잖아.”
안 그러면 마지막에 오빠든 뭐든 불러준다는 소리가 튀어나올 리 없었다.
레아는 따지고 보면 도원결의의 관우, 장비라기보단 제갈량에 가까울 것 같다.
제갈량처럼 똑똑하진 않지만, 함께 하려면 세 번이나 직접 찾아가야 할 만큼의 정성이 필요하다.
“…………게임에서밖에 만난 적 없는 녀석인데, 찾을 수 있으려나?”
건배를 나눌 상대를 잃은 맥주를 홀짝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린 직후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밝게 지상을 비추고 있는 달의 모습이 눈 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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