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진정한 해후 1
* * *
인간과 궤를 달리하는 초인들의 싸움에 시달리던 산에 드디어 진정이 찾아왔다.
때 아닌 물벼락에 산봉우리가 깎여 내려오고, 그런 토석류 위에 진짜 벼락이 떨어져 수분을 일제히 증발시켰다.
멀쩡하게 서 있는 나무가 하나도 없었고, 땅은 도자기와 같은 재질이 되어 쩍쩍 갈라졌다.
만약 이 싸움이 외진 산간이 아니라 도시 한 가운데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뭐, 결국 우리가 죽지 않고 끝났으니 다행이지.”
“그러게 말이야.”
연성화의 말에 공감하며 나는 쓰러진 석오태를 향해 다가갔다.
이 녀석에겐 볼 일이 너무 많았다.
이 게임에 대해 얼마 파악하고 있는지 하며, 다른 플레이어를 알고 있는지에 대한 유무.
무엇보다 돌려받아야 할 것과,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빼갔는지도 알아내야 했다.
“야, 일어나.”
“…….”
레아의 주먹에 맞고 날아가 널브러진 석오태를 발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녀석에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발끝으로 두드리자 움찔하는 모습은 분명히 보였다.
그레토와 파니야라는 두 캐릭터를 잃게 되자 기절한 척 하면서 어떻게든 상황을 넘겨보겠다는 개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냉큼 일어나라. 네놈이 한 짓만 생각하면 그나마 남아 있는 인간 취급 해주자는 마음까지 사라져버릴 거 같으니까.”
으르렁 거리듯 말하며 땅에 엎어져 있던 녀석의 몸을 발끝으로 밀어 뒤집었다.
그렇게 드러난 석오태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난 이내 이상함 느꼈다.
석오태의 얼굴을 본 순간 지금 이게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든 것이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숙여 녀석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이쪽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 채고 레아와 스콜이 다가왔다.
“왜 그래, 아버지? 그놈이 말을 안 들어? 내가 더 패줄까?”
“레아, 이번엔 나에게 맡겨라. 너와 다른 두 분은 때렸지만 아직 난 한 대도 때려보지 못했어.”
레아는 아직 더 혼쭐내주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린다는 듯 주먹을 털었고, 늘 냉정한 스콜도 이 기회를 양보하기 싫은 듯 나섰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석오태의 상태를 말해주었다.
“아니, 이 녀석…… 숨을 안 쉬는데?”
“뭐……?”
“예……?”
“……아니, 뭐라고!?”
레아와 스콜의 동작이 굳고, 연성화가 놀란 듯 달려왔다.
그리고 나는 레아에게 따지듯이 외쳤다.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진짜 안 죽이려고 힘 조절 했어! 이놈이 약한 거야!!”
분명 레아가 힘 조절을 한 건 맞을 것이다.
맞은 곳이 심히 좋지 않았다는 것과 거기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는 게 문제이지.
한편 연성화는 내 반대편에서 석오태의 상태를 살폈다.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몸.
가슴에 기복은 없고, 입가엔 흘러내린 토사물이 묻어있다.
그녀는 닫혀있는 녀석의 양 눈꺼풀을 벌려보았다.
열린 양쪽 동공의 크기가 서로 맞지 않았다.
“뇌진탕 증상이잖아!”
“뇌진탕!? 치료할 수 있어!?”
“내가 의사도 아닌데 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래도 아직 죽진 않았어. 하지만 서둘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진짜 죽을 거야!”
“하지만 이대로 병원으로 데려갈 순 없잖아?”
그렇다.
이런 산중이라면 구급대를 부르기도, 그렇다고 병원으로 데려가기도 힘들다.
설령 데려간다고 쳐도 문제다.
이 녀석의 부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율이 있는 이상 캐릭터나 우리를 둘러싼 게임의 존재는 퍼져가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소소하게 휘말려든 사람까진 어떻게 되는 지까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그라면 오히려 더 즐겁게 구경이나 할 것이다.
역시 석오태를 병원에 데려가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다.
“포션을 쓸까?”
“그거 괜찮은 거야?”
내 제안에 연성화는 우려를 드러냈다.
우리가 가진 포션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걸 우려하는 건 아니었다.
“나도 포션의 효능을 경험한 적은 있어. 그건 치료하기보단 ‘강제로’ 복구 시키는 것에 가까웠어. 뇌에 대미지를 치료하는데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잖아? 다른 수가 없다면 이거라도 써 봐야지.”
“으음…….”
그 말에 연성화는 고민하듯 중얼거렸다.
“뭔가 포션 외에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그때였다.
정말이지 절묘한 타이밍에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난입해왔다.
“형니이이이이이임!!!”
“오라버니이이이이!!!”
“주인니이이이이임!!!”
황폐화된 산등성이.
그곳을 내달리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주변에 어둠이 짙긴 했지만 그 모습은 똑똑히 구분할 수 있었다.
레반, 레테라, 하티. 세 사람이었다.
연성화가 그들을 불렀다고는 들었지만 거리상 제 때 도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도달했다.
전력으로 달려드는 세 사람의 뒤로 지그문트와 진혜의 모습이 있었다.
그중 진혜의 모습을 보자 저들이 이토록 빠르게 도달한 이유를 알 수 있…… 잠깐만.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전력으로 달려들어?
“아.”
말 그대로 전력으로 달려드는 중이었다.
레반과 레테라가.
나에 대한 걱정과 무사히 만났다는 사실이 몸에 리미트를 날려버린 모양이다.
우려와 안도가 뒤섞인 그들의 표정은 풀엑셀을 밟는 자동차처럼 엄청난 기세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 이거 조금 위험하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레아가 내 앞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풀엑셀을 밟으며 달려오던 자동차는 갑자기 출현한 벽과 충돌해 찌그러져 날아갔다.
레반의 얼굴을 크고 단단한 대방패로 후려치고, 그 옆을 지나가는 레테라는 기둥처럼 두꺼운 도끼자루를 휘둘러 복부를 얻어맞는다.
달려들던 기세에 두 배에 달하는 충격으로 뒤로 날아간 레반과 레테라는 빠르게 자세를 잡으며 착지했다.
그러나 고통만은 어쩔 수 없는지 각각 코와 복부를 부여잡고 사나운 눈빛으로 레아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 갑자기 무슨 짓이냐!?”
“오라버니와의 감동적인 재회를 방해하지 마!!”
“닥쳐, 멍청이들아. 늬들은 자기가 아직도 강아지인 줄 아는 대형견이냐? 방금 그 기세로 아버지에게 달려들었으면 크게 다쳤다고.”
레아가 백번 오른 말이었다.
까딱했으면 내가 저 석오태 옆에 나란히 누워 있을 뻔했다.
잘 막았어, 우리 첫째!
한편, 레아의 일격 덕분에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두 사람이 레아를 지나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참, 형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적은 어디 있어요!? 제가 다 처죽여버릴게요!!”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게 이 정도인가…….
레반과 레테라는 주변에 수상한 그림자가 남아 있다면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것처럼 두 눈을 사납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다 끝났으니 진정해…….”
나는 두 사람을 다독이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캐릭터를 다독이는 데 힘 쓰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주인니이이이임!?!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진 않으셨죠!? 힐 써드릴까요? 긁힌 상처라도 있으면 남김없이 말해주세요. 주인님의 고운 피부에 작은 생채기 하나도 남길 수 없어요! 제가 모조리 치료해드릴게요!!!”
하티의 신앙심은 오로지 부모이자 주인인 연성화 하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연성화와 재회한 하티의 반응은 격할 수밖에 없었다.
스콜이 연성화에게 달려들려는 하티의 뒷덜미를 붙잡고 공중에 띄워서 제지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찰거머리처럼 달라부터 연성화를 더 곤란하게 했을 것이다.
“아니, 난 괜찮으니 이놈을 치료해줄래? 포션을 쓰긴 너무 아깝거든.”
“네?”
그제야 하티는 죽어가는 석오태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둘러줘. 지금도 위독한 생태야.”
“아, 알았어요!”
누구의 부탁인데 거부하겠는가.
하티는 바로 스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석오태에게 다가가 힐을 시전 했다.
그녀가 손을 대고 성령을 흔들자 치유의 빛이 석오태의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힐이라는 신성마법은 상처부위에 직접 손을 대고 사용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았다.
신체의 퍼지는 신성력의 움직임으로 하티는 문제가 생긴 부위가 석오태의 머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녀석의 머리를 감싸듯 자신의 두 손을 얹고 하티는 치료에 집중했다.
그러나 역시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는지 치료를 이어가던 와중 고개를 돌리며 물어보았다.
“일단 치료를 하고 있긴 한데……. 이 인간은 누구예요?”
하티의 궁금증을 레아와 스콜이 입을 모아 풀어주었다.
“아, 그놈? 아까 우리를 죽이려든 놈들의 대빵이 그놈이야.”
“2년 전 멸신검을 훔쳐가 저 두 분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든 원인제공자이기도 하지.”
우드득.
그 말을 듣는 순간 하티가 잡고 있던 석오태의 목에서 위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아있는 인간의 몸에선 결코 들려선 안 될 소리에 놀란 우리는 일제히 하티를 돌아보았고,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챈 그녀가 짧게 중얼거렸다.
“아.”
실수했다.
지금 자신이 치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주인인 연성화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준, 천 번 죽여 마땅할 작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간 버린 것이다.
분명 가슴 쪽으로 나와 있어야 할 터인 석오태의 고개는 180˚ 돌아가 지금은 등 뒤쪽으로 나와 있었다.
“치료를 하라니까 확인 사살은 왜 해!?!”
연성화가 기가 찬 듯 외치자 하티의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말했다.
“아, 아니에요! 죽이지 않았어요! 아직 힐은 유지되고 있거든요?! 얼굴의 방향만 원래대로 돌리기만 하면 아무 문제없어요!”
지금도 공급되는 신성력이 숨이 끊어지는 걸 막는 걸까?
저 상태가 되고도 아직 숨이 붙어 있다니, 신의 기적이라기 보단 중세 종교 심문관의 고문 노하우처럼 느껴져 괜스레 오싹했다.
하티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해 석오태의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되돌렸다.
우드드드득!!
그러나 너무 당황한 게 문제였다.
아니면 마음 속 한 줌의 살의가 저지른 미필적 고의거나.
움직인 방향을 그대로 되돌아가야 할 석오태의 고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서 결국 360˚도 회전하고 말았다.
지금 석오태의 모습은 차마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그에게 진정한 축복은 죽을지 모른 순간 근처에 성직자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현재 의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냥감 해체의 달인 지그문트와 신성 마법의 일가견이 있는 진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가망 없군.”
“힐을 써서 치료한다고 해도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겠는데요?”
“거기! 구경 말고 가까이 와서 도와! 부들부들 경련 일으키는 이 쓰레기의 몸 좀 고정하라고! 목뼈가 비틀려서 연수에 손상이 갔어! 힐을 쏟아 부으면서 조심히 되돌리지 않으면 전혀 못 고쳐!!”
일이 점점 커지자 조급함에 쫓긴 하티가 주변 캐릭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죽 여유가 없었으면 평소의 존대도 생략한 상태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캐릭터들이 팔을 거둬붙이며 그녀를 돕기 위해 다가갔고, 곧 석오태를 둘러 싼 한편의 의학 드라마가 펼쳐졌다.
“어어……. 이건 우리 잘못 아니지?”
“저놈이 자초한 거야. 그러게 왜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가지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던 연성화와의 대화였다.
“저놈이 죽으면 멸신검 돌려받지 못하겠지?”
“뭐, 살아도 돌려받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연성화의 불안감에 무게를 더하듯 응급 수술의 현장에선 심상치 않은 대화소리만 들려왔다.
“야, 이놈 심장마저 정지했는데!?”
“손으로 가슴을 적당히 주물럭거려! 갈비뼈 부순 건 나중에 치료하면 돼!”
“남자 가슴 만지는 게 뭐가 좋다고…….”
“닥치고 내 말대로 해!! 주인님이 시키신 일이란 말이야!! 실패하는 날엔 그 너희들과 함께 순교하며 사죄하겠어!!”
“네년 신앙심에 우린 왜 끌어들이고 지랄이야!?”
아무래도 치료가 끝나는 데엔 상당히 오래 걸릴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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