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진정한 해후 2
* * *
“허억……?!”
석오태는 기겁하는 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자신을 납치한 외계인이 인간의 신체 한계를 실험하겠다며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아 놓곤, 어린애가 장난감 다루듯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꺾고 부수는 꿈이었다.
머리가 360˚ 돌아가고 갈비뼈가 부서지며 무언가 심장을 만져대는 감각이 놀랍도록 사실적이게 느껴졌다.
눈을 뜬 지금조차 그 감각이 남아 모골에 송연해질 정도였다.
아직 정신을 가다듬지 못한 석오태가 거친 호흡과 함께 턱 선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을 때였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순간 다양한 감정을 지닌 눈동자를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아홉 쌍의 눈동자.
가뜩이나 불길한 꿈을 꾸고 눈을 뜨자마자 그런 것을 한다는 건 별로 좋지 일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자신의 몸을 부수며 가지고 놀던 그 외계인들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으아아악!!”
기겁한 석오태는 앉은 자세로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치다 나무 하나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머리를 부여잡은 채 엎드리는 석오태의 모습을 본 시선의 주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대화를 나눴다.
“분명 살아 있지?”
“잘 움직이네.”
“소리도 잘 내고.”
“거봐요! 확실하게 고쳤죠?”
“와아. 최소 식물인간은 확정일 줄 알았는데, 이걸 고치네?”
“그래도 부러진 데 한 군데는 남겨놓지 그랬어.”
“아, 그것도 그렇네요. 지금이라도 부러뜨릴까요?”
뭘까, 이 불길한 대화는.
마치 석오태가 조금 전까지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걸 전제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
석오태가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주저앉아 있는 석오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는 건, 조금 전까지 그와 치열하게 싸우던 플레이어 신요현이었다.
“내놔.”
신요현은 다짜고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무, 무슨…….”
“멸신검 말이야.”
멸신검을 내놓으라는 말에 석오태가 기겁하며 반응했다.
“그, 그건 내 거야! 절대 못 줘!”
“이 자식, 썩어있는 쪽으로 근성 있는 거 보소. 이런 녀석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데 빼째라 식이라니 말이야.”
“우리도 별로 피 보고 싶진 않은데.”
신요현과 연성화의 말에 뒤편에 있던 캐릭터들이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주먹을 풀고, 팔을 휘젓는 레아와 스콜은 약과였다.
의식을 잃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레반, 레테라, 하티는 흉기라고 칭하기에도 너무 큰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하티의 시선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 어떤 건지 시연할 만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별개로 지그문트와 진혜가 별로 끼고 싶지 않다는 듯 조금 떨어진 채 지켜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석오태를 도와줄 것 같기도 않다.
“넌 지금 사냥개들 사이에 둘러싸인 거다.”
“이 녀석들은 우리의 ‘물어’ 명령만 기다리고 있어.”
“으, 으으……!”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 치려던 석오태였지만 등 뒤에 나무에 가로막힌 상태에서 달아날 구석이 있을 리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았지만 자신을 지켜줄 그레토와 파니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사망과 함께 본래 세계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지금 석오태는 철저히 혼자였다.
더 이상 그의 개차반 성격을 따라주거나 충직하게 지켜줄 캐릭터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건 비루한 몸뚱어리 하나였다.
전적으로 답 없는 상황이었지만 석오태는 몸이라도 보신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그 눈을 굴리는 모습이 훤히 보여 신요현이 경고하듯 읊조렸다.
“또 목 돌아가고 싶냐?”
“히, 히익……!!”
그 말을 듣는 순간 석오태의 온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머리는 기억 못하지만 몸이 기억이라도 하는 것처럼.
정말 목이 한 바퀴 돌아가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 알았어! 돌려줄게! 돌려주면 될 거 아냐!”
결국 그는 항복하고 말았다.
힘을 휘두르고 다닐 땐 몰랐는데, 힘이 없는 상태에서 핍박당한다는 건 정말이지 서러운 일이었다.
허나 이제 와서 그걸 깨달아봤자 그를 동정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은 상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정말로 그들 뒤편에 대기하는 캐릭터들이 인간을 뜯어먹는 맹수로 돌변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응……?’
그런데 거기서, 석오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가 잘못 됐음을 직감한 듯 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하나둘씩 맺히기 시작했다.
“어, 어어……. 저기…….”
“뭐야?”
석오태는 정말 꺼내기 어려운 얘기라는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시선을 불안정하게 흔들린 채 입을 열었다.
“이, 이벤토리가…… 안 열려.”
““………….””
그 말을 들은 신요현과 연성화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 서로의 뜻이 맞는다는 걸 알아 챈 두 사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이지만 마.”
“하여간, 고통을 체감해야 현실을 자각하는 놈들이 꼭 있어요.”
“아, 아냐!! 진짜야!! 진짜 인벤토리가 안 열린다고!! 잠깐! 나 버리지 마!!! 끄아아아아아아악!!!!!”
석오태가 두 사람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보다는 ‘물어’ 명령을 받은 사냥개들이 달려드는 게 더 빨랐다.
처절한 비명소리, 뼈와 살을 사람의 몸에서 분리하는 듯한 끔찍한 소음을 뒤로 한 채 신요현과 연성화는 적당한 나무로 다가가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는 두 사람의 입에서 피로가 섞인 한숨이 새어나왔다.
“피곤하다…….”
“그러게…….”
정말로 피곤한 하루였다.
서로와 재회한 게 바로 어제였는데, 그땐 정신적으로 힘들더니 오늘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대놓고 악의를 가지고 사람을 공격해대는 놈들과 싸웠으니 피로감이 몰려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은 우리 중 멸신검을 가져간 녀석은 없었던 거구만.”
“응. 2년 동안 뻘짓만 한 거야.”
“후회 하냐?”
“당연히 후회하지. 하지만 지금이 되어서야 진실을 알 수 있었던 거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뭘 할 수 있겠냐만…….”
말끝을 흐리는 연성화를 힐끗 바라 보던 신요현도 입을 다물며 상념에 잠겼다.
2년이다.
서로를 보지 못하는 그 긴 시간 동안에도 줄곧 이어진 갈등이었다.
시작은 겨우 게임 아이템 하나에서였다.
그러나 그 게임 하나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던 우리였기에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갈등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서로를 의심하고 다퉈온 사실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응?”
“어?”
동시에 사과의 말을 내뱉은 것에 당황하며 신요현과 연성화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서로 네가 왜 사과를 하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사과를 왜 해? 먼저 의심의 말을 꺼내서 갈등에 스타트를 끊은 건 나였잖아?”
“그건 문제가 안 되지. 난 네가 게임에 접속하기 전부터 의심을 시작했단 말이야.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지 못한 건 나였어.”
“아무리 그래도 근거도 없이 널 거짓말쟁이로 몰아간 건 심했지. 사과는 내가 해야 돼.”
“난 네가 날 이용해 먹었다고 욕하기까지 했잖아. 내가 사과하는 게 맞아.”
“그 정도로 상처 받거나 하진 않아. 누굴 쫌생이로 만들고 있어.”
“쫌생이 맞잖아. 레이드 도중에 실수로 뒤통수 맞췄다고 3일 동안 삐져 있던 쫌생이가.”
“뭐, 이 새꺄?”
“뭐, 이 새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도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팽팽히 당겨지는 긴장의 끈.
그 분위기를 감지한 캐릭터들도 일순 석오태를 멈추고 그들을 돌아볼 정도였다.
그리고 한계까지 당겨진 그것은 곧 터지고 말았다.
푸읍!
웃음이 터졌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른다.
신요현과 연성화는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나도 안 변했다, 우리.”
“그래. 여전히 마음속은 그 시절 그대로야.”
짓궂은 농담이라도 나눈 듯 험악했던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캐릭터들은 그런 기묘한 흐름에 어리둥절하다가 다시 석오태를 폭행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일격 일격이 치명적인 캐릭터들의 완력이지만 끊임없이 부어지는 힐이 석오태가 골로 가는 걸 강제로 붙잡고 있었다.
결국은 끊임없이 회복되는 몸과 석오태의 비명소리는 쉴 새 없이 울려퍼졌다.
그 소리를 무시한 채, 편안히 몸을 눕힌 신요현이 입을 열었다.
“뭐랄까……. 네 실제 모습은 오프라인 모임에서 처음 봤고, 바로 어제 그 사람이 너라는 것도 알았지만 말이야…….”
나무둥치에 누운 신요현이 나뭇가지 너머로 비추는 별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 돼서야 너와 진정한 의미의 해후를 나눈 거 같아.”
“진정한 해후라…….”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본 연성화도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마찬가지야.”
……훌쩍.
““……응?””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언제 온 건지 레아와 스콜이 각각 두 사람의 옆에 서 있었다.
“늬들은 왜 여기 있냐? 같이 저놈 패는 거 아니었어?”
“시끄러. 여기 보지 마. 저놈을 패든 여기에 있든 내 마음이야.”
“복수보다 더 중요한 이벤트를 놓칠 순 없었습니다.”
눈물을 감추려는 듯 시선을 피하는 레아와 스콜을 보며 신요현과 연성화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거 우리 탓이냐?’라고 묻는 신요현의 시선에 연성화는 ‘어쩌면?’이라고 말하는 눈짓으로 답했다.
“아무튼 우린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
“아니, 이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뭘 계속하라는 건데?”
신요현이 레아에게 따지듯이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레아도, 스콜도 아닌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야, 결국 2년 동안이나 서로를 향한 한 줌의 믿음을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영화로 치면 클라이맥스를 마무리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라고. 냉큼 화해의 키스라도 하지 그래?”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일은 순식간에 전개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동시에 떨어지는 주홍색 번개와 푸른 마력.
레아와 스콜이 언제 흐느끼고 있었냐는 듯 단숨에 전투모드로 들어가 내지른 일격이었다.
찰나의 간격을 두고 레반, 레테라, 하티 세 사람이 폭행을 멈추고 달려와 주인들을 지키듯 에워쌌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부어오른 석오태만이 쓰레기처럼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지그문트와 진혜도 각자의 무기를 거머쥔 채 대열에 합류했다.
본래 이 일과 관계없는 그들로선 이들이 누굴 패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제 사건도 다 해결되었으니 슬슬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러나 갑자기 등장한 인물을 보니 도저히 전투태세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캐릭터의 그런 반응을 강요할 정도로 그 한 사람이 가진 존재감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그리고 번개를 머금은 도끼와 마력의 검날에서 가볍게 몸을 빼낸 그는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듯 모여든 캐릭터들을 둘러보았다.
“오~! 캐릭터가 일곱 마리나 모였네? 단 두 마리로 나에게 덤비던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야. 안 그러냐, 신요현?”
“너…….”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말하는 그를 향해 신요현은 눈매를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갑자기 나타난 율은 일곱 명의 캐릭터와 두 명의 플레이어를 환영하듯 두 팔을 벌리고 환한 미소와 함께 도발했다.
“어디 그때처럼 도전해볼래? 돌발 이벤트, ‘GM 레이드’를 바로 여기서 열어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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