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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게임 캐릭터가 살아났다!-168화 (168/173)

〈 168화 〉 폭풍전야 ­ 1

* * *

레아, 레반, 레테라 세 사람의 신원 문제를 불곰파에 맡기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컴퓨터를 켜서 확인하는 건, 율이 스트리밍 사이트에 올린 이벤트 공지 영상이었다.

이미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휴대폰으로 끊임없이 반복 시청한 영상이지만, 혹여 뭔가 놓친 게 있을까봐 큰 화면으로 다시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영상 자체에 별 특별한 건 없었다.

다만 오서연의 재밍과 내부 폭로 시도가 진심이었다는 거고, 율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손바닥 위에 두듯 바라보다가 가장 재미있는 타이밍에 제지하였다는 확신만 얻었을 뿐이다.

“데리고 갈 수 있는 캐릭터는 한 명 뿐이라……. 무슨 의도가 깔린 건지도 모르겠네.”

율의 발언을 하나하나 복습하며 그의 의도를 파악해보려고 했지만 무의미했다.

이놈이 하는 말 대부분은 쓸데없는 잡소리일 뿐이었다.

가장 큰 단서는 오서연이 말한 ‘캐릭터의 강함과 상관없이 플레이어가 위험에 노출된다’, 이 발언 정도다.

“뭐지? 설마 플레이어의 목숨을 걸고 카드 게임이라도 시키는 건 아닐 테고…….”

[띠리리링.]

영상을 확인하고 있는 사이 휴대폰이 울린다.

알고 있는 번호와 이름이 화면에 뜬 걸 확인하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영상 봤어?]

“어. 그 녀석, 한동안 얌전했더니 다시 심심해졌나 보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리는 건 연성화의 목소리였다.

시작은 가볍게 율을 씹는 것으로 말문을 튼 우리의 대화는 본론으로 이어졌다.

[참가할 거야?]

“참가해야지. 전국에 흩어져 있는 플레이어들을 만날 몇 안 되는 기회니까. 정신 멀쩡한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지난 번 석오태 같은 놈이 있는지 찾아봐야 해.”

[내 생각도 같아. 율이 개최한 이 괴짜 이벤트에 어울릴 만한 사람이라면, 그 또한 만만찮은 괴짜일 테지만 말이야.]

그 이벤트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만난다고 해도 정상적인 사람을 만날 거라는 기대는 미리 접어두는 게 좋다는 듯 연성화는 말하였다.

확실히 나도 그런 인간을 만난 경험이 있긴 했다.

그 돼지 새끼가 부디 이 이벤트에도 나와 주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너 다른 플레이어도 알고 지낸다며? 그 사람들은 어때? 참가한데?]

“아니. 이전에 말한 헬스 트레이너는 이런 이벤트와 담 쌓았어. 그쪽은 그저 자기 캐릭터와 조용히 지내고 싶을 뿐이니까.”

진혜의 주인 안범석과는 이미 통화를 마친 뒤였다.

그는 이전 첫 번째 이벤트와 마찬가지로 이번 이벤트도 불참한다고 한다.

안범석은 낯선 누군가가 먼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최대한 싸움을 피하는 스타일이다.

만약 침범했을 때 그가 보이는 과민반응이 좀 문제일 뿐이지.

“영감님과 그의 캐릭터인 지그문트 쪽과도 연락해봤지만……. 그쪽은 안 되겠더라고.”

[왜? 거기도 참가하기 싫대?]

“반대야. 너무 의욕적이라서 참가를 권할 수 없는 거라고.”

홍련마을 인근에 살고 있는 박일봉은 나에게 큰 은혜를 느끼고 있다.

좀을 좀먹던 암을 깨끗이 날려 보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주저 없이 달려와 지원해줄 것이다.

실제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레반과 레테라의 요청에 응해 지그문트를 용병으로 보냈었다.

문제는 영감님에 나이였다.

암이 나았다고 한들 여전히 노쇠한 몸이었고, 지그문트도 박일봉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벤트에 나가게 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참가 안 한다고 뻥을 쳤어. 그러니 저쪽도 참가 안 한다고 하더라고.”

[좋은 판단이네.]

연성화도 내 판단을 긍정해주었다.

만약 이번에도 이전 이벤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젊은 자신들은 몰라도 늙은 박일봉에겐 상당히 힘겨웠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골치 아픈 이벤트네. 이벤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건 둘째 치고, 다수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는 메리트까지 날아가 버리잖아.]

“넌 누구로 데려갈지 정했어?”

[아직. 한 명만 데려갈 수 있다는 말에 갑자기 스콜과 하티가 싸우려고 해서 말리느라 고생했어.]

이쪽과 똑같은 일을 겪었나 보다.

이벤트 내용은 알 수 없고,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안심을 못하는 캐릭터들을 설득하며 그 중 하나를 고르는 것도 골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 연성화에게 말했다.

“그럼 일단 우리 집에 올래?”

[어?]

휴대폰 너머에서 당황한 듯한 음성이 울렸다.

***

신요현의 집으로 초대받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별 생각을 다 하게 된 연성화였지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자신들과 캐릭터들도 모아서 머리를 맞대며 의논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에 잡생각을 거둬내었다.

자신은 무슨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연성화는 일단 신요현과 약속을 잡았다.

“주인님~ 언제까지 고민하실 거예요? 정성들여 선물을 고른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러다 해 다 지겠어요. 그리고 바깥에선 주인님이 아니라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기다려봐. 남의 집에 초대받은 건 처음이라서 뭘 사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다고 빈손으로 가기에도 뭐하잖아.”

그렇게 약속 당일.

연성화는 신요현의 집을 찾기 전에 들린 어느 백화점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고민의 내용은 집들이 선물이었다.

최근 신요현과의 오해가 겨우 풀리며 화해하기도 했고, 그들이 있는 집이 새집이라고 하니 뭐라도 사서 방문하고 싶었다.

문제는 선물의 내용이었다.

수건이나 샴푸 등이 무난하다고 하지만, 연성화의 마음으론 그것에 부족함을 느꼈다.

과자…… 혹은 그 집에 힘쓰는 캐릭터들이 많으니 고기라도 사 갈까 고민한다.

떠오르는 건 여럿 있지만 그것 전부를 살 수는 없었다.

곧 있으면 졸업이라지만 아직 학생 신분인 그녀에게 그리 많은 돈이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한정된 자금이니 그만큼 선택을 신중이 할 수밖에 없다.

“넌 어느 게 좋겠어?”

의견을 물어보자 하티는 ‘우후후’라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신요현 씨에게 선물하려는 거죠? 그거라면 좋은 게 있죠.”

그녀가 고른 것은 백화점 진열대의 물건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품을 뒤적이며 꺼낸 사진 뭉치였다.

사진의 내용은 다양했다.

가볍게 하품하는 모습부터, 거울 앞에서 옷을 고르는데 집중하는 모습, 가벼운 옷차림으로 쇼파에 엎드려 잡지책을 읽는 모습 등등이었다.

문제는 그 사진 속 주인공이 바로 연성화 본인이라는 점이다.

“바로 고귀하디 고귀하신 주인님이 브로마이드 10장! 이거라면 신요현 씨도 감격하고 무릎을 꿇으며 저와 함께 주인님을 신봉하게 될……!!!”

빠악!!

더 이상의 개소리를 들어줄 수 없던 연성화는 하티의 머리를 후려치며 입을 다물게 했다.

언제 찍은 건지도 모르는 브로마이드는 그대로 압수당했고, 그 후 연성화는 하티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냥 내가 고를 테니까 넌 스콜 옆에 가 있어.”

“히잉…….”

노기가 섞인 단호한 축객령에 하티는 시무룩해진 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한쪽에 서 있는 각진 기둥에 등을 대고 서 있던 스콜은 다가오는 하티를 발견하고 말했다.

“너도 쫓겨났나 보군.”

“제 딴에는 진지하게 권해본 건데, 주인님에겐 영 성에 차지 않았나 봐요,”

“뭐, 같이 쫓겨난 신세로서 주인의 선물 고르는 모습이나 구경하자고.”

“똑같이 보지 마시죠. 적어도 제 선물은 당신보다 상식적이었어요.”

“집에서 몰래 촬영한 사진 보다 말인가?”

“집들이 선물을 물어보는데 여성용 속옷을 가리키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요.”

“최대한 실용적이라 생각하고 고른 건데……. 속옷은 누구나 입잖아?”

부족한 상식의 대가로 지금 스콜의 한쪽 뺨에는 연성화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픔을 전혀 느끼지 않는 스콜은 그저 느긋하게 물건을 고르는 연성화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주인이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다.”

“전 뭔가 좀 마음에 안 들어요.”

“왜지?”

“반대로 스콜 씨는 왜 태연한 거예요? 주인님이 남에게 저렇게 정성을 들이는 데 신경 쓰이지 않으세요?”

캐릭터들에겐 저마다 독점욕이라는 게 있다.

자식들이 형제를 제치고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것처럼, 그들 또한 플레이어들의 애정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신요현 네 삼 남매는 허구한 날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다.

스콜과 하티는 그들보다 낫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도 주인의 사랑을 받고 싶고, 그것을 독차지 하고픈 욕구가 있었다.

하지만 찜찜함을 느끼는 하티와 달리 스콜은 담담했다.

“넌 모를 거다. 신요현 님을 신뢰하는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그렇기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순간의 충격은 컸던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미련을 떼어놓지 못해서 이렇게 관계를 회복했지. 난 항상 주인의 감정을 느껴왔기에 알 수 있다.”

마치 네가 모르는 연성화의 모습을 난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 하티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난 지금이 좋다. 오히려 두 분이 더욱 친밀해지길 바랄 정도다.”

“정말요? 그럼 주인님과 신요현 씨가 사귀어도 아무렇지 않은 거예요?”

“그 두 분 사귄다라…….”

잠시 상상해보려는 듯 스콜은 눈을 감았다.

잠시 뒤,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견디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눌렀다.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이 날 것 같다.”

“딸 시집보내는 아버지인가요, 댁은?”

“시집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기정사실’이라고 하던가? 둘 사이에 아이라도 있다면 옛날처럼 극단적으로 싸우다 헤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이보세요, 마법사 씨. 당신 아까부터 발언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물론 나라고 주인이 아무 남자와 사귀는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신요현 님이니 믿을 수 있는 거지. 그가 아닌 웬 놈팽이가 주인에게 껄떡 댄다면 사지를 달라버린 뒤 개 먹이로 던져줬을 거다.”

“역시 당신은 물러요. 그럴 땐 꼬챙이로 꿰뚫은 뒤에 발끝부터 서서히 불태워버려야죠.”

심상치 않은 대화에 근처를 지나던 백화점 직원이 움찔했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티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매만지다가 말하였다.

“신요현 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역시 전 주인님의 몸에 남자가 손을 닿는 게 탐탁치 않아요. 주인님은 천년만년 깨끗하고 순결한 몸으로 살아가길 바란다구요.”

“주인이 노처녀로 생을 마감하길 바라는 거냐? 신을 향해야 할 신앙심을 인간인 주인에게 쏟아 붓지 마라.”

“뭘 모르시네요. 40넘은 노처녀는 요물이지만, 200살을 넘고도 파릇파릇한 젊음을 유지하는 처녀는 전설이라구요. 이거 엘프 전설에도 나오는 거예요.”

“19금 게임이잖아, 그거.”

현대 사회 지식 습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연성화가 하티에게 인터넷을 허락한 게 문제였다.

가끔 쓸데없는 지식을 학습하기도 한다.

“불가능한 게 아니에요. 제가 모든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신체를 관리한다면 최대 150년은 인생 전성기의 육체를 유지할 수 있어요.”

“주인이 인간을 그만두게 만들지 마라. 인간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만 누리고 가는 게 가장 좋은 거다.”

“그걸 정하는 게 누구죠? 일단 손에 쥐어준 뒤 그것의 활용도를 확인하는 건 주인님의 일이에요.”

“적당히 좀 안 할 거냐.”

자꾸 엄청난 짓을 저지르려는 하티에게 스콜은 살짝 짜증난 듯한 말투로 말하였다.

하지만 하티는 물러나지 않았다.

“신앙심이란 믿음의 힘이에요. 주인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설사 악마와 계약하는 일이라도 하고 말고요.”

“믿음은 과해지면 광기가 되는 걸 모르는가.”

“광기라고 부릴지언정 흔들림 없는 믿음이야 말로 저의 증명입니다.”

구오오오오오……!!

대화를 이어갈수록 보이지 않는 기운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서로 맞부딪쳤다.

허공에 언뜻 보였다 사라지는 푸른빛과 하얀빛.

마력과 신성의 부딪침이었다.

그 여파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왠지 모를 심란함을 느꼈고, 천장의 전등은 심하게 깜빡 거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서 있는 기둥엔 금까지 갔다.

부딪침은 더욱 강해지고, 서로를 노려보는 스콜과 하티가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적당히 좀 안 할래?”

까아앙!!!

물론 둘의 작은 소동은 어느새 다가온 건지 그들의 뒤통수를 후라이팬으로 후려치는 연성화에 의해 제지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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