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2화 (2/144)

#2화

난데없이 모르는 꼬마에게 팔목이 잡히기 전. 나는 파티장 구석에서 길버트에게 들은 정보를 되새기고 있었다.

파티 초대장을 보낸 사람은 다이아나 헨티슨. 이 저택의 주인인 헨티슨 남작의 둘째였다.

파티가 열리는 헨티슨 가문의 영지는 아멜리오 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다이아나 헨티슨의 파티 초대장이 아멜리오 백작가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 정도 거리면 티타임에 초대해도 나쁘지 않겠어.’

나중에 슬쩍 말을 꺼내 봐야지. 어떻게 하면 다이아나와 친해질 수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와아!”

갑작스레 앞쪽에서 큰 환호성이 터졌다. 고개를 돌리자 진귀한 묘기라도 보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들 사이로 갈색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아가씨가 열심히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이 파티의 주인공인 다이아나 헨티슨이라는 걸.

일반적인 아가씨들과 달리 활동적인 것을 좋아한다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특기가 칵테일 만드는 것이라는 말도 맞는 말인 것 같고.’

주위를 살피며 테이블에 놓인 예쁜 파란빛의 논 알코올 칵테일을 살짝 맛보았다. 칵테일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즐길 만큼 맛이 좋았다.

로레이나가 아직 성년이 아니라 도수 있는 것을 마시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한 게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이아나의 주위로 점차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러다 파티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못 하겠는데.’

나름 결심을 하고 나온 건데 이렇게 허무하게 기회를 날릴 수는 없지.

‘인파가 더 몰리기 전에 얼굴도장이라도 찍자.’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직 뚫을 만했다.

누군가가 갑자기 오른쪽 팔을 당기기 전까지는.

‘어라?’

팔을 당기는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내가 칵테일 잔을 놓치기에는 충분했다.

쨍그랑.

유리잔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지고 안에 담겨 있던 칵테일이 사방팔방 튀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꽤 시끄러운 소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다가 칵테일이 몸에 튄 듯 작게 투덜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곳에 온 목적이었던 다이아나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건만, 나는 다이아나를 향해 괜찮다며 웃어 주지 못했다.

다이아나의 얼굴이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어서는 아니었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내 팔을 붙잡은 채 나를 빤히 응시하는 남자아이 때문이었지.

“……너 뭐야?”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다짜고짜 팔을 잡힌 것도 모자라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다니.

가뜩이나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낭패였다. 괜히 파티장 구석에서 몸을 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고작 내 가슴께까지 오는 키를 가진 어린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긴장해서 실수한 모양이지. 나는 아이를 다그치는 대신 빨리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다이아나의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했으니 나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아이가 내 팔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기, 꼬마야?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팔 좀 놔줄래?”

“…….”

“혹시 내 팔을 꼭 잡고 있어야 하는 거라면 같이 저쪽으로 갈까?”

“…….”

“……너 이대로 아무 말도 안 할 생각이니?”

반복되는 질문에도 아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언뜻 화가 난 것 같이 보이기도 해서 누가 보면 내가 잘못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사과를 듣는 것을 포기하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생각보다 훨씬 예쁜 붉은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그 말에도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잔뜩 구기던 아이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젠.”

“응? 뭐라고?”

워낙 작은 목소리였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몸을 물렸다.

“젠이라고 말했잖아. 이미 말했는데 왜 또 물어?”

이 자식 말투 좀 봐라? 딱 봐도 내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데.

‘……참자.’

나는 이전 세계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만났던 여러 진상 손님을 떠올리며 조용히 마음을 다독였다.

저 멀리서 다이아나가 보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진즉에 이마에 꿀밤 한 대 때렸을 텐데…….

‘그러고 보니 다이아나는 어떻게 됐지?’

혹시 몰라 고개를 돌려 다시금 다이아나를 살폈다. 아까와 같은, 아니, 전보다 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조금 전 상황 때문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다이아나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친해질 기회도 없었는데 이 김에 착한 모습이라도 보여 주자. 혹시 알아? 흔한 소설에서처럼 나같이 착한 아가씨는 처음이라며 먼저 말을 걸어 줄지?

“젠이구나. 예쁜 이름이네.”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이때 나는 알지 못했다. 착한 척도 다 상대가 도와주어야 할 수 있는 법이라는 걸.

“그런 표정 처음 봐. 신기해.”

“…….”

“입가가 그렇게 씰룩거리기도 하네. 아, 볼이 시뻘게지기도 해? 나는 안 그런데.”

……이거 나 놀리는 거 맞지? 난데없이 상황에 수치스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이보다 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왜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태어나 처음 보는, 매우 낯선 것을 마주하기라도 한 눈빛.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와 비슷했다.

어찌나 집중해서 보는지 얼굴이 뚫어질 지경이었다. 눈꺼풀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살피는 시선에 나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착한 척이냐.’

이제 나는 이전 세계에서처럼 억지로 남의 비위를 맞춰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굳이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까 너무 놀라서 그런가. 좀 속이 안 좋은 거 같기도 하고.’

긴장감 때문인가. 나는 울렁거리는 가슴 부근을 꾹 누르며 내 팔을 잡고 있던 작은 손을 떼어 냈다.

여유롭게 내 얼굴을 살피던 젠이 표정을 바꾸며 다급하게 말을 걸었던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이름이 뭐야?”

잘게 떨리는 목소리.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 그것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대답해 주었던 것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간절한 얼굴 때문이었다.

“로레이나야. 로레이나 아멜리오.”

“로레이나…….”

젠은 내 이름이 달콤한 사탕이라도 되는 양 입안에서 여러 번 굴렸다.

얼핏 영어 단어를 암기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보여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뭐 대단한 이름이라고 저렇게 외운대. 그래 봤자 원작에 언급도 안 되는 엑스트라인데.

‘……그나저나 이렇게 혼자 있을 만한 나이가 아닌 것 같은데.’

젠은 많이 쳐 봐야 열 살,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어린애가 위험하게 혼자 다니다니.

‘보호자만 찾아 주고 갈까.’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모르니 그냥 가기에는 좀 찝찝하니까. 혹시 주변에 있을까 싶어 고개를 돌려 살펴보았다.

때마침 저 멀리서 다급히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이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뛰는 것을 보아하니 보호자가 맞는 모양이었다.

‘빨리 찾아서 다행이네.’

나는 꽤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웃으며 반겼다. 잠시 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게 될지도 모르고.

“안녕하십니까. 헨티슨 남작가의 제럴드입니다.”

흠잡을 곳 없는 예의 바른 인사였지만 나는 그에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제럴드 헨티슨. 이변이 없다면 미래에 헨티슨 남작이 될 남자.

‘……그리고 얼마 뒤 레오나드를 도와 반란을 일으키고 황궁에 들어갈 사람.’

원작 속 헨티슨 가문은 레오나드가 성체가 된 이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반란을 준비하며 훈련했다.

가주는 물론이었고 후계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다 참여했다고 했었지.

‘드래곤이 성체가 되는 시기는 100년이니, 300년이 지난 지금 레오나드는 성체가 되었겠지. 그렇다면 반란까지 얼마 안 남은 지금은 당연히 훈련하고 있었어야 해.’

이렇게 한가하게 동생이 여는 파티에 얼굴을 비출 게 아니라. 하지만 제럴드는 여유롭게 파티를 즐기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였다.

‘여기가 원작 속 헨티슨 가문이 아닌 거야.’

순간, 누군가가 목을 누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 넓은 제국 안에서 남자 주인공을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렇게 가까운 영지에 남자 주인공이 숨어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우연이잖아.’

현 황제의 눈을 피해 숨죽여 훈련하고 있을 텐데 그걸 내가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헨티슨이라는 성이 흔하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네.’

이곳이 나를 구원해 줄 곳이 아니라면, 더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가빠오기 시작한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죽기까지 얼마나 남았지?’

1년? 2년? 꽤 오래 생각했지만, 원래도 모르던 것이 갑자기 떠오를 리는 만무했다.

소설은 주인공도 아닌 엑스트라의 죽음까지 상세하게 알려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원작 도입부에 이종족들이 사라진 뒤라는 언급은 있지만, 정확한 시기는 나와 있지 않은 것처럼.

‘원작이 시작되는 시점이 이미 이종족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때라는 게 다였지.’

이유는 간단하다. 그 설정은 세상에 남은 유일무이한 이종족인 남자 주인공을 빛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그 말은 내가 당장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거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백작저를 나온 것이 이제야 후회되었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하다못해 길버트에게 알아봐달라고만 했다면 여기가 그 ‘헨티슨’ 가문이 아니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을 텐데.

다른 것 때문도 아니고 살해당해서 죽는다는 사실에, 자꾸만 숨이 막혔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셔서요.”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있는 내가 이상해 보였던지 제럴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이곳을 나갈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몸이 안 좋네요. 혹시 밖에 있는 제 시녀를 좀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몸이 안 좋다면 휴게실에서 좀 쉬시는 게…….”

“아니요. 아무래도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제럴드도 더는 권유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아니면 하얗게 질렸을 내 얼굴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던가.

“그렇군요. 그럼 시녀를 부르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곧 제럴드가 지나가는 사용인 하나를 붙잡고 메리를 데려오라 지시했다. 나는 그 옆에 서서 얌전히 메리를 기다렸다.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젠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으나 무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는 것이 맞겠다.

“불안해?”

나를 빤히 보던 젠이 물었다. 무심코 돌아간 고개에 작게 한숨이 나왔다.

상대가 어린애라는 점이 이렇게 무시하기 힘들 줄이야.

“아니야. 그냥 몸이 조금 안 좋아서 그래. 조금 쉬면…….”

“거짓말.”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온 말이었다. 매우 강한 확신이 느껴지는 대답에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불안해하고 있잖아, 지금.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얼굴은 잘 알아.”

“…….”

“……내가 유일하게 매일 보던 표정이니까.”

정곡을 찔렸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났을까. 젠이 내 앞으로 살짝 다가왔다.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뭘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수 있어.”

젠이 제법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저 손을 덥석 잡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나는 알잖아.’

저 애가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필요 없어.”

작게 속삭인 뒤 파티장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 메리에게 달려갔다.

중간에 나를 잡으려는 듯 젠의 손이 살짝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을 보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가씨!”

빠른 발걸음에 놀란 메리가 황급히 뛰어왔다. 그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세상에! 식은땀 흘리시는 것 좀 봐.”

“……응. 나 아파, 메리.”

너무 불안해. 이러다가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 예전에 누군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종족이 어느 순간부터 이 세상에서 빠르게 사라진 것이, 납치되어 실험체로 쓰여서 그런 것 아니냐고.

소문에 불과한 말이지만, 신의 축복을 탐내는 사람들은 많았으니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나도 그렇게 될지 몰라.’

사람들은 레오나드가 살아있다는 걸 모르니 이제 남은 이종족은 나 하나라고 생각할 테니까.

이렇게 사람 많은 파티장은 누가 납치되기에 딱 좋고.

그렇게 죽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 나는 난데없이 빙의한 게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늘 운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은 달라.’

주변에 사람도 많고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다. 이런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메리의 부축을 받으며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면 지난 2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영지 밖으로 최대한 나가지 말아야지.

‘혹시 기사들을 더 뽑을 수 있는지 길버트에게 좀 물어보고.’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디뎠다. 조금만 더 가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딱 한 걸음만.

“왜 아무 말도 못 하니?”

“…….”

“아까 유리잔이 깨진 이후에 어디서 뭘 했는지 묻잖아!”

별안간 들린 큰소리에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뒤를 돌자 웬 금발 머리 아가씨가 젠을 다그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파티 중에 저 아가씨의 목걸이가 사라진 것 같았다.

“왜 대답을 못 해?”

아까보다 커진 목소리에도 젠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개를 돌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그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와줘.’

젠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분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