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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3화 (3/144)

#3화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가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날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잔뜩 벌게진 얼굴을 한 사장이 내게 화를 내었다.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계산대가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보자 알았다. 무언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는 것쯤은.

아니나 다를까, 곧 금고에 남은 금액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 들려왔다.

왜 화살이 나에게로 날아왔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어제 가게 뒷정리를 했기 때문이겠지.

아니라고 말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말을 할수록 사장은 더 화를 냈고 주변 사람들의 이목은 점점 집중되었다.

무서웠다. 내 이마를 찌르는 저 손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하지만 누구에게도 도와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나에게는 늘 이런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여기서 사장이 내게 했던 것처럼 따귀를 날린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고작해야 내가 아르바이트에서 잘리는 것으로 끝이겠지.

그 당시 내 쓸모는 그 정도였다.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고 나면 끝인, 딱 그런 정도. 그래서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도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너 이름이 뭐야?”

“…….”

“대답 안 할 거야?”

아까 전보다 금발 머리 아가씨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럴수록 젠의 등은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 앞에서는 잘만 말했으면서.’

금발 머리 아가씨가 처음 물어본 질문은 ‘유리잔이 깨진 이후에 뭘 했느냐’였다.

그렇다면 목걸이가 없어진 건 그 이후라는 건데.

‘그럼 젠은 범인이 아니잖아.’

방금까지도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그사이 금발 머리 아가씨가 젠을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왜 말이 없어? 너 어느 가문 사람이니?”

“…….”

“계속 이렇게 대답 안 하면 모레트 후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모레트 후작가라.’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 볼 일 없는 가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크루시아>는 특이하게도 레오나드 1인칭 시점인 소설이라 아무리 중요한 가문이라도 레오나드와 관련이 없다면 나오지 않았으니까.

‘정말 모레트 후작가가 그 정도로 이름 있는 가문이라면야 어린 나이인 젠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옆에 있는 제럴드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자기와 같이 있었다고 한마디만 해 주면 될 텐데.

제럴드는 금발 머리 아가씨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쓸 뿐 젠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예 모르는 사이처럼 굴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더 이상한 건 젠도 그런 제럴드의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거다.

‘아까부터 다이아나도 이상하고 말이야.’

다이아나는 아까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동이 벌어진 곳을 보고 있었다.

혹시 아까도 내가 아닌 젠을 보고 있었던 거였나?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도 모른 척하고 젠이 조금만 눈에 띄어도 당황하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떠오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저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젠이 헨티슨 가의 사생아인가?’

카일룸 제국은 평생 단 한 명의 반려만 둔다는 드래곤의 나라답게 정부나 후처의 개념이 없었다.

황제도 일부일처제를 따르는 마당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어길 수 있을까.

물론 뒤로 딴짓을 하는 사람이야 있었겠지만 일단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야 했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생아가 있다는 게 알려지는 건 큰 수치였다.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과 몸을 섞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꼴이었으니.

‘원작 속 헨티슨 가문은 대대로 바른 생활만 해 왔다고 했었는데.’

후일이 두려웠으면 애초에 일을 저지르질 말았어야지.

일단 이 가문이 원작 속 헨티슨 가문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겠다.

“아가씨, 일이 더 커질 것 같은데 그냥 가시는 게 어때요? 몸도 안 좋다고 하셨잖아요.”

상황을 살피던 메리가 살짝 내 팔을 당기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정말로.

‘하지만 그렇게 안 되는 걸 어떡해.’

아무런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젠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이 꼭 나 같아서.

“그 목걸이가 어떤 목걸이인지 알아? 황태자 전하께서 내게 선물로 보내 주신 거란 말이야!”

“…….”

“며칠 뒤에 영지에 방문하시기로 했는데 어떻게 할 거야!”

황태자까지 거론되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거세졌다. 젠이 범인이라고 확정 지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그렇게 되겠지. 황태자까지 관련 있는 것 같으니 아마 쉽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안 되겠다.

“어? 아가씨 어디 가세요!”

뒤에서 메리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앞만 보고 걸어갔다. 제럴드가 나설 것 같지는 않으니 젠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딱 이거 한 번만 도와주고 가면 돼.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저 사람 중에 미래에 나를 죽일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젠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파르르 떨리고 있던 붉은 눈이 놀란 듯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 시선에 나는 살짝 웃어 주었다. 조금은 기분이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이제 괜찮아.”

작게 속삭이는 말을 들은 젠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젠은 꼭 울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나는 떨리는 두 손을 뒤로 숨긴 채 젠의 앞에 섰다. 어쩌면 예전의 나도 이런 상황을 바랐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 앞에 있어 주기를.

“모레트 영애의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누구…….”

갑자기 끼어든 나를 보던 금발 머리 아가씨가 말을 흐렸다.

놀란 듯 눈이 살짝 커지는 것을 보아하니 말을 건 상대가 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유명하다는 게 이런 점에서는 도움이 되네.’

표독스럽기까지 했던 얼굴이 꽤 부드러워졌다.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한들 신의 축복을 받은 이종족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멜리오 영애 아닌가요?”

“알아봐 주셔서 감사해요, 모레트 영애. 아멜리오 백작가의 로레이나예요.”

“……저는 레이첼이에요.”

아, 이름이 레이첼이었구나. 내가 끼어들자 레이첼은 마지못해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을 걸어온 상대를 두고 계속 젠에게 소리 지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내가 앞에 서 있어서 젠의 얼굴이 잘 안 보이기도 할 테고.

“그나저나 아까 한 말씀은 뭐죠? 제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다니…….”

“아, 그거 말인데요.”

슬쩍 옆으로 비켜선 뒤 가만히 있는 젠의 어깨를 끌어다가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온 젠이 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 아이, 제가 데려온 아이예요. 몸이 좋지 않아서 좀 쉬고 있었던 터라 상황 파악을 늦게 했네요. 좀 더 빨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 아멜리오 영애가요? 하지만 저 아이는 아무런 말도…….”

“아무래도 갑자기 이목이 쏠려서 긴장했던 모양이에요. 너무 어린 나이잖아요.”

나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쭉 훑어본 뒤 한마디 덧붙였다.

“이런 상황을 견디기에는.”

레이첼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어린아이를 몰아세운 점을 지적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모, 목걸이가 없어졌던 시간에 어디서 뭘 했는지 대답하지 않았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의심이 풀린 건 아니고요.”

“예, 그렇겠죠. 하지만 영애, 이 아이는 제가 유리잔을 깨뜨린 이후로 쭉 저와 같이 있었답니다. 목걸이를 훔칠 시간은 없었어요. 그렇죠, 헨티슨 영식?”

내 말에 옆에서 멍하니 서 있던 제럴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번에도 가만히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조용히 제럴드에게 눈짓했다.

‘내가 이만큼 도와줬으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던 제럴드가 빠르게 다가와 말을 맞추었다. 뭐, 솔직히 말해 말을 맞출 것도 없었다.

젠이 목걸이를 훔칠 시간이 없었다는 건 사실이었고 제럴드 역시 이를 알고 있었으니까.

“예, 그러고 보니 아까 아멜리오 영애 곁에 저 아이가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잘못 기억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소란스러워서 착각했을 수도 있…….”

“모레트 영애.”

레이첼이 초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어린애가 떼쓴다고 웃으면서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방금 영애가 한 말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

“아니면 제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거나.”

“……아니요.”

결국 레이첼이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차마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와 척을 지어서 좋을 것도 없고.’

사실 레이첼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젠이 훔친 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러니까 자꾸 젠의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점만 물고 늘어졌던 거겠지.’

지금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한 게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무려 황태자가 주었다는 목걸이를 자기 손으로 잃어버린 것보다는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것이 심적으로 더 편했을 테니까.

그 목걸이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있을지도 모르는 곳’은 알고 있지.’

“모레트 영애, 혹시 아까 휴게실에 가지 않았나요?”

묘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레이첼은 아까 유리잔이 깨졌을 때 내 옆으로 투덜거리며 지나갔던 사람 중 하나였다.

드레스에 칵테일이 튀었다고 생각했다면 분명 휴게실에 들러 살펴봤겠지. 그리고 누가 끊어 간 것이 아닌 이상 목걸이를 풀 만한 곳도 거기뿐이다.

내 말에 사용인들 몇 명이 휴게실로 달려갔고, 잠시 뒤 목걸이는 얌전히 레이첼의 손으로 돌아왔다.

레이첼을 위해 마련된 휴게실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고. 레이첼은 목걸이를 보더니 펑펑 눈물을 쏟아 내었다.

“정말 고마워요, 아멜리오 영애. 그리고 미안해요.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제가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긴장을 해서…….”

레이첼이 나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굳이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정중한, 참 바람직한 사과의 표본이었다.

……하지만 사과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지. 나는 나에게 사과를 하고 돌아서는 레이첼을 나직이 불러 세웠다.

“모레트 영애.”

“……네?”

“영애가 사과할 사람은 제가 아니죠.”

진짜 울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네가 왜 울어.

“잘못은 이 아이에게 했으니 어서 사과하세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 젠의 등을 살짝 앞으로 밀었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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