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기사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에 레오나드의 얼굴이 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안 된다고 했…….”
“저랑 이야기해요, 기사님들!”
레오나드가 본격적으로 신경질을 내기 전, 다급히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서둘러 레오나드를 다시 마차에 태웠다.
제럴드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지 급히 레오나드를 안으로 이끌었다.
“보는 눈이 많아요, 레오나드.”
“아멜리오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아직 즉위식도 하지 않은 시점에 굳이 이런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잠시 밖을 보던 레오나드가 거칠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그냥 이대로 가만히…….”
“가만히 있으면 너는 그대로 데프론 공작가에 갈 생각이잖아.”
아, 들켰네. 하여간 눈치 진짜 빠르다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지금 상황을 너무 많은 사람이 봐 버렸으니까.’
레오나드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카일룸 제국의 황제였던 ‘아이작 데프론’의 평판은 꽤 좋은 편이었다.
괜히 거절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좋지 않았다.
그게 지금처럼 사전에 약속도 잡지 않고 막무가내로 사람을 데려가려는 예의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간에 아이작이 기사들을 보내게 된 데는 이쪽 잘못도 있으니까.’
지금 가지 않으면 저쪽에서 편지가 분실된 일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지도 몰랐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어차피 혼담 문제도 해결해야 했으니 잘된 일이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레오나드도 알잖아요. 데프론 공작가에서 저를 부르는 게 혼담 때문이라는 것쯤은.”
“그것 때문에 더 그러는 거야. 공작이 왜 재정비 때문에 한창 바쁠 시기에 저렇게 기사들을 보냈다고 생각해?”
“…….”
“네가 이 시간에 여기를 지날 줄은 어떻게 알고.”
확실히 그 말을 들으니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감시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었던 건가.
‘그래도 안 갈 수는 없잖아.’
아이작이 정확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들어 봐야 하니까.
내가 에녹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아이작도 분명 알고 있었다. 예전에 황제의 이름으로 백작가에 보상도 보냈었으니까.
그러니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다녀올게요.”
“……로레이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뭐라 하려는 레오나드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인 뒤 마차 밖으로 나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화가 많이 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부탁을 안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레오나드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제럴드가 붙여 준 기사 몇 명과 함께 데프론 공작가의 기사들을 따라나섰다.
데프론 공작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방계에게도 작위를 넘기지 않아 꽤 오랜 기간 비어 있었다더니.’
데프론 공작가는 생각보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아멜리오 백작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웅장함에 놀라 주변을 구경하느라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는 아멜리오 백작 부부가 결혼할 때 황제에게 선물로 받은 거라고 하던데.
‘자기네들은 이런 휘황찬란한 곳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땅을 선물로 줬단 말이야?’
물론 데프론 공작가와 같은 곳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그 당시 황제가 백작 부부에게 뭔가 유감이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하긴 하프 드래곤도 황궁에서 쫓아낸 마당에 엘프가 귀하게 여겨지겠어?’
이것도 운 없는 내 팔자지, 뭐.
잠시 한탄하며 기사들을 따라가니 곧 응접실에 도착했고 곧 기사 중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아멜리오 영애를 모시고 왔습니다.”
“아, 들어오라고 해요.”
생각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응접실 문이 열렸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한 남자가 응접실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여유롭게 찻잔을 들이키는 모습이 눈에 또렷이 새겨졌다. 그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옅은 은색 머리카락에 살짝 쳐진 녹색 눈.
완전히 빼다 박은 것은 아니었지만 에녹의 아버지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리 와서 앉아요, 영애.”
아이작 데프론이 살짝 웃으며 손짓했다.
무슨 속셈인지 알아내겠다는 각오로 온 나는 그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설마 나한테 존대를 할 줄은 몰랐는데.’
물론 제럴드나 에녹 역시 나에게 존대를 하긴 했지만 아이작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데프론 공작의 목소리는 그것을 듣고 있는 내가 정말 고귀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신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
어쩌면 옅은 은색 머리카락 덕에 더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걸지도 몰랐다.
“이렇게 갑자기 불러서 미안합니다, 영애. 아이작 데프론이라고 해요.”
아이작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자기소개를 함과 동시에 사과를 건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에녹과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인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로레이나 아멜리오예요.”
내가 자리에 완전히 앉자 응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용인 하나 없이 아이작과 나만 남았다는 사실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괜찮을 것이었다.
‘내가 지금 데프론 공작가로 들어가는 것을 본 눈이 몇인데.’
그러니 이상한 행동은 못 하겠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제럴드가 붙여 준 기사들을 응접실 앞에 서 있도록 했으니 준비도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여차하면 비명이라도 지르면 된다. 차에 독을 탔다면 레오나드에게 치료받으면 그만이고.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나요?”
바로 본론부터 묻자 아이작의 얼굴이 서운하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슬픈 빛을 띠었다.
그러지 말라고 진짜. 에녹이랑 닮아서 기분 이상하단 말이야.
“사실, 얼마 전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불렀어요. 답장이 너무 없어서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건강한 걸 봐서 다행이에요.”
아아, 역시 편지 때문이었구나.
“걱정해 주셨다니 감사해요, 공작님. 답장을 드리지 못한 건 제가 혼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좀 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랬군요.”
금방 지어낸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인지 아이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답장은 진즉에 보낸 상태였지만 이미 분실된 상황에서 그건 아무 소용없었다.
황궁으로 온 편지가 분실된 셈이니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괜히 레오나드가 책잡힐 일만 만들어 주는 꼴이지.
그러니 그냥 내가 안 보냈다고 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영애, 그럼 지금은 결정을 내렸나요?”
“……네.”
내 말에 다소 기대에 찬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눈을 보면서 나는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저는 당분간 혼인할 생각이 없어요.”
“…….”
“죄송합니다.”
현재 나는 레오나드를 도와주기로 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에녹과 결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이작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인 인물이었다.
제국민들에게 평가 좋은 ‘전 황제’라니. 반란을 일으켜 황위를 차지한 레오나드가 진즉에 처리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잖아.
게다가 아무리 평판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들 그는 데프론이다.
300년 전, 레오나드를 황궁에서 내쫓은 그 핏줄. 그런 가문의 성을 달았다가는 원작대로 데드 엔딩을 맞을지 몰랐다.
‘그래. 결혼은 무슨. 지금은 데드 엔딩을 피하는 것만 신경 쓸 때야.’
후에 내 마음이 바뀐다고 해도 그건 에녹과 이야기할 일이지 이렇게 아이작과 마주하고 할 말은 아니었다.
아이작이 막무가내인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 이쯤이면 내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단념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황명이 아닌 이상 내가 그의 말을 따라줄 의무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었다.
“영애, 다시 한번 생각해 봐요. 아비인 내가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에녹은 정말 착한 아이입니다.”
“아.”
“그건 내가 보증할 수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이작이 아까보다 한층 커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작이 말하는 투가 꼭…….
‘나한테 실수를 만회할 기회라도 주겠다는 것 같잖아.’
내가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정도로 오만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내가 전후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이였다면 아이작이 여전히 황제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설마 아니겠지.’
그렇다고 보기에 아이작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에녹을 닮은 저 부드러운 웃음이 연기일 리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착각한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생각을 갈무리하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좋으신 분이라는 거.”
거의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붙어 있었는데 모를 리가.
에녹은 당시 황태자였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만큼 순수하고 상냥했던 사람이었다.
‘나에게 꽤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고.’
내 목숨만 챙기기에도 급급한 상태에서 에녹을 걱정하고 그를 구할 방법을 모색할 만큼.
하지만…….
“……그게 제가 지금 당장 결혼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결혼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공작님.”
내 부름에 아이작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성년이 다 되도록 연애도 안 하는 아들이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에녹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에녹의 마음이 어떤지 아시는지를 여쭙는 거예요.”
내가 아는 에녹이라면 이런 식의 전개를 원했을 리 없으니까.
아이작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에녹의 마음이 어떤지는 4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영애가 제일 잘 알 것 같은데요.”
아까와는 달리 원망하는 기색이 깃든 목소리였다.
그에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불안하고 외로웠던 시기에 에녹의 편지에 기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아이작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에녹이 내게 제법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계속해서 에녹의 편지를 반기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단절되기를 선택한 나를 바깥세상과 이어 주는 유일한 매개체.
에녹의 편지는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그것을 끊는 건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특히 에녹은 나에게 몇 없는 친구 중 하나였으니 그 소중함이 더 했다.
“영애, 그러지 말고 아직 작위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니 나중에 다시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요? 백작이 된 다음에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
“……죄송해요.”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기적이지만 나는 내가 있을 곳을 찾았다. 그러니 아이작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작이 곧 입을 열었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나온 예상 밖이었다.
“영애, 혹시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지금까지의 대화의 흐름과 전혀 상관없는 말에 잠시 갸우뚱했지만 바로 대답했다.
뭔가 연관이 있겠지.
“네, 에녹과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다정하다는 말이 많으시던걸요.”
“그렇군요.”
짧게 대답한 아이작이 소파 팔걸이 부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내가 왜 그런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지, 혹시 영애는 아나요?”
아이작이 또 의미 모를 질문을 던졌다.
이번 질문은 어딘가 께름칙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이 상황에 대답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일단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그야 공작님이 좋은 분이시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좋은 분이요?”
“네, 그러니까 그런 소문이 낫겠죠? 저, 그런데 실례지만 왜 이런 걸 물으시는지…….”
“하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작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탓에 그가 쥐고 있던 찻잔에서 차가 흘러나와 테이블을 적셨다.
그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아이작이 품속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었다.
그의 옅은 은색 머리카락만큼이나 하얀 손수건이었다.
그 손수건으로 테이블을 닦자 하얗던 손수건의 끝부분이 차로 물들어 갔다.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보고 있던 나는 다시금 입을 연 아이작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영애, 하얀 손수건에 묻은 얼룩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나요?”
“……깨끗이 빨면 되지 않을까요?”
그에 아이작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보다 조금 커진 소리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딘가 찝찝한 이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다.
“아니요,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진한 얼룩은 빼기가 힘들지요. 그보다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아이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과도를 집어 들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손수건을 찢었다.
종국에는 흰 부분만 남게 될 때까지 계속.
거친 움직임과 함께 얼룩진 부분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얼룩진 부분을 없애 버리면 됩니다. 손수건의 크기는 줄었지만 이제 얼룩은 없죠.”
손수건을 흔들어 보인 아이작이 과도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웃었다.
“어때요? 참으로 간단하지 않나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차로 얼룩진 조각을 보는데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처참하게 떨어져 아이작의 발에 짓밟히는 잘린 부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만 같아서.
살짝 몸을 떠는 나를 보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영애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아 알려주는 겁니다.”
아까와 다를 것 없는 미소였지만 나에게는 아이작이 더는 다정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이라도 에녹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이제 좀 생각이 바뀌었나요?”
아이작이 말을 뱉음과 동시에 응접실을 둘러싼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 것이 느껴졌다.
아이작 데프론은 지금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다음에 바닥에 떨어지는 건 내가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