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온몸으로 느껴지는 오싹함에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상냥하고 모난 구석 하나 없이 깨끗한 데프론 공작의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아이작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이들은 지금껏 가차 없이 제거되어왔던 것이 분명했다.
마치 바닥에 떨어진 저 얼룩진 손수건 조각처럼.
‘설마 데프론 공작이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 틀어박혀 있을 때도 아이작 데프론에 대한 소문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인정이 많으며 청렴한 이 시대 최고의 성군이라고 했지.’
에녹을 만나고 그가 얼마나 상냥한지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자연스럽게 아이작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내 오만이었다. 레오나드가 왜 지금까지 숨죽여 지냈는지 생각했어야 했는데.
“……공작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요.”
한참 뒤에 나온 말에 아이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역시 아멜리오 영애라면 내 말을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네, 당분간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럼 결혼식은 언제쯤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자세로 말을 하는 아이작의 모습에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으니까.
“공작님, 아무래도 제 말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아요.”
“네?”
“저는 공작님의 제안을 확실하게 거절한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거예요.”
“…….”
“저는 ‘당분간’이 아니라 ‘평생’ 데프론 공작가에 들어올 생각이 없습니다.”
누가 당신 말대로 결혼하겠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엿이나 먹어라.
“저, 이 결혼 안 합니다.”
꽤 공격적인 말에 인상을 찡그릴 줄 알았던 아이작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내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영애, 아무래도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예상했던 말이 튀어나왔고 나는 그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아이작이 그랬던 것처럼.
“아니에요, 공작님. 저는 제대로 이해했답니다.”
“…….”
“공작님께서 이렇게까지 제 안전에 대해 걱정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 제가 언제 수도에 도착하는지까지 다 파악하고 계셨던 거겠죠.”
아이작의 것과 달리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찻잔을 들었다. 이미 식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차 맛은 꽤 좋았다.
아까와 달리 살짝 일그러진 아이작의 얼굴 덕분인지도 몰랐다.
차에 독이라도 탔다면 이를 빌미로 아이작도 무너뜨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덕분에 확실하게 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에 있기로 마음을 굳혔어요.”
아무래도 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정도로 생각한 모양인데. 한참은 잘못 생각했다.
이전 세계에서 내가 들은 말이 얼마나 각양각색인데 이런 협박 따위에 덜컥 결혼할 리가.
“일반적인 사람들과 저의 시간이 다르다는 거, 공작님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저랑 결혼하면 에녹도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을 거예요.”
“시간이라…….”
아이작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걸 이제야 알았어?
“나중에 에녹 없이 저 혼자만 공작가에 남게 될 텐데. 그건 공작님께서도 원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그게 문제였던 거군요.”
선심 쓰듯이 한 말에 아이작이 살짝 미소 지었다.
뭐지, 또. 사람 불안하게.
“에녹이 먼저 죽을까 걱정하는 거라면 신경 쓰지 말아요. 영애에게는 아주 좋은 수가 하나 있잖아요.”
“무슨…….”
“이종족이라면 다 가지고 있다는 그 ‘계약’이요.”
……뭐라고?
너무 당당하게 하는 말에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잘못 들은 거겠지?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야?’
사실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 말고도 카일룸 제국에서 이종족이 이토록 대우받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이종족이 일생에 딱 한 번 정할 수 있다는 ‘평생의 반려’ 때문이었다.
“평생의 반려로 선택된 이는 수명이 반려와 같아진다고 하던데, 제 말이 맞나요?”
“……그렇죠.”
인간이 평생의 반려로 선택될 경우 그 인간은 반려인 이종족의 수명에 맞춰 훨씬 오래 살 수 있으니까.
연인이 일찍 죽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딱 로맨스 소설에 안성맞춤인 설정이지.
하지만 이런 로맨틱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종족이 평생의 반려를 선택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똑같이 적용되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한쪽이 죽게 될 경우 어쩔 수 없이 다른 한쪽도 따라 죽게 된다는 뜻이었다.
‘섣불리 쓰기에는 너무 위험 요소가 많지.’
그랬기에 나도 어지간하면 쓸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인간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모를까.
그만큼 이종족에게는 민감한 주제인데…….
“그럼 에녹을 평생의 반려로 삼으면 해결되는 일이 아닌가요?”
……내 앞에서 평생의 반려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그것도 내가 아니라 자기가 먼저?
“지금 공작님께서 어떤 말을 하고 계시는지 아시나요?”
“압니다.”
아이작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였다.
“그것을 정하는 과정은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나 가벼운 의식 한 번이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어차피 실체가 까발려진 판이니 그냥 막 나가자는 건가?
“어떤가요? 영애. 괜찮은 생각인 거 같은데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나한테는 손해밖에 없는 제안인데.
“……아무래도 공작님께서는 저를 미래의 공작부인으로 확정하고 계신 것 같네요.”
“영애만 한 사람이 없어서 말이에요. 에녹이 워낙 영애를 좋아하기도 하고.”
위선적인 말에 나는 순간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아이작이 제 아들인 에녹을 아낀다는 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혼담이 더는 에녹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되었을 뿐이지.’
아이작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말 그가 에녹을 위해 나와 혼담을 진행하려고 한 것이라면 에녹의 입장을 고려해 주었어야 했다.
불과 며칠 전에 나에게 산뜻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던 에녹이 나를 만날 때 고개를 숙이는 일은 만들지 말았어야 했단 말이다.
너무 화가 났다.
매번 나한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의 일상에 대해 정성스레 늘어놓던 편지가 생각나서.
“공작님께서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곧 가족이 될 건데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이죠.”
얼씨구. 벌써부터 확실하다는 듯이 말하네.
“……이번에는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잔뜩 추켜세워 주는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는지 아이작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영애. 어떤 말을 들을지 기대가 되는군요.”
생각보다 쉽게 떨어진 허락에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지금부터 내가 벌일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 용기는 필요했다.
후, 심호흡하자. 잘할 수 있어.
빈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고개를 드니 아이작이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또박또박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뭘 모르시는 것 같네요, 공작님.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답답해서 말씀드려요.”
“……예?”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도 평온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데 알 수 없는 짜릿함이 느껴졌다.
“제가 에녹을 평생의 반려로 정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나요?”
“…….”
“어떻게 하면 평생의 반려가 되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지 알긴 하세요?”
아이작은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나도 모르는 걸 당신이 어찌 알겠어.
“그것도 모르시면서 뭘 믿고 제가 에녹을 평생의 반려로 정할 것이라 확신하시는 거예요?”
“그야 영애가 말을…….”
“저는 그냥 말로만 했다고 하면 그만이에요.”
“……아멜리오 영애.”
“혹시 모르죠. 에녹이 죽고 나면 제가 공작가를 꿀꺽해 버릴지.”
“영애!”
아이작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소파 팔걸이를 잡고 있던 손은 어찌나 꽉 쥐었던지 잔뜩 붉어져 있었다.
그 위로 돋아난 핏줄은 곧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아까 나를 죽일 거라고 고상하게 협박했던 사람치고는 참 시시하게 본색을 드러냈지 않은가.
나는 최대한 친절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아, 이게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방법도 있어요.”
아이작이 이 혼담을 밀어붙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에녹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뻔하지, 뭐.
“결혼하고 나면 제가 데프론 공작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그대로 황제 폐하께 전해 드리는 거예요. 어떠세요?”
이종족인 레오나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일 경우.
정곡을 찔린 것인지 아이작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다가 한 대 칠 기세네.’
하지만 여기서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
나는 흥분해서 얼굴이 잔뜩 붉어진 아이작을 올려다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 설마 화나셨나요? 저는 너무 걱정된 나머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미리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무슨…….”
“아무래도 황궁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작님께서 뭘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아이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방긋 웃어 주었다. 최대한 밝게.
“공작님, 바깥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답니다?”
아까 아이작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그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타올랐다.
“영애!”
고함치는 아이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 왜 그런 협박을 하고 그래. 가뜩이나 언제 죽을지 몰라 하루하루 피가 말리는 사람한테.
다시 고개를 드는데 응접실의 커다란 창문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아, 맞다.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릴 뻔했네요.”
“…….”
“저는 아멜리오 영애가 아니에요.”
또 무슨 소리냐는 시선에 다시금 생긋 웃었다.
“아멜리오 백작이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황궁 탑에서는 내 머리카락 색과 같은 분홍빛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레오나드에게 했던 부탁 때문이었다.
‘작위 승계를 바로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내가 정식으로 아멜리오 백작이 되었을 경우 아무거나 좋으니 그에 관한 표시를 해달라고.
힘차게 휘날리는 분홍 깃발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분홍색 깃발이 뭐야.
“다시 한번 정식으로 말씀드릴게요, 데프론 공작님.”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나름 예의는 갖추어야지. 이미 망한 것 같긴 하지만.
“저, 로레이나 아멜리오는 아멜리오 백작가의 가주로서 이 혼담을 정중히 거절하는 바입니다.”
“이…….”
들끓는 소리를 낸 아이작이 급히 몸을 일으켰을 때 갑작스레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 혹시 목소리가 너무 컸나?
그것 때문에 밖에서 대기하는 기사들이 안에서 무슨 일이 났다고 오해했을 수도.
“저는 괜찮…….”
“……로레이나.”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전보다 다소 낮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에녹?”
내 부름에 급하게 뛰어온 듯 거칠게 숨을 내쉬던 입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예, 맞습니다.”
불안한 듯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오로지 나만을 담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