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나를 향해 웃어 준 에녹이 잠시 방 안을 훑었다.
무려 4년 만에 만나는 에녹은 하마터면 몰라볼 정도로 훌쩍 자라 있었다.
원래도 제법 넓은 편이었던 어깨는 보기 좋게 딱 벌어진 상태였고, 키 역시 내가 고개를 꺾어 올려다볼 정도로 컸다.
체감상 레오나드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응접실을 살피던, 4년의 세월에도 변함없이 맑은 녹색 눈동자가 한곳에 고정되었다.
아이작의 앞에 놓여 있는 과도와 발에 짓밟힌 손수건 조각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에녹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같이 나가요, 로레이나.”
“……네? 저 아직…….”
아직 대화가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거절의 의미로 손을 내젓자 에녹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 몸으로 여기에 더 있을 필요 없습니다.”
“저 완전 건강한데.”
“……자기 몸 좀 신경 써요.”
“…….”
“……제발.”
간곡한 어조에 의아해하던 찰나, 조심스레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그제야 깨달았다.
제법 당당했던 목소리와 달리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 무서워하고 있었구나.’
내가 말문을 잃은 것을 본 에녹이 그 상태로 나를 응접실 문 앞까지 이끌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작이 입을 뗐던 것은 에녹이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어디 가는 것이냐, 에녹.”
“…….”
“손님은 보내 드리고, 와서 앉아라.”
자신의 아버지의 부름에 에녹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에녹은 그대로 나를 데리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아버지.”
이 말 한마디만 남긴 채로.
* * *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저택 밖으로 나오자마자 에녹이 나를 붙잡고 물었다.
어찌나 꼼꼼히 살피는지 지켜보는 내가 다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괜찮아요. 그냥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떨었던 것뿐이에요.”
사실, 그 이유가 다는 아니긴 했지만. 그것까지 굳이 에녹에게 말할 필요는 없지.
“정말 괜찮은 겁니까?”
“물론이죠. 얼마나 괜찮은지 보여 드릴까요?”
내 팔을 붙잡은 에녹의 손을 잡아 내린 뒤 힘차게 몸을 움직였다.
조금 창피하긴 한데 저 일그러진 얼굴을 펴는데 이 정도 노력쯤이야.
예상대로 걱정스레 나를 살피던 에녹이 곧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처음에는 키득거리는 것 정도였던 웃음이 어느새 배를 부여잡을 정도까지 되었다.
밝아져서 다행이기는 한데.
‘이건 좀 심하지 않아?’
잠시 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낸 에녹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과했다.
그 얼굴 때문에 봐준 줄 알아.
“아, 미안해요. 예전 생각이 나서…….”
“예전 생각이요?”
“예, 전에도 이런 적 있었잖아요. 물론 그때는 입만 열심히 움직였지만.”
“아.”
에녹의 말에 4년 전 기억이 머릿속을 비집고 올라왔다.
그래, 그때도 에녹에게 괜찮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이런 식으로 행동했었지.
그 후로 벌써 4년이나 지났네.
“그러고 보니 인사가 너무 늦었네요.”
살짝 허리를 숙인 에녹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손과 제법 차이가 나는 큼지막한 손이 보였다.
날 보며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던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랜만입니다, 로레이나.”
“……오랜만이에요, 에녹.”
꽤 오랜 시간 입을 맞추고 있던 에녹이 다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유리 공예를 만지듯 섬세한 손길에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 세계의 인사를 받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원래 이런 느낌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연락 없이 저택을 떠나서 미안해요.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황궁으로 떠났다는 말은 길버트에게 들었거든요.”
에녹이 여전히 내 손을 그러쥔 채로 눈꺼풀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에녹의 입에서 나온 ‘황궁’이라는 말에 심장이 철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껏 자기 집이었던 곳을 언급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쩐지 서글픈 얼굴이라 쉽게 손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편지 보니까 쉬는 날도 없이 엄청 바빴던 것 같던데.”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하긴. 편지 보니까 외국 나갈 때 구경도 엄청 한 것 같더라고요.”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농담조로 던진 말에 에녹이 내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매주 보내는 편지에 정성스러운 답장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
“힘들 때마다 그 편지들을 꺼내 보았습니다. 그 순간의 심정이 어땠는지…….”
“……에녹.”
“당신은 아마 모를 겁니다.”
에녹이 말을 마친 순간 두 눈이 마주쳤다.
물기가 어린 녹색 눈동자를 본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4년 전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 에녹을 도운 일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난 세월 동안 구르고 굴러서 얼마나 큰 감정이 되어 돌아왔는지에 대해.
“……하하. 그냥 제 일상을 끄적인 것일 뿐인데 위로가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선명한 감정을 애써 모른 체하며 웃었다.
에녹의 마음을 꺼리는 것이 아니었다.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안 설렐 수가 있겠어.
문제는 내가 그 감정들을 받기에 마음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사랑도 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줄 수 있는 거라고.
그 말이 맞았다. 마치 날 보고 만들어 낸 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녹, 사실 제가 빨리 돌아가야 하거든요.”
“황궁으로 가는 겁니까?”
“네,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천천히 에녹의 손에서 손을 빼내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만나서 즐거웠어요, 다음에 봐요.”
설핏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렇게 나를 기다리는 마차를 향해 몇 걸음을 옮겼다.
마차가 꽤 가까워졌을 무렵. 별안간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놀라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따스한 온기가 내 손을 감쌌다.
“로레이나.”
아까 에녹이 잡았던 바로 그 손이었다.
“가지 말아요.”
뒤를 돌지 않아도 에녹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알 수 있었다.
분명 눈썹을 잔뜩 늘어뜨리고 있겠지. 목소리만 들어도 잔뜩 풀이 죽어 있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황궁에 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결국 다시 뒤를 도는 수밖에 없었다.
“에녹, 그건 나중에 설명…….”
“그렇다면 저도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에녹이 내 손을 더 세게 쥐며 제법 단호한 얼굴로 선언했다.
그것도 사방이 뻥 뚫려 있는 정문 앞길 한복판에서.
……잠깐만. 그건 다시 생각해 줄 수 없을까? 아니면 안전한 실내로 장소를 옮겨서 이야기한다던가.
이러다가 저번처럼 화살이라도 날아오면 어떻게 하냐고.
“……폐하께서 왜 당신을 황궁으로 부른 건지 알아야겠습니다.”
“…….”
“왜 갑자기 수도로 올라올 결심을 하게 된 건지도요.”
아, 역시 알고 있었구나. 하긴 그렇게 똑같은 핑계만 대는데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하지.
“혹시라도 당신이 잘못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걱정은 제가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거기까지만 말하고 뒷말은 은근슬쩍 삼켰다.
하지만 에녹은 이 정도만 들어도 알 것이다.
갑작스레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걱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4년 전이라면 저도 스스로 불쌍히 여겼을지 모르나…….”
“…….”
“지금은 아니니까요.”
에녹이 여전히 단호한 목소리로 짧게 덧붙였다.
왜 하필 또 4년 전이야. 그러니까 내가 또 뭔가 한 것 같잖아.
“그러니 제 걱정은 말고 제발 본인 몸만 생각해요.”
왜 다들 내 몸 가지고 난리지.
지금 나만큼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누군가 저 대신 희생하는 건 이제 보고 싶지 않다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희생이요? 제가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굴면 모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제가 뭘 모른다는 듯이 구는데요?”
“그만 하세요. 지금 황궁으로 가는 게 저 때문이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다고요.”
고개를 푹 숙이며 하는 말에 나는 멍한 얼굴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지, 이 상황. 분명 마주 보고 대화를 하고 있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 기분은.
……이거 완전 레오나드 때랑 똑같은 상황이잖아?
“잠깐만요, 에녹.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랑 레오나드 사이에 접점이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상황이라 이런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에녹은 아직 젠이 레오나드라는 것도 모르니까.
“제가 황궁에 가는 이유는 순전히 저 때문이에요.”
어쩐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에 에녹을 마차 앞으로 이끌었다.
뒤라도 막혀 있는 것이 사방이 뚫려 있는 것보다 그나마 좀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황궁에서 저를 필요로 해요.”
“…….”
“다른 사람으로는 안 되는 일이래요. 그래서 가는 거예요.”
“아…….”
내 말에 에녹이 작게 탄식했다. 이제야 조금 오해가 풀렸나?
“그럼 다른 사람이 억지로 시켜서 가는 게 아닙니까?”
“네.”
“당신이 원해서 가는 거예요?”
“그렇죠. 황궁에서도 저를 원하고요.”
내가 한 말의 내용을 확인하듯 되묻는 에녹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금방 이해해서 다행이다. 레오나드였다면 오해를 푸는 데 며칠은 걸렸겠지.
편지 하나 때문에 이틀을 고생했던 지난날을 떠올리자 아찔해졌다.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해야지.
‘그나저나 이제 진짜 가야 할 것 같은데.’
오해가 다 풀렸을 텐데도 에녹은 여전히 내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는 채로 뭔가를 생각하는 것이,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에녹은 잠시 뒤 나직이 입을 열었다.
“로레이나.”
“네.”
날 부르고도 잠시 뜸을 들이던 에녹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제가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녹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때는 저한테도 와 줄 겁니까?”
에녹이 떨고 있다는 것이 잡은 손을 통해 여실히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말에 적합한 대답을 찾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로레이나.”
재촉이라도 하는 듯 에녹이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에녹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애끓는 음성이었다.
그에 뭐라도 말하려 입을 뗐을 때, 별안간 뒤에 있는 마차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몸이 뒤로 당겨짐과 동시에 에녹에게 잡혀 있던 손이 쉽게 떨어져 나갔다.
“……그건 안 되겠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마차에 누군가가 반쯤 몸을 뺀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놓아 줄 생각이 없거든.”
뭔가 불만인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린 레오나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