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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31화 (31/144)

#31화

잠깐, 레오나드라고?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내가 타고 가려고 기사들에게 부탁해 불러 놓은 마차에 왜 타고 있냐는 말이야.

“레…….”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마차 밖으로 나온 레오나드가 내 무릎 뒤에 팔을 넣어 나를 안아올렸다.

재빠르면서도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어느새 몸이 공중에 번쩍 들렸고 나는 그대로 마차에 태워졌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대응할 시간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건 레오나드가 마차 문을 닫고 난 후였다.

“출발해.”

레오나드가 짧고 간결하게 마부에게 명령했다. 곧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도대체.’

그냥 이렇게 간다고? 진짜로?

“……에녹!”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재빨리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에녹이 나와 마찬가지로 멍한 얼굴을 한 채로 마차가 있던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꽤 멀어지기는 했지만, 목소리 정도야 들리겠지.

“이렇게 가서 미안해요! 다음에 만나요!”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에녹 역시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나마 인사라도 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또 다른 오해를 낳을 뻔했네. 방금 상황은 진짜 납치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여기 온 이유가 뭐예요? 제가 금방 다녀오겠다고 했잖아요. 눈에 띄면 어쩌려고요.”

다시 제자리에 앉으며 묻자 레오나드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구겼다.

지금 화낼 사람이 누군데 그래?

“불안하니까 그렇지.”

“그래서 기사님들도 데려간 거잖아요.”

“그래도 불안해.”

“……믿고 보내 준 거 아니었어요? 그리고 지금 한창 바쁠 시기잖아요.”

“……잠깐 제럴드한테 맡기고 왔으니까 괜찮아.”

그걸 다 맡기고 왔다고? 제럴드가 오열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불쌍한 제럴드. 나까지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황궁에 가만히 있기에는 데프론 공작이 심상치 않았어. 기억은 안 나지만 제럴드한테 보고받은 자료에 내가 공작을 보고 찝찝하다고 말했다는 게 적혀 있었다고.”

“…….”

“이런 부분에 있어서 내 감은 대부분 맞는 편이고.”

그래, 그 감은 확실히 맞는 편인 것 같다. 방금 내가 그걸 몸소 체험하고 나온 길이거든.

“그래요. 왜 나왔는지 알겠어요. 마냥 착한 사람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무슨 일 있었어?”

레오나드가 눈을 사납게 빛내며 물었다.

……아니, 일단 이 이야기는 길어질 것 같으니까 나중에 하고.

“그렇다고 에녹까지 불안해할 건 없잖아요. 반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어떤 성격인지 뻔히 알았을 텐데.”

“…….”

“적어도 마차 문은 열고 나오지 말지.”

조용히 덧붙인 말에 레오나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는 거야.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왜요?”

“혹여나 네가 안 돌아올까 봐.”

맞은편에 앉아 평소처럼 내 눈을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레오나드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불안했다는 것이 사실인 듯 낮게 깔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문 닫아요, 레오나드.”

“…….”

“추워요.”

그 말에 레오나드가 뭐라 투덜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전에 분명 말하지 않았는가. 추운 건 딱 질색이라고.

이 날씨에 문을 열어 놓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힐끗 맞은편을 보자 레오나드가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이 보였다.

……좀 심했나.

“레오나드.”

“…….”

“나랑 말 안 할 거예요?”

마지막 물음에도 레오나드는 대답이 없었다.

진짜 삐졌나 보네.

“아, 큰일이네.”

“…….”

“레오나드가 말 안 해 주면 저는 앞으로 엄청 심심할 텐데.”

“……아까 에녹 데프론에게 다시 만나자고 그러던데, 뭘. 심심할 새도 없겠는데.”

뾰로통한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이럴 때 보면 예전 모습 생각난다니까.

“에이, 그래도 심심할 것 같은데요.”

심심할 새가 없기는. 내가 가기는 어딜 가.

“레오나드 옆에 붙어 있으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그 말에 아무리 불러도 내 쪽을 보지 않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렸다.

“아…….”

조용히 탄식하던 레오나드가 별안간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미처 가리지 못한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무리 들어도 믿기 어려운 말에 레오나드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결과는 똑같았다.

로레이나는 여전히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미소를 띤 채로.

그 미소가 향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기꺼워서 레오나드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그럼 아까 에녹이 한 말은…….”

“엄청 급한 일이라고 하면 도와주어야겠지만 그래도 레오나드가 먼저죠. 당연한 일을 왜 물어보는 거예요? 이미 꽤 많이 말했잖아요.”

“…….”

“레오나드를 따라가겠다고.”

로레이나가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정말 내 옆에 있어 주겠다고?’

에녹의 말을 듣고 나서도?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레오나드는 재빠르게 뒷말을 목 뒤로 삼켰다.

늘 자신을 갉아먹던 감정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로레이나를 생각하면 레오나드는 하루에도 몇천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자신을 알긴 하는 건지, 로레이나가 장난스레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저 데프론 공작가로 못 돌아가요. 아마 들으면 놀랄 텐데. 제가 공작가에서 엄청난 사고를 쳤거든요.”

로레이나가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그에 레오나드는 방금까지 투덜거리던 것도 잊고 멍하니 로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로레이나의 이야기는 언제든 레오나드를 집중하게끔 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무슨 사고를 쳤는지는 너무 길어서 못 말해 주겠고. 음, 어찌 되었든 간에 제가 그렇게 행동한 데는 레오나드의 영향도 있거든요.”

저 입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좋았다.

가끔은 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로레이나가 부르는 이름이 이 세상에 오직 자신뿐이었으면 하는.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책임져 주어야 해요? 저도 헨티슨 공작님처럼 레오나드의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던 로레이나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알겠죠? 노후 보장까지 확실히 해 줘야 해요.”

“……그래.”

“진짜요? 약속한 거예요?”

로레이나가 활짝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 그에 레오나드는 자연스레 웃음을 내뱉었다.

저런 얼굴을 볼 수 있는데 뭘 못 해 줄까.

“지금은 종이가 없으니까 일단 여기다 손가락 걸어요.”

“손가락?”

“네, 혹시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이렇게라도 하면 기억에 남겠죠.”

레오나드는 자신의 앞에 내민 곱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예쁘게 접히는 푸른 눈을 한 번, 살짝 올라간 입술을 한 번 훑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빨리요.”

로레이나의 재촉에 레오나드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이건 진짜 잊어버리면 안 돼요?”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레오나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로레이나가 결혼한다고 생각해 황궁을 뛰쳐나갔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간질간질하고 애달픈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랑’이었다.

* * *

에녹은 로레이나가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정문에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당황했으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레이나는 괜찮을 거야.’

그에 에녹은 몸을 돌려 다시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응접실 앞에 도착한 에녹은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커다란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에녹입니다.”

이름을 대자마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작이 아까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 앉아라.”

평소와 달리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에녹은 아무런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는 것을 본 아이작이 앞으로 몸을 빼며 입을 열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매우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아멜리오 영애, 아니 이제는 백작이라고 했지.”

“…….”

“아멜리오 백작과 결혼하거라, 에녹.”

“……하.”

에녹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황제를 따라 떠났다던 로레이나가 왜 데프론 공작가에 있었는지.

“왜 그러느냐? 네가 늘 원하던 것이 아니냐. 지난 4년간 주고받은 편지만 봐도 알 수 있어.”

“……제 물건에 손을 대셨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이작이 잠시 멈칫하다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쉴 때마다 그것들만 들여다본다는데 아비가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

에녹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에녹이 허락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랑스러운 아들의 입에서는 긍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

“단, 로레이나가 원한다면 말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대답에 아이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말을 뱉은 당사자인 에녹의 얼굴은 평온했다.

“너, 아멜리오 백작을 마음에 둔 것이 아니었어?”

“맞습니다.”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색은 같지만 아이작의 것과는 다른, 싱그러운 빛을 띤 녹색 눈이 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입니다.”

“…….”

“아버지가 보신 그 편지 몇 장에 하루를 버틸 수 있을 만큼.”

생각보다 깊이 있는 말에 아이작이 잠시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외모가 꽤 반반했기에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 그러니까 내가 그 백작과 너를 맺어 준다고 하지 않느냐. 너는 그냥 얌전히 있다가 결혼식에만 들어가면…….”

“그걸 왜 아버지가 결정하십니까?”

“……뭐?”

“아무리 데프론 공작가의 현 가주가 아버지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나서시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다 아멜리오 백작과 네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로레이나와 제가 잘되기를 바라신다고요.”

에녹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번 자신을 찾아오면 차 한 잔은 꼭 마시고 갔던 보통 때와는 상당히 다른 행동이었다.

“왜 그러느냐. 아멜리오 백작과 이어 주고 싶다는 게 무슨…….”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후작 영애와 이어 주기 위해 애쓰시던 분이요?”

날카로운 말투에 아이작이 입을 다물었다.

순진한 아들의 모습만 봐 왔던 아이작에게 에녹이 하는 말은 하나하나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늘 방긋방긋 웃어 주던 제 아들이 아닌가.

‘이럴 리가 없는데.’

제 아들이, 에녹 데프론이 이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때의 방황으로 치부하기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아이작이 덜덜 떨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에녹이 변하기 시작한 시점이 있었다.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에서 돌아온 4년 전.

“……너, 설마 그 정도로 진심인 거냐? 단순히 얼굴이 반반해서 좋아한 것이 아니었어?”

이해할 수 없다는 아이작의 표정에 에녹의 얼굴이 슬픈 듯 일그러졌다.

아이작은 제 아들의 눈에 서린 감정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명백한 ‘실망감’이었다.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알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좋은 시간 되세요.”

에녹이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려왔다.

쿵.

아이작은 넋이 나간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크고 육중한 문이 꼭 제 아들의 마음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원인이 로레이나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아이작이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망할 반쪽짜리 계집…….”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당돌하게 말을 내뱉던 로레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건방지게 제게 충고하던 것도.

그에 아이작은 다시 한번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아이작이 몸을 부르르 떨며 다짐했다. 응접실에서는 꽤 오랫동안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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