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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34화 (34/144)

#34화

엄청난 폭탄을 남긴 채로 에녹은 유유히 곁을 떠나갔다.

손에 쥐고 있는 크루시아 잎사귀만 아니었더라면 꿈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변함없는 사랑이라…….”

조용히 읊조리며 잎사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냥 버리면 마음이 편할 텐데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걸 버리면 정말 나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어쩌면 태어나 처음 받는 애정이라고 아쉬웠던 걸지도 모르지.

진짜 구제 불능이다.

“……어떻게 레오나드를 도와줄 건지나 생각하자.”

회의장 안의 사람들이 모두 흐릿한 달걀처럼 보일 레오나드를 위해.

정 방법이 없으면 종이에 쓰는 수밖에 없지.

일단 회의장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레오나드에게 가서 물어…….

“무슨 생각해?”

“아, 깜짝이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느새 내 눈앞에는 레오나드가 서 있었다.

도대체 언제 온 거지?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에요?”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아서 말이야.”

레오나드가 중얼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살짝 허리를 숙인 레오나드의 시선이 내가 쓰고 있는 모자 쪽으로 향했다.

“……옆에서 보좌해야 할 비서관이 없으니 일이 잘될 턱이 있나.”

레오나드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움찔 몸이 떨렸다.

레오나드의 손이 닿은 곳은 내 턱이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턱을 지나친 손이 내가 쓴 모자의 리본 부분에 닿았다.

레오나드의 작은 손짓에, 묶여 있던 리본이 힘없이 풀어졌다.

리본이 스르르 풀어져 내 턱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더없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내 목에 묶인 리본이 풀리는 것을 보며 레오나드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 내가 잡으러 오는 수밖에.”

나를 담고 있던 붉은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옛날부터 생각한 건데 일부러 저렇게 웃는 것 같단 말이야.

‘내가 눈이 예쁘다고 했던 거 기억하고 저러는 거지?’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네, 진짜.

“귀족들 얼굴 외우느라 어쩔 수 없었어요. 도서관에 있는 그 많은 자료를 다 들고 옮길 수는 없잖아요.”

“미리 말해 줬으면 다 옮겨 줬을 텐데.”

“됐거든요. 그걸 언제 다 옮기고 있어요. 시간 아깝게.”

어쩐지 긴장이 되는 기분에 고개를 돌리며 침을 꿀꺽 삼키는데, 순간 머리 위가 휑해졌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내 모자는 레오나드의 손에 들려진 뒤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모자를 쳐다보던 레오나드는 그것을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높이 올렸다.

“이건 압수.”

“네? 왜요?”

“모자 쓰는 거 마음에 안 들어.”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린 채 뇌까렸다.

……뭐지? 저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심지어 성의도 없어.

“이유가 너무 부실한데요? 고작 그런 이유로 제 모자를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거 메리가 만들어 준 모자란 말이다. 귀중한 거니까 당장 내놓으라고.

레오나드를 따라 눈을 가늘게 뜨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표출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여전히 모자를 든 채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뭐야. 왜 저렇게 뚫어져라 보고 그러…….

“……소원이야.”

레오나드가 한숨처럼 나직이 말을 뱉었다.

고작 모자 하나 때문에 소원권을 쓰냐는 말을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진지하게.

어이없었지만 이게 소원이라면야 어쩔 수 없지, 뭐.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한 건 다름 아닌 나였고.

“좋아요. 모자 안 쓸게요. 대신 대안 좀 마련해 주세요.”

“대안?”

“네, 사실 저 아까부터 추워서 죽을 것 같거든요?”

목부터 머리끝까지 오싹한 느낌에 몸을 덜덜 떨었다.

게다가 목을 감싸던 모자가 사라져서 그런지 옷 안으로도 바람이 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저 추운 게 딱 질색이란 말이에요. 지금 머리랑 귀가 너무 시리다고요.”

“아…….”

모자와 내 머리를 번갈아 보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탄식했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뭐라도 달라고.

“많이 시려?”

두 손을 비벼 열을 낸 레오나드가 그대로 내 귀를 감쌌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말하면 모자를 돌려줄 텐데. 진짜 내가 저 모자를 쓰는 게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잠시 그 상태로 나를 빤히 보던 레오나드가 손을 떼더니 별안간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머리랑 귀가 시리다며.”

뭐가 문제냐고 대꾸한 레오나드가 벗은 겉옷을 든 채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전에도 느꼈지만 레오나드의 몸은 생각보다 컸다. 내가 들어가고도 한참 남을 것 같은 품이었다.

어쩐지 침을 삼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숨을 참는 사이 머리 위로 뭔가 무거운 것이 얹혔다.

레오나드가 입고 있던 바로 그 겉옷이었다.

“머리랑 귀가 시리면 안 되지. 그러다가 감기 들어.”

“신의 축복 때문에 저는 그런 거 안 걸리거든요.”

“걸릴 가능성이 낮은 거지 아예 안 걸리는 건 아니잖아.”

겉옷을 내 머리에 씌운 레오나드가 바람이 들어가는 빈 부분이 없도록 꼼꼼하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감기 걸린 거는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도 없어.”

“…….”

“뭐, 원한다면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레오나드의 시선이 입술 쪽으로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바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진짜 할 말 없게 만드네.’

저런 말 하면 민망하지도 않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내 모습에 작게 웃던 레오나드가 겉옷의 팔 부분을 끌어다가 내 턱 아래에 묶었다.

그리고는 머리 윗부분과 귀가 완벽하게 가려진 내 모습을 만족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뿌듯한 듯 레오나드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에 나는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다.

“레, 레오나드.”

“응, 왜?”

“머리가 너무 무거워요오…….”

저절로 뒤로 쏠리는 머리에 순간 균형을 잃을 뻔한 나는 다급하게 레오나드의 팔을 붙잡았다.

털이 잔뜩 달린 옷을 머리부터 두른 채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던 레오나드가 아까보다 다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지금 이게 웃겨요? 대안을 내놓으라고 했더니 이런 꼴 만들어 놓고 웃냐고요! 이럴 거면 소원 안 쓴 것으로 하고 모자 다시 내놔요!”

“아니, 그게 아니라…….”

웃음을 참기 위해 애쓰던 레오나드가 결국 포기하고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웃는 거 아니야?

“이제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로레이나, 삐졌어?”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거든요? 아, 됐어요. 말 안 할 거니까.”

미간을 찌푸린 채 레오나드의 팔을 놓은 나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다가 뒤로 자빠졌다.

물론 뒤에서 레오나드가 잘 받아 주는 바람에 바닥에 넘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아, 자존심 상해.

“혼자 가면 넘어져. 같이 가.”

“보기만 해도 웃긴 사람이랑 굳이 같이 가줄 필요 없어요. 기어서라도 혼자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웃겨서 그런 거 아니야. 귀여워서 그런 거지.”

“……뭐라고요?”

방금 뭔가 엄청난 말을 한 거 같은데. 제대로 다시 들으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답답한 상황에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옷이 이렇게 무거워?’

물론 가벼울 것이라고는 생각 안 했다.

각종 장신구에 털이 이곳저곳 덧대어져 있는데 가벼우면 오히려 이상하지.

‘그래도 머리에 올리는 것은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나한테 겉옷을 들고 오던 레오나드가 너무나 쉽게 들었었으니까.

하지만 한 손으로도 거뜬히 들었던 레오나드와 달리 내 힘없는 목은 좀처럼 머리통을 똑바로 유지하지 못했다.

‘남자 주인공은 뭔가 다르다 이건가.’

어쩐지 분한 마음에 괜히 레오나드를 노려보자 그제야 그가 웃던 것을 멈추고 나를 살피며 물었다.

“그렇게 무거워?”

“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입고 다니는 건가 싶을 정도예요. 저 이렇게 해 놓으니까 좋아요?”

“응.”

“……아닐걸요? 무려 소원권인데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괜찮아. 딱 좋으니까.”

레오나드가 천천히 내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하게 했다. 마주한 얼굴은 여전히 옅은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말했잖아. 귀엽다고.”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눈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흥,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아부 떨기는.’

또 저런다, 또. 이 정도면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해도 할 말 없는 수준이라고.

속으로 욕을 하던 것은 레오나드가 내 몸을 잡은 손을 떼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멈추었다.

그 잠깐 중에도 몸이 뒤로 쏠려서 식겁했다.

“떼지 말아요. 나 진짜 넘어간다고요.”

“그래도…….”

“만약 나 뒤로 넘어져서 뒤통수 박으면 가만 안 둘 거예요.”

겁에 질린 채 레오나드에게 뇌까리며 그의 팔을 꽉 잡았다.

레오나드는 자신의 팔을 놓아 주지 않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들오들 떠는 내 손을 보던 레오나드의 입에서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

“일주일 동안 말 안 할 거예요.”

“…….”

“밥도 혼자 먹어요.”

그제야 덩달아 심각해진 레오나드가 나를 붙잡아 주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그럼 이대로 가는 것으로 하자. 네 말대로 걷다가 뒤통수 박으면 안 되니까.”

레오나드가 나에게 붙잡힌 자신의 팔을 천천히 당겼다.

혹시라도 팔을 놓칠세라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나는 얌전히 레오나드를 따라갔다.

레오나드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불편함에 그냥 겉옷을 벗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추운 것을 질색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겉옷을 머리에서 떼어 냈을 때의 몰골이었다.

이리저리 흔들려 산발일 머리를 생각하니 그냥 얌전히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 롱패딩 입고 싶다.

“천천히 움직…….”

“아가씨!”

조금 빨라진 속도에 당황해 입을 연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머리를 움직여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자, 메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메리의 손에는…….

“메리! 그거 모자야?”

“네? 네!”

털모자를 든 채로 서 있던 메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예쁘다지만, 아가씨가 쓰고 가신 모자가 너무 얇은 것 같아서요. 신경이 쓰여서 따뜻한 것으로 가지고 왔어요. 장갑도 같이요.”

“잘했어, 메리! 그거 나 가져다줘! 안 그래도 필요했거든.”

아, 어쩜. 이렇게 필요한 순간에 딱 등장해 줄까.

역시 내 마음을 제일 잘 알아주는 건 메리라니까. 6년 동안 내내 붙어 다닌 보람이 있었다.

빠르게 손짓하자 내 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던 메리가 잠시 내 뒤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레오나드가 있는 쪽이었다.

‘아, 혹시 레오나드가 있어서 가까이 오기 부담스러운 걸까?’

그럼 내가 조금 앞으로 가 줘야지.

비어 있는 한쪽 손을 들어 레오나드의 겉옷을 벗으려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메리가 쥐고 있던 모자를 연처럼 바람에 슬쩍 날려 보내는 장면을.

‘아니, 이게 무슨…….’

하늘에 붕 뜬 모자를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메리가 뒤늦게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조차 매우 어색한 말투였다.

“앗, 아가씨. 죄송해요. 손에 힘이 없어서 모자가 날아가 버렸어요.”

……손에 힘이 없다고? 그럼 반대쪽 손에 멀쩡하게 들린 장갑은 뭔데?

“감기 걸리시겠다. 제가 먼저 가서 방 좀 데워 놓고 있을게요. 천천히 오세요!”

“메, 메리?”

막힘없이 말을 쏟아 낸 메리가 붙잡을 새도 없이 뒤를 돌아 뛰어갔다.

어찌나 빠른지, 잠깐 옷을 추스르고 고개를 드니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뒤였다.

애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텅 빈 곳을 보던 레오나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주 좋은 시녀를 뒀네.”

레오나드가 ‘아주’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얼굴도 모르는 메리를 칭찬했다.

나는 그 기분 좋은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다 봤다고, 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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