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정말 나한테 일주일간 말 안 걸 거야?”
레오나드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약간 시무룩해진 목소리와 달리 웃음기를 띠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다음에도 그 미소는 여전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네, 진짜로요.”
“지금 나 없으면 혼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데도?”
“…….”
예상치 못한 반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할 말이 없다고.
“그럼 갈까?”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레오나드는 내 팔을 뒤에서 잡은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에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한 발을 떼었다.
또 말린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오나드의 손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메리가 사라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얌전히 그를 따라가는 것뿐이었으니까.
‘지금이 겨울만 아니었어도 그냥 혼자 뛰어갔을 텐데.’
알고 보니까 근처에 떨어져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에 날아간 모자를 찾아 주위를 살폈지만 헛수고였다.
……어쩔 수 없지. 그냥 가는 수밖에. 내 방에 도착하기만 해봐라.
기필코 일주일간 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레오나드의 손에 의지한 채 뒤뚱뒤뚱 열심히 걸어갔다.
그렇게 조금 가던 중 뒤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얼씨구. 이제는 비웃기까지 해?’
자꾸 실없이 웃는 것이 기분 나빠서 노려보던 중 문득 레오나드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추운 겨울에 달랑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잖아?
“레오나드.”
“응?”
“안 추워요?”
“별로. 그다지 춥지는 않은…….”
내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곧장 대답하던 레오나드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옷차림을 한번, 내가 두른 자기 옷을 한번 바라보았다.
곧 뭔가 생각하는가 싶던 레오나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사실 조금 추워.”
“…….”
“아니, 많이 추운 것 같아.”
레오나드가 갑작스레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 와중에도 내 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기에 그 떨림이 나한테까지 전해져왔다.
아무래도 진짜 추운 모양인데. 하긴 어떻게 이 날씨에 저것만 입고 멀쩡할 수가 있겠어.
‘그러게 왜 자기 옷은 나한테 주고 난리야.’
그냥 모자 쓰게 내버려 두지.
미안하지만 이제 와 옷을 돌려주기에는 내 꼴이 말이 아니란 말이다.
‘바람 안 새어 들어가게 해 준다고 머리를 다 헤집어놨을 텐데 지금 벗으면 꼴이 어떨지.’
아멜리오 백작가 영지였더라면 진즉에 돌려주었을지 모르지만 여기는 카일룸 제국의 수도다.
그것도 가장 중심인 황궁 안.
저번에 수도로 들어서자마자 데프론 공작가의 기사들과 맞닥뜨린 일 때문에 내 얼굴을 아는 이가 제법 있을 것이었다.
아멜리오 백작이 황궁 안을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비서관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발표가 된다면 더더욱.
‘아, 그냥 추운 거 참고 갈걸.’
괜히 레오나드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서 이 고생이다. 도대체 왜 가만히 있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나는 곧 마주한 붉은 눈에 바로 납득했다.
저 얼굴 때문이구나, 하고.
나와 얼굴을 마주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손을 들어서 내 팔을 잡은 레오나드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레오나드에게 무게를 실어 빙글 몸을 돌렸다.
그 덕에 레오나드의 앞을 가로막은 채 그를 올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레오나드.”
“응?”
레오나드가 내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안심하고 입을 열었다.
“나 좀 업어줄 수 있어요?”
착각일까. 잠시 레오나드의 몸의 떨림이 멎었던 것도 같았다.
* * *
레오나드는 로레이나의 말에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업어 달라고?’
레오나드는 겉옷에 붙은 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로레이나를 보았다.
사실 아까부터 폭 끌어안고 싶은 것을 참느라 혼이 났다.
자그마한 몸집에 비해 너무 큰 옷을 두른 탓에 로레이나는 얼굴을 제외하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머리가 무거운 것이 불편한 듯 자신의 팔을 잡은 채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는데 이제는 저런 얼굴로 업어달라고 하기까지 하다니.
‘……춥다고 한 건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는데.’
그 말이 설마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레오나드는 하나도 춥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상황에 맞게 체온을 조절하는 것쯤이야 드래곤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런 두꺼운 겉옷을 입고 다닌 이유는 순전히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한겨울에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돌아다닌다면 이상해 보일 테니까.
‘진짜 미치겠네.’
레오나드가 로레이나에게 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표정 관리를 못 했던가.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선명히 느껴지던 에녹의 감정에 불쾌했던 기분은 어느새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언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른 레오나드가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춥다면서요. 저는 레오나드보다 키가 작으니까 걸어가면서 같이 두를 수는 없잖아요.”
“아…….”
“하지만 제가 레오나드한테 업히면 뒤에서 같이 덮어줄 수 있다고요.”
“…….”
“레오나드?”
대답이 없는 레오나드가 이상했던 것인지 로레이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바람에 애써 중심을 잡았던 몸이 또다시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에 레오나드는 울고 싶어졌다.
왜 저렇게 귀여운 거지?
얼굴에 점점 열이 오르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는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에 더 버티기가 힘들었던 레오나드는 재빨리 로레이나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업혀.”
사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모자나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된다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굳이?’
자신의 앞에 등을 내민 레오나드의 모습에 로레이나가 중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겉옷을 펼친 채 자신의 목을 감싸 안는 로레이나의 온기를 느끼며 레오나드가 천천히 일어섰다.
‘너무 가벼운데.’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아무래도 주방장에게 로레이나의 식단에 신경 쓰라고 말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로레이나.”
“…….”
“……로레이나?”
업히고 나서도 조잘조잘 떠들 줄 알았던 로레이나는 의외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들었나?’
혹시 몰라 최대한 천천히 걸었으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중간중간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렸으니까.
계속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다시 걷는 것에 집중하는데, 한쪽 팔을 푼 로레이나가 별안간 레오나드의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
그에 레오나드가 몸을 움찔 떨며 살짝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로레이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애꿎은 등만 계속 찌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뭐 하는 거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레오나드는 얌전히 기다렸다. 그사이 로레이나는 점점 찌르는 범위를 넓혀갔다.
그 감각에 집중하던 레오나드는 그제야 로레이나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뭘 어떻게 해?”
“네?”
“내 등에 어떻게 하냐고 썼잖아.”
갑작스레 들린 음성에 놀라 몸을 흠칫 떨던 로레이나가 놀란 듯 목소리를 키웠다.
“……그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열심히 쓰는데 모를 리가.”
“레오나드! 저, 잠깐만. 잠깐만 내려줘요!”
등을 때리면서 다급히 뱉은 말에 레오나드는 황급히 로레이나를 내려주었다.
혹시라도 로레이나가 넘어질까 걱정이 되어 재빨리 팔을 잡아주려고 했지만 로레이나가 레오나드의 손을 잡는 것이 더 빨랐다.
로레이나는 사막 지역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잠시 레오나드를 힐끗 올려다보던 로레이나가 레오나드의 손에 뭐라 적어 내려갔다.
“이거는요? 이건 뭐라 썼는지 알겠어요?”
그리고 그 오아시스를 찾는 착실한 길잡이가 되어준 레오나드는 이번에도 정답을 유추해내었다.
“내 이름 썼잖아. 레오나드. 맞지?”
“맞아요! 그럼 이거는요?”
로레이나가 레오나드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면 레오나드가 그것을 맞추고, 그리고 로레이나가 그것이 맞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꽤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조금 지루하다 느껴질 법한 일이었지만 레오나드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정답을 맞힐 때마다 신이 나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로레이나를 보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흥미진진했다.
꽤 어려운 문제라 여겼던 말까지 맞추자 로레이나가 폴짝 뛰었다.
“대박! 어쩜 이렇게 잘 맞춰요?”
그랬기에 뜻을 알 수 없는 말이 빠르게 지나가도 레오나드는 개의치 않았다.
로레이나가 좋아한다면야 그것으로 되었으니까.
레오나드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대신 또 뒤로 넘어갈 뻔한 로레이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 하는 거야?”
“헨티슨 공작님이 저더러 레오나드가 회의에 잘 참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아시죠?”
로레이나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가뜩이나 추워서 열이 오른 볼이 더 핑크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두 뺨이 연한 분홍빛 머리카락과 어우러지는 광경이 레오나드로 하여금 꽃밭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응, 알지.”
“지금까지 회의 중에 귀족들 이름을 어떻게 알려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해결되었어요!”
“손바닥에 이름 써서 알려주려고?”
“네! 그 정도라면 회의실 책상에 가려져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흥분한 듯 한꺼번에 많은 말들을 쏟아내던 로레이나가 잠시 숨을 골랐다.
“다 레오나드 덕분이에요. 무의식중에 적은 거라 레오나드가 중간에 말 안 했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뭘 그런 걸 가지고…….”
“에이, 그런 거라니요. 내가 며칠 동안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데.”
“…….”
“정말 고마워요.”
봄바람이 이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인 로레이나가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에 멍한 얼굴을 하던 레오나드가 참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렇게 잘한 일이면 조금 욕심 내봐도 되지 않을까.
“……뭐 없어?”
“네?”
“내가 도와줬는데, 상 같은 거 없냐고.”
환하게 웃던 로레이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냥 도와주는 법이 없어요? 치사하다, 정말.”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하는 생각에 레오나드가 후회할 때쯤 로레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보상이라면 해 줄게요.”
그 말에 레오나드가 작게 미소 지었다. 사실, 아까부터 쭉 생각해왔던 한 가지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