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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40화 (40/144)

#40화

레오나드의 말에도 나는 바보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계에서의 삶까지 통틀어도 이런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 게 이상하지.’

학창 시절에는 먹고살기 바빴고 장학금을 받아 이제 인생 좀 편해지나 싶었던 스무 살에는 갑작스럽게 빙의해버렸으니까.

‘……아니지. 솔직히 저건 연애 경험이 있다고 해도 놀랄 만한 상황 아닌가?’

레오나드는 언뜻 보면 고대 그리스 복식을 연상케 하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중요한 부분이야 다 가려져 있었다만,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단 말이다.

이런 나를 눈치챈 것인지 레오나드가 다시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원래 잘 때 답답한 거 싫어해서 이러고 자는데.”

“…….”

“신경 쓰여?”

말끝에 나직한 웃음이 들려왔다.

지금 레오나드의 모습에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굳이 그렇다고 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레오나드의 지금 모습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신경 쓴다고? 내가?’

이 시도 때도 없이 오해하고 착각하는 사람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서 본 레오나드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말았다.

……그래. 엄청 신경 쓰인다, 젠장. 이게 다 저 얼굴 때문이야.

‘이런 건 나중에 셀리아한테나 써먹으라고, 제발.’

정신 차리자. 일단 레오나드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도 작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애써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침대 옆쪽에 놓여 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내 쪽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였다.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신경 안 쓰이니까 대답을 안 한 거예요.”

“그럼 왜 그렇게 놀란 거야?”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죠. 한겨울에 입는 잠옷치고는 얇잖아요.”

“그래?”

레오나드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자연스러웠어. 중간에 더듬지도 않았으니 이제 해결…….

“그럼 계속 이러고 있어도 상관없겠네.”

……뭐라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레오나드가 낮게 웃으며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딱 보기에도 상당히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덕분에 앞으로 쭉 이러고 있어도 되겠어. 혹여나 네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 모습에 나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슬쩍 몸을 뒤로 젖혔다.

“그래요? 괜한 걱정이었네요.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정말?”

“그, 그렇다니까요.”

하지만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은 상태였기 때문에 젖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 이러다가 뒤로 자빠지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몸 균형이 흐트러진 것이 느껴졌다.

차마 뒤로 넘어가서 못 볼 꼴을 보일 수 없었던 나는 레오나드에게 항복했다.

“시, 신경 쓰여요. 쓰인다고요! 됐죠?”

그러니까 이제 뒤로 좀 가라고,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바라보자 그제야 레오나드가 뒤로 몸을 물렸다.

얼굴에는 아까와 달리 환한 미소가 자리한 채였다.

아까까지 실망하던 사람과 같은 인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제 만족스러워요?”

“응, 엄청.”

“와, 얄미워. 말이라도 좀 아니라고 해 주면 안 돼요?”

그에 나를 일으켜주려던 레오나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꽤 가까웠던 거리 탓에 귓가에 얕은 숨이 내려앉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그렇게 웃던 레오나드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어.”

그 힘에 몸이 당겨진 나는 그대로 레오나드의 앞까지 끌려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레오나드와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네가 나를 신경 쓴다는데.”

나를 내려다보던 눈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반짝이던 그 모습이 두 눈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누가 보더라도 그 안에 든 감정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따스했던 눈동자도 함께.

‘……아니, 아니야.’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기 버거웠던 몸이 저절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않아? 이 세계의 주인공이 왜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주겠냐고.

‘로레이나 아멜리오’라는 껍데기가 아니었다면 별 보잘것없었을 나를.

‘정신 차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려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여긴 일터야. 넌 지금 일하러 온 거라고.

‘일기장이면 일기장답게 행동하자.’

그리고 내가 제대로 못 하면 레오나드의 일에 지장이 생긴다. 자칫하면 며칠 뒤에 있을 회의를 망칠 수도 있었고.

‘레오나드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기로 했잖아. 잊었어?’

그 생각을 하자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잠깐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저희 일해요.”

“일?”

“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빨리 맞춰봐야죠. 제가 아침에 있었던 일부터 쭉 말할 테니까 기억 안 나는 부분이나 기억과 다른 일이 있으면 말해 줘요. 오늘 아침에는…….”

하지만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당사자가 자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

“오늘 아침에는 로레이나가 숙취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줄래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레오나드가 다시금 작게 웃었다.

얼굴에 만연한 웃음기가 떠올라있는 것이,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 그건 아침이 아니었던가? 점심 때쯤에야 일어났지, 아마?”

……하지 말라니까 더 그러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덕분에 방금까지 묘했던 기분은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래. 그런 줄 알았는데…….

“제가 숙취로 괴로워했던 게 그렇게 즐거워요?”

“그것보다는 어제 술에 취해서 했던 말이 더 즐거웠지.”

“……네?”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제 했던 말이라니?

‘내, 내가 뭐라고 했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어제 일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쳤어, 진짜. 도대체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너무 절망적이어서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도대체 나는 레오나드에게 어제 뭐라고 지껄인 것이란 말인가.

‘설마 어제 깽판이라도 쳤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딱히 레오나드가 화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나는 다시금 레오나드의 얼굴을 살피다가 안심했다.

일단 뭐가 되었든 간에 레오나드가 기분 나쁠 만한 짓은 안 한 것 같긴 한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혹시 제가 어제 실수라도 했나요?”

“글쎄.”

살짝 뒤로 물러난 레오나드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느릿하게 몸을 펴며 웃었다.

그 여유로운 행동에 오히려 나는 조급해졌다.

“뭔데요? 그냥 좀 이야기해 주세요.”

“모르는 게 좋을 텐데. 나는 좋았지만 너는 며칠 머리 쥐어뜯을지도 몰라.”

“그래도 몰라서 답답해하는 것보다는 알고 창피해하는 게 나아요.”

기억도 못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뭐라 표현하기도 힘든,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말을 해 줘야 실수한 게 있으면 사과라도 하…….”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이야기해 주려는 건가 싶어서 나는 가만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내가 기대했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제 일을 입 밖으로 꺼낸 건 사과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야.”

“…….”

“너한테 해 줄 말이 있어서지.”

“……그게 뭔데요?”

아까처럼 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레오나드를 노려보았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레오나드는 조용히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 웃음에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방 안에 꽤 오래 내려앉아 있던 침묵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까 느꼈던 묘한 기분이 슬금슬금 올라온다는 생각이 들 때쯤, 레오나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넌 나한테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고.”

“…….”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가 안 될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목소리로, 레오나드는 다소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그 말이 하필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그대로라 기분이 더 이상했다.

‘갑자기 그런 말을 왜…….’

물어야 할 것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뭔가가 목을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레오나드의 눈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어제 뭔가 말을 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레오나드가 갑자기 저런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으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던 레오나드는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레이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

“왜 자꾸 네가 뭐라도 안 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굴어?”

……아, 역시. 내가 어제 사고를 제대로 친 모양이었다.

“꼭 그렇게 안 하면 쫓겨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지는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숨기고 싶었던 부분이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이전 세계에서 있었던 일은 잊고 늘 밝게 살아가고 싶었는데.

‘결국 나는 그럴 수 없었던 걸까?’

사람이 변하기는 쉽지 않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껍데기를 쓴 상태에서도 나는 어쩜 이리도 초라할까.

저주에 걸렸어도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났던 남자 주인공 앞에 있으니 그 차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그에 나는 마음을 억누르며 간신히 레오나드의 말에 대답했다.

“……당연하죠. 아무것도 안 하면 쓸모가 없으니까요.”

“…….”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쓸모가 없어지면 여기 있을 이유 또한 사라지니까.”

저주의 예외 대상인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꼭 당신에게 도움이 되어야 해.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어쩌다 빙의하게 된 몸 때문이 아니라 진짜 내가 레오나드에게 필요한 이유를.

‘그러니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나는 두려움 반, 후련함 반이 섞인 기묘한 상태로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에 와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에게 귀하게 여겨지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하프 엘프 아가씨가 아니라-.

혹시라도 필요 없다며 버려질까 걱정하는 진짜 내 모습을.

‘레오나드한테는 4년 전 모습 그대로 남고 싶었는데.’

어린 꼬마 젠을 구해 주었던 정의의 사도 같은 모습 그대로.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물 건너갔지, 뭐.

‘지금쯤 엄청 실망하고 있을지도.’

레오나드는 처음으로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내가 레오나드를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종국에는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지, 숱한 경험들로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결국 어떤 시선을 받는지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애꿎은 이불만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던 레오나드가 갑자기 내 손을 뒤집었다.

“지금 뭐 하는…….”

내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레오나드가 반대쪽 손을 들어 꽉 쥐고 있던 내 주먹을 조심스레 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인지 곧 손바닥 위로 손톱에 짓눌려 핏물이 맺힌 상처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그 상처들을 본 레오나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다쳤잖아.”

“아…….”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손바닥이 꽤 쓰라렸다.

그러고 보니 입안에서도 비릿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입술을 세게 깨문 탓이었다.

‘이렇게나 긴장하고 있었던가.’

뜻밖의 깨달음에 멍하니 있는 사이, 내 손가락 끝에 제 손을 얽은 레오나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손바닥에 닿은 부드러운 느낌에 그제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무, 무슨…….”

“쉿.”

작게 속삭인 레오나드가 다시금 내 손바닥을 향해 입술을 내렸다.

아까보다 더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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