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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41화 (41/144)

#41화

“아…….”

묘한 느낌에 절로 신음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나조차 놀라서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아파?”

그에 손바닥에 입을 맞추던 레오나드가 잠시 입술을 떼며 물었다.

내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는 살짝 눈만 올려 뜬 모습에 볼이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게 치료하는 과정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잖아.

하지만 꽤 굳게 마음을 먹었음에도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작게 속삭이듯이 말한 레오나드가 다시금 입술을 내렸다.

그 과정이 몹시 비현실적이라 나는 멍한 얼굴로 레오나드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손바닥의 상처가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 때쯤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또 다친 곳 없어?”

“……아, 있긴 한데…….”

무심코 거기까지 말한 나는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미쳤어!’

입을 다쳤다는 이야기를 해서 뭐 어쩌려고? 입에 입맞춤이라도 해달라고 하게?

생각만으로도 당황스러운 기분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레오나드는 그사이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더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살짝 말끝을 흐린 레오나드의 시선이 안으로 말아 물고 있는 내 입술 쪽에 닿았다.

그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하지만 이는 아무 소용없는 행동이었던 모양이었다. 곧바로 레오나드가 귀신같이 눈치챘던 것을 보면.

“입술 다쳤어?”

레오나드가 내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담담한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에 그나마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래. 지금 동요하고 있는 건 나뿐이라고.

“네, 근데 살짝 깨문 정도라 괜찮아요. 그리고 원래 입 안쪽 상처는 금방 낫잖아요.”

“그렇긴 하지.”

짧게 대답한 레오나드가 완전히 허리를 폈다.

조급한 기색 없이 느릿한 동작이었으나 이번에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아니, 아주 많이.

“원래 입 안쪽 상처가 금방 낫는 건 맞지만…….”

“…….”

“난 더 빨리 낫게 해 줄 수 있는데.”

레오나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는 목소리와 달리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 진득한 시선에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뭐야.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건데?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야?

“미, 미쳤어요?”

긴장한 것이 역력한 모습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 웃음 역시 평상시와는 달랐다.

“소원권이라도 쓰면.”

“…….”

“그러면 허락해 주려나.”

연이은 공격에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저기요, 저한테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니, 그건…….”

지금 이 상황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커다란 돌덩이로 목구멍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침묵에 눈을 질끈 감던 순간, 레오나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됐어. 농담이야, 농담.”

레오나드가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순식간에 달라진 공기에 그제야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레오나드와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레오나드가 어쩐지 아쉽다는 기색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정말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왜 당신이 그런 눈을 해?’

그러니까 꼭 상처받은 사람 같잖아. 지금 레오나드의 웃음은 내가 자주 지었던 자조적인 표정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 때문일까. 레오나드와 나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음에도 꼭 거울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갑자기 도망이라도 치고 싶어졌다.

‘……손 좀 놔주었으면 좋겠는데.’

상처도 다 아물었겠다, 이제 놔줄 법도 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레오나드는 한참이나 내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놔주기는커녕 계속해서 내 손바닥을 반대편 손으로 문질렀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데, 마치 그 아픔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레오나드가 다시 입을 열었던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한참 만에 나온 목소리는 무언가에 억눌린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억지로 뭘 하려고 애쓰지 마, 로레이나.”

“…….”

“그럴 필요 없어. 그러려고 너를 데리고 온 게 아니야.”

꽤 오래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적안이 아까와는 다른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너는 그냥 이대로 있어도 돼.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네가 필요했던 것뿐이니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쓸모없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레오나드가 속삭였다.

여전히 창문으로는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방 안은 지금이 추운 겨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따뜻했다.

곧 레오나드가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내가 평생을 안고 오던 고민이 달빛에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그것들이 다 별것 아니었던 것처럼.

“그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야기 시작할까?”

“…….”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한다고 했었나.”

레오나드가 여전히 내 손에 제 손가락을 얽은 채로 미소 지었다.

내가 멍하니 입을 열었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춥지 않고 따뜻한 방. 손에 닿아 있는 온기. 못난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아주아주 잘생긴 사람.

그 모든 비현실적인 것들이 어우러지는 기묘하고 완벽한 밤 한가운데 나는 서 있었다.

‘꿈이 아니야.’

이건 현실 그 자체였다. 레오나드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중간 듣고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기억하고 있다며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꽤 긴 시간에도 변함없는 그 따스한 눈빛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말았다.

정말로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 * *

레오나드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용기가 없었고, 레오나드는…….

“로레이나.”

“…….”

“내가 다이아나보다 검 더 잘 다뤄.”

……여전히 이상한 짓을 했다.

오늘은 또 무슨 오해를 했길래 저리 삽질을 하는지.

‘오늘은 딱히 무언가 오해할 만한 일이 없었는데.’

오늘 있었던 일이라고는 고작 다이아나랑 잠시 대화하던 것뿐이었단 말이다.

그마저도 별로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일단,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로레이나, 여기사가 에스코트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그래, 대화의 시작은 바로 다이아나의 저 질문이었지. 이 말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당연히 멋지죠! 그리고 그 여기사가 다이아나라면 더 멋질 거 같아요.’

아주 자연스러운 대답이다. 레오나드가 오해할 만한 것도 없고.

‘정말요? 그럼 저 파트너로 괜찮은 거겠죠?’

‘물론이죠! 다이아나라면 누구든 좋아할 거예요.’

‘로레이나는 어때요?’

‘저야 받으면 영광이죠. 날아갈 듯이 좋을 거 같은데요?’

그리고 끝. 다이아나와의 오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후에는 다시금 자리에 앉아 가만히 귀족들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못 믿겠다면 보여 줄 수도 있어. 내가 더 잘 다룬다니까.”

대답을 바라는 듯 집무실 책상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귀족들 얼굴 모음집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검 잘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리고 내가 힘도 더 잘 쓴다고.”

“……이제 막 기사가 된 사람보다 세서 참 좋겠네요.”

반쯤 비꼬듯이 한 말이었는데 레오나드는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젯밤이랑 같은 사람 맞아?

“그리고 기사복도 잘 어울리지.”

“…….”

“무도회에서 나보다 돋보이는 사람은 없을걸.”

……갑자기 남자 주인공이 뜬금없는 자기 자랑을 시작했다.

‘뭐지?’

옆에서 장단이라도 맞춰 주어야 하는 건가?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레오나드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코끝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이 사람이 저번부터 자꾸 훅 들어오고 그러네.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자기 잘생긴 거는 알아서. 이래서 자기가 잘난 거 아는 사람은 피곤하다니까.

“저, 저기요. 레오나드? 조금만 뒤로…….”

차마 얼굴에 손은 대지 못하고 쩔쩔맸으나 레오나드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어때.”

“네?”

“……다이아나 이야기는 잘 들었어. 아주 멋있다고 했었지. 그래, 파트너로 손색이 없겠어. 인정해.”

……파트너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지? 무슨 말인지 물으려는데 레오나드가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초조한 듯 잘게 흔들리는 붉은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나는? 나는 파트너로 별로인가.”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말하는 무도회가 며칠 뒤에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 말하는 거 맞죠?”

“그래. 내 즉위를 축하하는 그 무도회 말이야.”

바로 코앞에 있는 내 얼굴이 부담스럽지도 않은 건지, 레오나드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 때문에 죽을 맛이었던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책상이 레오나드 자리 바로 옆에 붙어 있었던 탓에 멀어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대답 못 할 정도로 별로야?”

레오나드가 나를 옭아맬 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 때문일까. 조금 멀어졌다고 생각한 거리가 도로 좁혀진 느낌이었다.

“그럼 소원권을 써서라도…….”

……아니, 진짜. 그놈의 소원권. 내가 없애버리든가 해야지.

나는 묘한 긴장감을 가르고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에 나와 이마를 부딪칠 뻔했던 레오나드가 다급히 몸을 물렸다.

“자꾸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예요?”

“당연하지. 너도 무도회에 참석하니까.”

“그건 저도 알아요.”

곧 황실 무도회가 열린다는 사실도 알았고, 거기에 내가 참석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 무도회에서 내가 비서관임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로 했잖아.’

그런 자리에 내가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니 참석해야지. 가서 최대한 레오나드 옆에 찰싹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귀족들 얼굴을 제대로 익히려면 직접 보는 것이 좋기도 하고.’

계속 초상화만 들여다보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잘 그렸다고 한들, 그림과 실물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법이지 않은가.

후에 있을 귀족 회의를 위해서라도 무도회에는 참석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도 내가 왜 물어보는지 몰라?”

“모르겠는데요.”

“……무도회 참석하는데 파트너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네.”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인 레오나드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오히려 레오나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당연한 거 아니야? 왜냐하면…….

“저는 당연히 레오나드가 제 파트너인 줄 알았는데요.”

무도회 참석했다가 저주에 걸린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그리고 아까 말했다시피 레오나드랑 붙어 있는 게 내 안전에도 훨씬 도움이 되고.

“그래서 딱히 고민해 보지 않았어요. 그편이 레오나드도 움직이기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도 레오나드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뭔가에 놀란 듯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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