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크흠.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군요.”
회의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럴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쩐지 민망한 기분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저렇게 말하니까 진짜 거사라도 치른 거 같잖아.’
물론 지난번보다 좀…… 오래 하긴 했지만. 그 정도 진도까지는 안 나갔단 말이야.
아니, 잠깐만. 그 전에 왜 제럴드가 저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거지?
‘제럴드 앞에서 딱히 티를 낸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아까 레오나드가 나를 껴안는 걸 보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아멜리오 백작가를 떠나올 때도 이미 보였던 수준이고.
미심쩍은 느낌에 슬쩍 레오나드를 올려다보자 그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이네. 내가 못 살아, 진짜.
“……어쨌든, 생각보다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입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제럴드가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예상했던 것에 비해 아이작이 준비한 것이 좀 약하긴 했다.
‘물론 레오나드가 타격을 좀 많이 입은 것이 문제긴 했지만…….’
신경 쓰여서 레오나드를 살피자 그가 눈을 맞추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 모양이었다.
“회의 내용 좀 정리하러 지금 바로 집무실에 가야 할 거 같은데 같이 갈래?”
“음, 저는…….”
잠시 고민하던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방으로 돌아가서 좀 쉴래요.”
평소 같으면 같이 가겠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사람 많은 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현기증이 좀 나는 거 같기도 하고.
확실히 내가 체력이 약하긴 한 모양이었다. 운동이라도 좀 해야 하나.
“몸이 안 좋아?”
“조금요. 잠깐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거 같아요.”
“내가 데려다줄…….”
“아니, 됐어요! 그냥 저 혼자 갈게요. 집무실이 훨씬 가까운데 저 데려다주고 다시 가는 건 너무 시간 낭비잖아요.”
가만히 두면 나를 안은 채로 침대까지 갈 것 같은 느낌이라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 더한 소문이 퍼지는 건 사양이었다.
내 반응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구기던 레오나드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얼른 가서 쉬어. 혹시 상태 더 나빠지면 바로 말하고.”
“알겠어요.”
제럴드와 집무실 쪽으로 향하는 레오나드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고 나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지친 몸과 달리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어졌지만.
“아멜리오 백작.”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아이작이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왜 아직 안 가고 여기 있는 거지?’
회의장에서 나간 게 한참 전인데.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자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이 곧 자신이 이곳에 있는 목적을 내뱉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
“내가 백작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말이에요.”
나는 대답 없이 아이작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나를 마찬가지로 빤히 보던 그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그에 나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경계하며 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훑던 아이작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경계하지 말아요. 그냥 백작과 오랜만에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뿐이니까.”
녹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더니 곧 아래로 내리깔렸다. 아이작의 얼굴은 매우 태연해 보였다.
마치 내가 공작저를 방문했던 그 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작을 마주한 내 손이 떨리지만 않았더라면 나 역시 그렇게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걸까.’
무도회에서 에녹을 만난 일을 알고 찾아온 걸까? 아니면 아까 회의에서 내가 나선 것에 경고라도 하려고?
회의가 끝난 다음이라 지켜보는 사람도 없으니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었음에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작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솔직히 말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황궁에 남아 나를 만나는 건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내가 레오나드랑 같이 있었으면 어쩌려고.’
뭐, 상관없나. 아까 레오나드 앞에서도 잘만 말하던 것을 보면 애초에 신경 안 썼던 걸지도.
“좋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거죠? 공작님과 나눌 이야기는 그때 다 끝난 것으로 아는데요.”
“……백작님.”
옆에서 상황을 살피던 기사가 나를 만류하듯 작게 속삭였다. 레오나드가 걱정하던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 역시 이런 사람과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여기서 대화해도 괜찮겠죠?”
“물론이죠. 백작이 원한다면야.”
아이작이 여전히 웃음기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지경인데 더 놀랄 것은 따로 있었다.
“우선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군요.”
말을 마친 아이작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주변에서 지켜보던 기사들과 공작가의 시종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혀를 깨물어버릴 뻔했다.
‘아이작 데프론이 나한테 사과를 한다고?’
갑자기 왜? 죽일 거라고 협박까지 해놓고 이런 식으로 사과하면 내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나?
‘혹시 보여 주기 용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 모습을 보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할 거였다면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하는 편이 아이작에게는 훨씬 이득이잖아.
그리고 데프론 공작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아는 건 당사자들 정도이니 애초에 아이작이 사과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아이작 역시 이 물음에 대해 답할 생각이 없는지 차분히 제 할 말을 이어갔고.
“그날 내가 조금 흥분했었던 거 같아요.”
“…….”
“에녹이 백작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를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지켜만 보겠다는 다짐은 아이작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금방 무너져내렸다.
“……공작님.”
“예, 백작.”
살갑게 답하는 공작의 모습에 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거리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지금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뭐죠? 굳이 이런 연기를 하시는 이유가 뭐냐고요.”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작이 틈만 나면 에녹 핑계를 대었기 때문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에녹이 그렇게 다친 이유가 이 사람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어서.
“지금이라도 저를 한 대 치고 싶은 마음뿐이시면서.”
방긋 웃자 아이작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아, 맞다. 에녹이 저한테 와서 사과하던데 혹시 그것 때문인가요?”
“…….”
“설마 모르셨어요?”
그 얼굴을 보며 더 활짝 웃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담소라도 나누는 것처럼 보이도록.
“저런. 두 분이 싸우시기라도 한 모양이네요.”
“이…….”
잠시 이를 갈던 아이작이 화를 참으려는 듯 두 손을 꽉 쥐었다. 저 성격에 에녹은 아낀다는 점이 아직도 의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름이 돋았다. 에녹은 아끼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은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저 이중성에.
그사이 아이작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놀라운 연기력과 집념에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녹 일 때문은 아니에요. 실은 백작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저한테 물어볼 게 있으시다고요?”
“예, 이건 백작만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무엇인가요?”
아까보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적당히 대꾸해 주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드레스를 매만졌다.
그러자 아이작이 아까보다 다소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작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뭐라고요?”
내가 당황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아이작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그것을 보고 있음에도 나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애써 묻어두려고 했던 사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비집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내 방 깊숙한 곳에 있을 그 일기장이.
“……죄송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거라면 제가 드릴 말씀이 없을 거 같아요.”
“왜죠?”
“지금 그렇게 여쭤보시는 이유가 뭔가요?”
예민한 구석을 찔린 탓에 말이 다소 날카롭게 나갔다. 그에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아이작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 미안합니다, 백작.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엘레노아 님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엘레노아. 순수 혈통 엘프이자 이미 죽은 로레이나의 친모.
아이작은 그 이름을 언급하고는 다시금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작이 그럴수록 내 기분은 점점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그의 입에서 저 이름이 나오는 것이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로레이나의 몸에 그 정도로 동화가 되어버린 건가?’
본래 그녀가 느꼈어야 할 감정까지 내가 고스란히 느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해 왜 궁금해하시는 거죠?”
“제가 엘레노아 님이 사셨던 시대에 관심이 좀 있어서요.”
“…….”
“지금과 달리 마법이 존재하던 때 말입니다, 백작.”
아이작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양, 작게 속삭였다. 정말 친밀한 사람을 대하듯 구는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저번에 에녹이 찾아온 건 이 사람 때문이었구나.’
아까와 달리 잔뜩 경계하며 바라보자 아이작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엘레노아 님은 500년도 넘게 사셨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렇다면요?”
“그럼 그 현장에도 계셨을지 모르겠군요. 마녀 이사벨이 당시 황제 폐하께 저주를 날렸던 때 말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 뭔가를 알고 있어.’
어떻게 해서든 그게 뭔지 알아내야만 했다. 나는 조용히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마녀 이사벨과 어머니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자꾸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아이작이 말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녹색 눈이 나를 훑는 과정이 매우 느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연 아이작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마치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는 듯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작. 역시 내가 너무 무례한 질문을 했네요.”
아이작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이만 대화를 마무리하자는 뜻이었다.
그에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까지 그가 한 말 전부 나를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혼란스러운 기색을 숨기려 애쓰는 나를 가만히 보던 아이작이 잠시 웃더니 내 옆을 지나치며 작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백작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말에 담긴 명백한 비웃음에 하마터면 아이작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옆에서 기사가 말을 걸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었다.
“백작님 이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사의 말에 나는 부들부들 떨리던 손을 누르며 조용히 뒤를 돌았다.
아이작 때문에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일기장을 마저 읽어 봐야 할 거 같아.’
공작의 입에서 이사벨이 언급되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그냥 뱉은 말은 아닐 것이었다.
‘지금까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이사벨은 과거의 인물이니까. 지금 레오나드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으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가 이거였다. 아이작에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비웃음을 사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오나드와 로레이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할 내가.
‘만약 일기장에 안 좋은 이야기라도 나오면 어떡하지…….’
불안함에 떨리는 몸을 모른 체하며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 다가오는 메리와 다른 시녀들을 물린 나는 곧장 서랍으로 가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저번에 읽었던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사락. 애써 덮어두려 했던 다음 장이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