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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57화 (57/144)

#57화

떨리는 마음으로 일기장을 넘긴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믿기 어려운 사실에 몇 번이나 다시 확인을 해 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다음 페이지가 없어.’

분명 며칠 전에 확인했을 때는 다음 장에 글자가 있었는데.

읽지는 않았기에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페이지는 백지였다.

엘레노아가 아이의 이름을 이사벨이라고 정했다는 말이 적힌 이후의 장들이 전부.

‘내 기억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어.’

로레이나는 하프 엘프이니까. 맨정신에 본 것들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글자가 사라졌다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답이 나지 않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이런 건 마법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 않나?

‘아니야, 셀리아가 등장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잖아. 그러니 마법일 리도 없어.’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몸 상태에 충격이 더해진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원작 시작 전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아니잖아. 왜 자꾸 내가 아는 것과 달라지는 것 같지?

‘이러다 원작 진입 후 흐름이 달라지기라도 하면…….’

어느 정도 달라지는 거야 예상했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는데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 일기장을 숨기지 못했기에 허둥지둥하던 몸이 팔을 당긴 힘에 끌려 따뜻한 품에 안겼다.

“괜찮아?”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목소리와 품이었다.

나를 있는 힘껏 껴안은 레오나드가 불안한 듯 파르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일기장을 봤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레오나드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으니까.

나는 재빨리 한쪽 손을 뻗어 일기장을 덮었다.

그 와중에도 레오나드는 연신 내 등을 쓸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뭐가요? 무슨 일 있어요?”

“기사들한테 네가 데프론 공작을 만났다는 이야기 들었어.”

아, 쓸데없는 짓을. 레오나드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는데.

물론 나에게는 큰일이 맞았지만.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예요? 시간 보니까 아직 일도 마무리하지 못했을 거 같은데.”

“내가 말했잖아.”

레오나드가 잠시 나를 품에서 떼어내더니 눈을 마주 봤다.

붉은 눈동자 안에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나한테는 네가 제일 중요하다고.”

“…….”

“언제 어디서든 그건 변하지 않아.”

마치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절대불변하는 법칙을 말하기라도 하는 투였다.

내가 그것들을 부정하면 정말 우스운 일이 되어버릴 것처럼.

더할 나위 달콤한 말이었으나 나는 그 확신 어린 말에도 좀처럼 웃지 못했다.

‘셀리아가 나타나도 당신은 변하지 않을까?’

레오나드를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도저히 이 질문에는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저주를 풀길 원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셀리아가 나타나는 순간에 레오나드는 괴로워하며 끝없이 고민하리라는 것.

‘……바로 나 때문에.’

내가 아는 레오나드는 셀리아가 나타났다고 해서 나를 바로 버릴 성정이 못 되었다.

그건 모든 걸 걸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먼저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내 몫은 셀리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라고 늘 정해두고 있었으니까.

“지금 무슨 생각해.”

레오나드가 불쑥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움찔 몸이 떨렸다.

“뭐, 뭐가요?”

“울고 있잖아, 지금.”

운다고? 내가?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오나드가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느릿하게 훑었다.

그 과정이 깨진 유리라도 만지는 양 조심스러웠다.

레오나드의 말 따라 정말로 눈가가 촉촉한 것이 느껴졌다.

왜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울지도 말고.”

“…….”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 테니까.”

레오나드가 맹세라도 하듯 내 이마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 다정한 행동에 얼핏 원작 속 레오나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레오나드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던 소설 속 남자 주인공과는 매우 달랐다.

아무리 원작 시작 전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아예 다른 사람인 수준인데.

‘왜일까. 뭔가 달라진 게 있는 것도 아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로레이나?”

이상 상태를 감지한 것인지 레오나드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나 때문이야.’

전부 나 때문이었다. 4년 전 그날, 내가 다이아나의 파티에 가서.

아멜리오 백작가를 다시 찾아온 레오나드가 포기하고 떠나려는 걸 붙잡아서.

……그리고 내가 원작과 달리 살기를 원해서. 나 때문에 원작이 틀어졌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레오나드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달라졌다.

내가 개입했으니 어느 정도 원작이 틀어지는 거야 예상은 했다만 난데없이 ‘마법’이 끼어들 줄은 정말 몰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레오나드가 저주를 풀 수 없을지도 몰라.

“레오나드.”

“응.”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바로 돌아오는 것이 좋았다.

나를 걱정스레 살피는 따뜻한 붉은 눈도, 조심스럽게 볼을 감싸는 큼지막한 손도.

과연 이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너무 좋아서-.

“저주를 풀면 뭘 하고 싶어요?”

나는 결정을 내렸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뛰었다.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했는지 잠시 멍하니 있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나를 힘주어 당겨 안았다.

“글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모르겠는데.”

“그래도 생각해 본 적 있을 거 아니에요.”

“음…….”

생각보다 진지한 내 목소리에 레오나드가 웃던 것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숨기는 것이 힘들었다.

“일단 혼자 돌아다녀 보고 싶어. 그동안은 누군가 옆에 있지 않고서는 밖에도 잘 나갈 수 없었거든.”

“그리고요?”

“그동안 신세 진 사람들한테 줄 선물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깜짝 선물 같은 건 꿈도 못 꿨으니까.”

레오나드가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생각해 둔 것이 많았음은 신이 나서 말하는 레오나드의 모습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물을 주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요?”

“고마웠다고.”

“…….”

“제대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어.”

말끝에 숨길 수 없는 행복감이 묻어났다. 그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는 듯이.

그에 나는 불쑥 튀어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지?”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면 내 얼굴이 얼마나 끔찍한지 볼 수 없을 테니까.

레오나드가 말한 것들은 정말로 그의 저주가 풀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

지금까지는 셀리아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가 그녀의 역할을 대신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나의 이기심이었다.

그날, 살기 위해 레오나드를 붙잡았던 나의 욕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단 말이다.

그때의 감정이 이게 전부가 아니었더라도 그러했다.

‘오만하고 멍청했지.’

아무나 남자 주인공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게 문제였다.

레오나드에게 도움이 되기는 무슨. 나한테는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 있잖아.

‘만약 원작대로 죽게 되면?’

그러면 레오나드는 혼자 남게 되겠지.

내가 원작을 틀어놓은 탓에 여자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주도 풀 수 없을 테고.

설사 셀리아가 나타난다고 해도 레오나드가 나 때문에 그녀를 거부한다면 저주는 풀 수가 없다.

‘원작에서는 경계하기는 해도 결국 곁에 두었으니까.’

그리고 여자 주인공이 이미 연인이 있는 남자 주인공을 도와줄지도 미지수였다.

그럼 레오나드는 남은 평생을 외롭고 고통스럽게 살아야만 하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

더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잘라내야 했다. 원작이 최대한 틀어지지 않게.

혹여나 내가 죽은 뒤에도 레오나드가 너무 오래 슬퍼하지 않도록.

그러기 위해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떠나자.’

레오나드를 돕는 일은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헨티슨 가문에서 잘해 줄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왜 갑자기 일기장의 글자들이 사라졌는지 그 비밀에 대해서 알아내면 돼.

레오나드의 저주와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을 테니.

‘그래, 그거면 돼.’

결심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레오나드는 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나는 레오나드가 완전히 고개를 들기 전에 표정을 잘 갈무리할 수 있었다.

“레오나드, 우리 꼭 행복해요.”

같이 있지 않더라도 꼭. 나는 멀리서 당신 소식을 들을 테니까 꼭 행복하기를.

“그래.”

내 말에 나직이 답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따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살을 에일만큼 시렸다.

* * *

레오나드는 이야기하다가 지쳐서 잠이 든 로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옅은 분홍빛 머리 색과 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로레이나의 눈가를 느릿하게 쓸었다.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바보 같기는…….”

로레이나는 애써 숨기고 싶은 것 같았지만 레오나드의 눈에는 한눈에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방의 감정에 예민한데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의 눈에 띄는 감정 변화를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그 상대가 로레이나라면 더더욱.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레오나드가 천천히 오늘 일을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레이나가 이럴 만한 일은 아이작과 마주한 일밖에 없었다.

“역시 그때 그냥 죽여버렸어야…….”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살기에 로레이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잠결에도 괴로워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에 레오나드가 황급히 기운을 거두었다.

한결 편해진 표정에 레오나드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작은 머리에 뭘 그렇게 숨기는 게 많은지. 연신 로레이나를 살피던 적안이 짙게 가라앉았다.

하도 로레이나가 숨기고 싶어 하길래 그냥 지켜보려고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제럴드.”

작은 불음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 전하.”

“아까 그 기사가 뭐라고 했었지?”

“아멜리오 백작을 호위하던 기사 말씀하시는 겁니까?”

레오나드가 로레이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로레이나가 아이작을 만났다는 말만 듣고 급하게 오느라 끝까지 듣지 못한 말을 마저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워낙 작은 목소리라 정확하게는 듣지 못했지만 분명 전대 아멜리오 백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합니다.”

“……백작 부인?”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레오나드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백작 부인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엘레노아는 로레이나가 태어나기 전, 레오나드를 제외한 유일한 이종족이었으니까.

세상에 둘만 남았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드문드문 소식은 듣고 있었다.

문제는 왜 저 이름이 아이작 데프론의 입에서 나왔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

“그게…….”

아까와 달리 잠시 뜸을 들이던 제럴드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중간에 이사벨이라는 이름도 들렸던 것 같다고…….”

“뭐?”

“얼핏 들은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달갑지 않은 이름을 들은 적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제럴드, 데프론 공작의 뒤를 밟아.”

기사가 들은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의혹이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자식이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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