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내가 불렀음에도 레오나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나를 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답답한 마음 반,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 반이었던 나는 천천히 레오나드에게로 다가갔다.
“레오나드?”
“…….”
“여기서 뭐 해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꿈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만한 상황이었지만 이때의 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 했다.
그것이 몸을 휘감은 이 알 수 없는 감각 때문인지, 아니면 떠나온 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침내 시야에 뚜렷하게 들어온 얼굴을 훑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냥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잘 지냈어요?”
나름의 용기를 내서 건넨 말에도 레오나드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 침묵에 누군가가 옆에서 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번뜩 깨달았다.
지금 다 털어놓아야 한다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저, 레오나드, 사실 전부터 해야 하는 말이 있었는데…….”
“…….”
“미안해요. 내가 당신의 운명을 바꾸었을지도 몰라요.”
한번 입을 열자 그다음 말을 하는 것은 쉬웠다.
매번 이 순간을 상상할 때마다 혼자서 중얼거렸던 말이 레오나드를 앞에 두고도 망설임 없이 나왔다.
“나는 사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거든요. 거기서 당신의 이야기를 미리 보았어요.”
“…….”
“원래 당신은 미래에 예쁜 여주인공을 만날 운명이었어요. 그녀를 만나서 저주도 풀고 행복하게 살 예정이었죠.”
레오나드는 이번에도 잠자코 내 말을 들었다. 그리 놀라는 기색도 없는 모습에 나 역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이 현실감이 없었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희망이 마음속에서 자라났으니까.
어쩌면 레오나드가 흔한 로맨스 소설처럼 나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감싸 안아줄지 모른다는.
“그런데 내가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아무래도 일이 꼬인 것 같아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가 본 책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사건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거든요.”
원작에서 레오나드의 트라우마는 오로지 이사벨이 건 저주에 대한 것뿐이었다.
‘만약 원작에도 로레이나 같은 캐릭터가 등장했고 지금과 비슷한 흐름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지금과 같이 ‘데프론 공작이 목숨을 노렸다’나 ‘연인이 곁을 떠났다’와 같은, 로맨스 소설에서는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건이 안 나왔을 리 없었다.
그러니 최근 일어난 사건들은, 본래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일들이 맞았다.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원작의 흐름대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려고 당신 곁도 떠난 거예요.”
“…….”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레오나드는 아까와 똑같이 말이 없었으나 어쩐지 이번에는 무언가가 달랐다.
표정이 묘하게 굳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몸도 느낀 모양인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었다.
“……미안해요, 레오나드.”
“…….”
“너무 살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이 기묘한 감각을 재빨리 떨쳐버리려 레오나드의 손을 잡았다.
손에 닿은 피부가 얼음장처럼 차갑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조심스레 잡았던 손이 거칠게 내쳐졌다.
갑작스러운,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손등이 얼얼했던 탓에 없었던 일인 양 포장할 수는 없었다.
“……레오나드?”
조심스레 부른 이름에 레오나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그를 따라갔다.
“레오나드, 잠깐만. 잠깐 내 말 좀 들어줘요!”
내가 쫓아가는 것이 느껴졌던지 레오나드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종국에는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라져서, 결국 다리에 무리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앗…….”
아픈 다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보려고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신음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레오나드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할 수 있는 한 내게서 더 멀어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가 레오나드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아진 뒤에야 다급히 외쳤다.
어렴풋이 생각만 했던 악몽 같은 상황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안해요, 레오나드. 정말 미안해요.”
“…….”
“당신의 운명을 멋대로 바꿔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레오나드는 돌아보지 않았고 결국 눈에 보이지 않을 지경까지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다가온 목소리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정말?’
‘어리석기는. 그럼 자기 미래를 바꿔버린 널 용서할 줄 알았어?’
‘멍청한 로레이나.’
가슴을 쿡쿡 찌르는 말에 나는 재빨리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어떻게든 내게 다가와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겼다.
“……아니야.”
‘레오나드는 널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 널 당장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일걸.’
나를 비웃듯 말끝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열심히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멍청한 로레이나. 그는 널 죽을 때까지 미워할 거야.’
“아니야.”
“……아니야.”
“……이나.”
“흐윽…… 아니…….”
“로레이나!”
이전까지와는 다른, 귓가에 들린 큰 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한번 눈을 깜빡이자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우수수 쏟아 내렸다.
아까보다 한층 맑아진 시야에 에녹이 들어왔다.
눈앞을 한가득 채운 녹색 색채에 그제야 방금까지가 꿈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그곳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숨소리가 마치 고장 난 기계라도 된 듯 거칠었다.
“헉…… 허억.”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 같아서 허우적대는데 별안간 에녹이 내 두 뺨을 감쌌다.
“로레이나, 진정하고 날 좀 봐요.”
“하아…….”
“천천히 심호흡해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나는 에녹의 말 따라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그러자 곧 시야에 초점이 맞았고 점차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에녹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메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괜찮은 거예요?”
내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변하자 에녹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챈 듯 에녹이 성큼 다가와 내 허리를 받치더니 다른 손은 무릎 뒤로 넣어 그대로 나를 안아 들었다.
“……우선 쉬어요.”
작게 속삭이듯이 말한 에녹이 나를 안은 채로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조용히 눈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마차는 어느 여관 앞에 멈춰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생각보다 답은 금방 나왔다.
사람들이 늦은 시간까지도 바닥에 쌓인 흙이나 나무 따위를 치우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이곳이 수도 북부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과정을 유심히 보는 사이 에녹은 문을 팔로 밀며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이 여관은 피해를 덜 입은 모양인지 내부가 제법 깨끗했다.
주인을 불러 방을 잡은 에녹이 곧장 나를 안고 계단을 올랐다. 내 방은 2층 오른쪽 맨 끝방이었다.
열쇠로 문을 열자 시선을 사로잡는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여관 옆쪽에 있는 높은 산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라 원래대로라면 경치가 매우 좋은 방이었겠지만 아쉽게도 창문에 보이는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직접 와서 보니 왜 북부 사람들이 마법이 아니고서야 이 일이 설명이 안 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창밖을 살피는 사이 에녹은 천천히 나를 내려 침대 위에 앉혔다.
“무슨 꿈을 꾼 거예요? 악몽이라도 꿨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선을 피하며 답하자 에녹이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요.”
“…….”
“폐하 때문인 거 다 압니다.”
에녹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인물에 나는 어떻게 알았냐고 차마 묻지는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에녹이 헛웃음을 뱉었다.
“꿈꾸는 내내 같은 이름만 부르는데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
“도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급하게 도망쳐 나온 거고 당신이 이토록…….”
거기까지 말한 에녹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다.
“어차피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죠?”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내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리자 에녹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모습에, 황궁을 떠나기 전 레오나드가 내 다리를 치료해주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의 손길이 얼마나 따스했는지까지도.
사소한 것에서도 자꾸만 레오나드를 찾으려고 들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내 앞에 자리를 잡은 에녹은 내 상태를 알아차렸던지 더는 같은 주제에 관해 묻지 않았다.
내 눈가를 가만히 보던 그가 손수건을 건넸다.
왜 그러는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하니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이 턱까지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까 그렇게 울고도 더 나올 눈물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서의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멜리오 백작가로 돌아갈 거예요?”
“……아니요, 백작가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어 에녹이 준 손수건을 거절하며 읊조리듯 답했다.
아멜리오 백작가에는 레오나드가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이미 아멜리오 백작가로 사람을 보냈을지도 몰랐다. 지금쯤이면 출발하고도 남았겠지.
‘저번에 왔던 속도를 생각하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아멜리오 백작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갈 거예요. 누구도 찾아올 수 없도록.”
“……로레이나.”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지 에녹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에녹의 도움을 받기로 했으면서도 그에게 지금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건지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기적이라는 건 알았다. 이건 에녹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레오나드에게도 해 주지 않은 말을 에녹에게 하기는 싫었다. 이미 그에게서 도망쳐왔으면서, 우습게도 그러했다.
앞으로 그 얼굴을 볼 낯이 없음에도 말이다. 나는 그렇게 또 에녹을 거부했다.
내가 설명해 주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에녹, 미안하지만 대답해 줄 수가 없…….”
“나는 어때요.”
내 말을 끊은 에녹이 고개를 숙였다.
그 상태로 한참을 있던 에녹이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망칠 곳이 필요하다면, 나는 어떠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