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아…….”
나는 차마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삼켰다. 에녹에게 팔이 붙잡혀 있어서는 아니었다.
잊고 있었던 날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색이 바랜 지 오래인 녹색 잎사귀가 손에 쥐어졌던 그 날이.
“황궁에 있기 싫어서 도망친 거라면 나한테 와요.”
“…….”
“내가 지켜줄게요. 그 정도 능력은 있어요, 나.”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저 지켜주겠다는 말은 데프론 공작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지.
“무슨 일 때문인지 묻지 않을게요. 당신이 이렇게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손을 그러쥐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 손을 붙잡고 있던 에녹이 나직이 입을 뗐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게 해 줘요.”
“…….”
“당신이 예전에 내 목숨을 구해 주었던 것처럼.”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언제나 싱그러운 녹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녹이 하는 말은 단순한 사랑 고백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제 아버지가 죄 없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될 것이 유력한 나에게 지켜주겠다는 말은 하는 건 데프론 공작과 다른 길을 걷겠다는 뜻이었다.
말이 쉽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다. 나는 메리나 길버트가 그랬어도 견디기 힘들었을 테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대로 그냥 에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까?
‘그러면 지금보다는 편해질지도 모르는데.’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가 다시금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선언이라도 하듯 경건한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언제든 말해요. 당신이 원하면 바로 데리고 도망칠 수 있으니까.”
“…….”
“당신은 알겠다는 말만 해 줘요. 아니, 그냥 고개 한 번만 끄덕여주어도 돼요.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더없이 로맨틱한 말이었으나 나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녹의 눈을 피했다.
예전 기억이 또 머릿속을 비집고 올라왔다.
‘무슨 일 있으면 내 이름 크게 불러.’
‘뭐야, 그럼 구하러 와주기라도 할 거예요?’
‘물론이지. 뭐든 하겠다고 했잖아.’
‘…….’
‘언제든 불러. 그게 어디든 내가 찾아갈 테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꾸었던 꿈까지 생각하니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저는…….”
나는 입을 열었음에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이 해야 할 말을 내뱉지 못하고 달싹였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에녹은 이내 되었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내 머리 위에 큼지막한 손을 한 번 얹었다.
“……잘 자요.”
그 말을 한마디 남긴 채 발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금 닫혔다.
누군가가 몸을 쑤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피곤했지만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또 아까와 같은 꿈을 꾸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렇게 뜬 눈을 지새운 채 밤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메리와 나는 일어나자마자 곧장 산사태가 발생한 장소가 어딘지 알아보았다.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고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에녹도 합류한 다음이었다.
“그럼 갈까요?”
에녹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행동이었으나 묘한 차이는 있었다.
움직임이 크고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의도적으로 밝은 척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아무래도 에녹은 어제 일을 언급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앞으로 움직이기에 그편이 좋다는 것을 알았고, 나 역시 에녹이 그렇게 해 주는 편이 훨씬 편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또 에녹만 고생하는 건데.’
머리가 복잡해져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까부터 가슴 한구석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차라리 화라도 내지.’
이럴 거면 왜 애초에 자기 도움을 받은 거냐고. 거절할 거였다면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바보 같아.”
“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어리둥절한 얼굴인 메리를 뒤로하고 나는 에녹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에녹은 한참 산지기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지금 산사태 때문에 난리도 아니라 볼 것도 없어요. 관광하러 오신 거라면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관광하러 온 게 아니네. 산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조사하러 온 거지.”
“……조사하러 오셨다고요?”
산지기가 미심쩍은 얼굴로 에녹 뒤에 있는 나와 메리를 훑었다.
하긴, 지금 이 인원으로 조사하러 왔다는 말은 믿기 어렵겠지.
힘을 쓸 줄 아는 것도 에녹뿐이고 메리와 나는 가다가 산사태 여파에 휩쓸리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산지기가 곧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그냥 돌아가세요! 괜히 통과시켜드렸다가 일 터지면 나중에 저만 곤란해집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자네가 책임을 질 일은 없을 거야.”
“그건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당신이 잘못되면 당신은 몰라도 당신 주변 사람들은 제 탓을 할 테니까요.”
“…….”
“……그리고 보아하니 평범한 집 자제분들 같지는 않으신데 험한 일 당하시지 말고 그냥 돌아가세요.”
“혹시 돈이 필요한 거라면 얼마든지 챙겨주겠네.”
“됐습니다.”
더는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산지기 다시금 손을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완강한 태도였다.
설마 산지기한테 막혀서 못 들어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안 되겠다. 내가 가서 말해야겠어.
“저, 잠깐만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손을 살짝 들며 에녹의 옆으로 나섰다.
산지기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한 것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아까부터 꽁꽁 싸매고 있던 로브의 후드 부분에 손을 올렸다.
‘아까부터 좀 덥기도 했고. 그냥 벗지, 뭐.’
산지기가 우리를 통과시켜 주지 않는 이유는 혹시라도 우리가 잘못될까 봐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면 된다.
‘이종족이라는 것을 밝히면 들여 보내줄지도 몰라.’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건 이 세계에서 생각보다 큰 의미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으로 그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사실 나는 기억력이 월등하게 좋다는 것 외에는 인간들과 다를 것이 없지만.
‘……그런 의미에서 정말로 신의 축복을 받은 건 레오나드지.’
레오나드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어젯밤 꿈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이런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지. 어떻게든 단서를 찾아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자.
그대로 후드를 잡고 벗으려는데 에녹이 재빨리 손을 뻗어 나를 만류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제 신분을 밝히려고요. 분홍빛 머리는 흔하지 않으니 아마 바로 알아볼 거예요.”
“……미쳤어요? 절대로 안 됩니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내가 후드를 벗을까 걱정한 것인지 에녹이 양 손목을 잡아챘다.
그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로레이나, 지금 황궁에서 도망 나온 거 아니었어요? 폐하께서 보낸 사람들을 피해 다니고 있는 거 아닙니까?”
“맞아요.”
“그런데 지금 왜 이러는 거예요? 여기서 정체라도 밝히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요?”
“……알아요. 제가 여기 있다는 게 소문이 나겠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로레이나 아멜리오’는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이종족이에요.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당신을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에녹이 내 후드를 더 꽉 여미며 허리를 숙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은색 머리칼이 이마에 닿아 간지러웠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많아요, 로레이나.”
“…….”
“특히나 여기 사람들은 산사태로 생계를 잃어 돈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 태반이라고요.”
에녹이 심각한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하긴 하겠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을까?
지금 저 산에 들어가서 얼마 전부터 내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 원흉을 잡아낼 방법이.
잠시 고민했고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에녹을 보며 살짝 웃자 그가 안심한 듯 내 팔을 잡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곧장 후드를 벗어던졌다.
안에 감춰져 있던 굴곡진 분홍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날리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내 모습을 본 산지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허락해 주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날 보호하면서 저 안에 들어갈 방법은.
* * *
내가 로레이나 아멜리오인 것을 안 산지기가 허락을 한 지도 일주일째.
산을 수색한 지도 그만큼이 되어가지만 뭐 하나 제대로 건진 것은 없었다.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문제인 건…….
“……백작님, 아무래도 에녹 님이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
내 옆에서 걷던 메리가 앞장서서 산을 오르는 에녹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일주일 전, 내가 산지기에게 신분을 밝힌 이후로 에녹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조심해야 한다고 걱정해 주자마자 후드를 벗어던지는 꼴이라니. 나 같아도 화나겠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오나드가 연관된 일이다.
만약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이 마법과 연관된 것이 맞는다면, 엘레노아의 일기장 속 이사벨이 그 ‘이사벨’이라면 분명 레오나드에게 피해가 갈 테니까.
이미 나 살겠다고 레오나드의 운명을 비틀어놓은 마당에 그를 더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에서 뭘 찾는 건가요?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아니, 분명 뭔가 있을 거야.”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라도 있어요?”
이유라. 메리를 이해시키려면 처음부터 다 말해 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메리라도 그건 좀 힘들지.
“그게 좀 설명하기 어려워서…….”
“꺄악!”
말을 끊고 들린 난데없는 비명에 고개를 돌리자, 발을 헛디딘 듯 메리가 바닥에 박혀 있는 돌을 붙잡은 채로 매달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 뒤는 꽤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저기로 굴러떨어졌다간 어디 하나 박살이 날 것 같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네, 괘, 괜찮아요.”
“좀만 기다려! 곧 올려줄 테니까.”
메리의 손을 잡으며 힘을 줬다. 하지만 힘이 약했던 탓에 메리를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어떻게 하나 쩔쩔매고 있을 때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옆으로 살짝만 비켜봐요.”
왼쪽으로 조금 움직이자 그 옆에 자리를 잡은 에녹이 내 손 위로 손을 겹쳐 메리를 힘주어 당겼다.
앞서 내가 했던 것과는 달리 강한 힘으로 당기자 메리가 천천히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만 가면 무사히 올라올 수 있…….
빠지지직-.
순간,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에 나는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메리가 딛고 있는 곳은 멀쩡했다.
그러면 이 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난거지? 설마 내 아래는 아니겠지.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밑으로 내린 나는 갈라진 땅을 보자마자 깊은 한숨을 터뜨렸다.
아, 환장하겠네.
“로레이나!”
내 손을 놓친 에녹이 다시금 손을 뻗을 새도 없이 나는 메리의 옆으로 나란히 미끄러졌다.
산사태로 지반 자체가 약해진 상태였던 것 같았다.
‘하긴 그동안 아무 사고도 없었던 게 운이 좋았던 거지.’
저한테 몸을 의지한 채 매달려있는 메리를 차마 놓을 수 없었던 에녹은 재빨리 메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메리가 무사히 올라간 것을 확인한 시선이 나에게로 닿았다. 에녹이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아요! 조금만 올라오면 돼요.”
“……저, 에녹, 그게 안 될 것 같아요.”
“무서워하지 말아요. 내가 꽉 잡을 테니…….”
“아니, 그게 아니라……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떨어지면서 또 다친 모양인지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에녹이 손을 뻗은 곳까지 올라가기에는 무리였다.
이놈의 다리는 왜 이렇게 안 나아. 아무리 많이 돌아다녔어도 그렇지.
“그냥 아예 내려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밑에 얌전히 있을 테니까 구하러 와줘요. 분명 돌아오는 길이 있을…….”
“메리,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하나?”
내 말을 끊은 에녹이 난데없이 메리에게 물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메리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며칠 동안 다녔던 길이잖아요.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면 가서 도와줄 사람들 좀 불러와 줘.”
“에녹 님은 어떻게 하실…….”
메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녹이 몸을 던져 내가 있는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던 상황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갔다.
“미쳤어요? 그러다 잘못되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자 에녹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속삭였다.
이제야 자신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냐는 듯 조금은 통쾌한 얼굴이었다.
“그럼 똑같이 미친 짓 한 거니 이제 비긴 것으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