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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67화 (67/144)

#67화

메리를 다시 마을로 보낸 에녹이 나를 안은 채 조금 더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에녹에게서 떨어졌다.

물론 곧바로 휘청이는 바람에 금방 다시 에녹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앉아서 기다릴까요?”

“네, 그래요.”

에녹에게 기대서 서 있는 것보다는 땅바닥에 앉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곧장 주저앉은 에녹이 깔고 앉으라는 듯 제 겉옷을 자신의 옆에 두고는 손으로 몇 번 두드렸다.

“됐어요. 옷 더러워져요.”

“이미 땅바닥에 깔아서 더러워졌습니다. 그냥 앉아요.”

“지금은 좀 털면 되겠지만 제가 앉으면 그걸로는 안 될……. 어라?”

뭔가 차가운 것이 볼에 닿은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볼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잠시 그렇게 반복되던 느낌은 곧 투두둑- 하는 제법 큰소리로 변했다.

이윽고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제는 비까지 오는 거야? 오늘 진짜 일진 더럽네.’

이대로는 쫄딱 젓겠다는 생각에 다급히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았다.

근처에 버려진 오두막이나 나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산사태가 났으니 아마 그것도 다 쓸려나가고 없겠지.

낙심하고 있을 때 에녹에 나를 안으며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어요. 들어가서 비 좀 피해요.”

“……뭐라고요?”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정말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집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아랫마을까지 피해를 볼 정도로 산사태가 크게 났다고 들었는데?

“에녹, 아까 산지기가 산에는 아무도 안 산다고 하지 않았나요? 여기 돌아다닌 지가 일주일째인데 이런 곳은 처음 봐요.”

“누가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굳이 말하지 않았겠죠. 그리고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있지는 않잖아요.”

“……그럴까요.”

의아한 마음에 잠시 생각하는 사이 에녹이 오두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올 때 보았던 집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매우 깔끔했다.

에녹은 근처 의자에 나를 앉히고는 제 옷과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나는 에녹이 겉옷으로 감싸 준 덕에 그리 많이 젖지 않아서, 물기를 터는 대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좀 훑어보았다.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집의 바닥 가운데에는 오래된 디자인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에는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그림과 문양들이 가득했다.

본래 침대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는 웬 커다란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진한 갈색의 상자는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크기였다. 상자는 누가 손을 대기라도 한 것처럼 뚜껑이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꼭 사람이 방금 안에서 나온 것 같은 모양새에 어쩐지 조금 소름이 돋았다.

꼭 관에서 시체라도 나온 것 같…….

‘에이,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낯선 곳에 고립되어 있으니 별 괴상한 생각이 다 드네.

메리가 사람들을 부르러 갔으니 곧 여기서 나갈 수 있겠지.

그렇게 많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산 입구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니 아마 금방 올 것이었다.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의자 옆에 있는 협탁을 손으로 쓸었다.

‘예상보다 되게 부드럽네. 겉보기에는 꼭 까끌까끌할 것 같이 생겼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에 멈칫하고는 손을 들어 살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새하얀 손바닥을 보자 위화감이 들었다.

‘왜지?’

……먼지가 하나도 안 쌓여 있어.

여기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도, 그리고 바닥에도 작은 먼지 한 톨도 묻어 있지 않았다.

산사태 때문에 꽤 오래 방치되었던 곳일 텐데?

아까 산지기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산사태가 난 이후로 산에 들어온 이는 우리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로 지은 집인 것처럼 깨끗한 상태에 으스스 몸이 떨렸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엘레노아의 일기장.’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여기가 바로 내가 찾던 곳이라는 것을.

* * *

갑작스러운 비는 황궁에도 꽤 큰 영향을 끼쳤다.

레오나드가 회의실에서 집무실로 이동하는 길에 뚝뚝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어느새 그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혹시라도 레오나드가 젖을까 안절부절못하던 제럴드는 우선 비를 피할 만한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긴 뒤 주변에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요즘 레오나드의 신경이 부쩍 날카로워진 탓에 제럴드와 다이아나를 제외한 사람을 모두 물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럴드는 재빨리 뭔가를 적은 뒤 그것을 레오나드의 손에 쥐여주었다.

“저 우산 좀 가지고 오겠습니다! 혹시 잊어버리실까 봐 여기 적어놓고 가요!”

말을 마친 제럴드는 곧장 빗속으로 뛰어갔다. 레오나드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손을 펴자 ‘우산 가지러 갔습니다’라고 빠르게 휘갈겨 쓴 글씨가 보였다.

그것을 보자 입안에서 옅은 한숨이 터졌다. 몇백 년간 꾸준히 해 왔던 일임에도 그러했다.

“하아…….”

로레이나가 떠난 후 며칠. 레오나드는 그동안 자신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했음을 몸소 실감하고 있었다.

잠깐 떨어져 있는 것 정도야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레이나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보고 싶어.’

눈을 감으면 눈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투정을 부리던 모습이 저절로 생각이 났다.

이제는 옆에서 로레이나가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리는 지경이었다.

온몸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속을 다 빼버리고 남은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가끔은 자신이 살아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지라 레오나드는 잠시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앞으로 한걸음 디뎠다.

검은 머리칼 위로 빗물이 우수수 쏟아졌다. 거세게 내리는 비에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그제야 레오나드는 비로소 조금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것이 ‘살고 싶어졌다’라는 뜻은 아니었다.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로레이나가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미치겠네.”

다시금 눈앞에 아른거리는, 로레이나가 제게로 뛰어오는 달콤한 잔상에 레오나드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식사를 2인분 준비하라고 이르고 집무실에 있는 로레이나의 책상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무심코 로레이나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그녀가 옆에 없는 것을 간과하고 메모를 하지 않아 업무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황궁에 있지도 않은 로레이나가 일기장 업무를 하러 오기를 기다리며 뜬 밤을 지새우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레오나드의 일상은 삐거덕거리며 점차 어긋나가고 있었다.

“완전 구제 불능이군.”

한 달도 못 버텨서 이 꼴이라니. 오늘이 로레이나가 떠난 지 며칠째였더라.

레오나드는 비 때문에 흐릿한 시야에도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했다.

아니, 사실 비는 그의 생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로레이나를 만나기 전 그의 세상은 늘 이러했으니.

그런데도 레오나드는 좀처럼 생각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레오나드가 핏줄이 벌겋게 선 눈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초조함에 물어뜯은 손톱은 어느새 상한지 오래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다가온 제럴드가 레오나드를 부축하며 우산을 씌웠다.

제럴드가 저렇게 감정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보아하니 제 상태가 심각하긴 한 모양이라며 레오나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조차 안이 텅 빈 웃음이었다. 입가에 띤 미소는 땅에 떨어져 바스라지는 낙엽인 양 나약했다.

“아무래도 침대에 누워서 좀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됐어. 집무실로 간다.”

“제대로 못 주무신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갑니다. 제발 주무세요.”

제럴드의 부탁에도 레오나드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누워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었다.

누우면 로레이나가 일과를 조곤조곤 읊어주던 기억이 떠오를 것이 뻔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로레이나와의 추억이 또다시 불쑥 머리를 비집고 올라왔다.

‘너무 잘 기억하는데요? 레오나드 사실 제가 필요 없었던 거 아니에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휘어지는 푸른 눈.

평소와 같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던 로레이나가 언젠가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부담을 줄까 싶어 목 뒤로 애써 삼켰지만, 사실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아니라고.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이걸 지금 말한들 다 무슨 소용이라고.’

레오나드가 고개를 숙이며 헛웃음을 토해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탓에 머리는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거른 탓에 몸이 상했지만 레오나드는 일부러 몸을 치료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로레이나가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로레이나는 어쩌고 있지?”

“일주일 전에 수도 북부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유는 알아봤어?”

“그걸 모르겠습니다. 산에서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것 같다고는 하는데 그게 뭔지까지는…….”

로레이나가 굳이 산사태가 일어난 지역에 간 이유가 뭘까.

몰래 달아난 마당에 귀족 회의에 나온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간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럼 그렇게 급히 떠날 만큼 개인적으로 알아볼 것이 있었다는 건데.’

갑작스레 든 불안함에 레오나드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혹여나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에녹 데프론은 아직도 동행하고 있나?”

레오나드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제럴드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레오나드가 나직이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이 북쪽에 있을 로레이나를 찾아 헤매었다.

로레이나가 에녹과 있는 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에녹의 검술 실력은 상당하고 들었으니 그가 로레이나의 옆에 있는 한 위험해질 가능성이 좀 줄어들 테니까.

‘에녹 데프론이 로레이나가 위험해지게 놔두지도 않을 거고.’

로레이나의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몸을 휘감았다.

솔직히 말해 저와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는 이가 로레이나의 옆에 내내 붙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오나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곁에 있을 수 없는 지금, 믿을 것은 에녹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아서 안심이네.”

“저, 그게…… 그렇다고 마냥 마음 놓고 있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있어?”

레오나드가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몸을 바르르 떨며 물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어지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멜리오 백작이 산사태가 일어난 곳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

“그리고 더 심각한 건…… 그 이야기가 어제 데프론 공작에게도 들어갔다는 보고가……. 폐하!”

제럴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레오나드는 그대로 실체화하여 하늘을 날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드래곤에 황궁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을 들으며 한숨을 내쉰 제럴드는 재빨리 로레이나의 주위에서 그녀를 보호하고 있을 이들에게 전할 말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때가 된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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