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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75화 (75/144)

#75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레오나드는 놀란 듯했다. 안 그래도 뻣뻣하던 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로레이나, 잠깐…….”

잠깐 떨어진 입술 사이로 나온 말도 다 삼켜버렸다. 레오나드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레오나드는 곧 내 양 볼을 감싸며 다급하게 입을 맞췄다.

조급한 몸짓과 달리 입맞춤은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달게 입을 맞추던 레오나드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움찔하자 레오나드가 나를 달래듯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기다랗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길고 하얀 손가락을 타고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에는 감각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것마저 부끄럽고 간지럽게 느껴졌다.

한참이나 내 머리카락을, 볼을, 그리고 이어서 귓바퀴를 매만지던 레오나드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내 허리를 감았다.

몸이 번쩍 들렸고 나는 어느새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주도권이 레오나드에게 넘어갔음을 알리듯 그가 내 위로 올라탔다.

그 와중에도 입술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기에 젖은 소리가 방 안을 울릴 무렵 입술을 느릿하게 훑던 부드러운 살덩이가 허락을 구하듯 맞닿은 입술 사이를 농밀하게 쓸었다.

나는 입안으로 들어오는 거친 숨결을 기꺼이 환영하며 조금 더 입을 벌렸다.

레오나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금 더 깊이 입술을 내렸다.

분명 아까 치유력으로 레오나드의 열이 다 내렸던 것 같은데 왜 이리 몸이 뜨거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덥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레오나드의 목에 두른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오가는 체온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달콤했다.

“으음…….”

몸이 나른해지고 입술 사이로 한숨 섞인 옅은 신음이 터졌다.

그에 레오나드가 애끓는 음성으로 ‘젠장’ 하고 짓씹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갈급해진 몸짓으로 그가 다가왔고 나는 그것을 버거워하면서도 열심히 따라갔다.

조금이라도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지나서야 레오나드는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내게서 살짝 멀어졌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건 레오나드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꽤 뜨거워진 숨이 내 입가에 닿았다.

“하아…….”

“후…….”

정신을 차리니 머리는 이미 잔뜩 흐트러진 지 오래였고 어느새 살짝 풀려 있는 드레스 앞섶 사이로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몽롱한 눈빛으로 레오나드를 보자 나를 안은 채 내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눈동자에 한가득 담겨 있던 커다란 무언가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그런데도 미처 가두지 못한 욕망이 흘러나와 그의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무언가를 인내하는 듯 레오나드의 손 아래 깔린 시트가 거칠게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가 내 이마 한가운데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때와 비슷한 행위였지만 느낌은 현저히 달랐다.

그 간단한 행동에도 숨기지 못한 진득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레오나드는 담백한 말투로 내게서 멀어졌다.

“……피곤할 텐데 이만 자. 일어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가려고요?”

“응, 시간도 많이 늦었으니까. 옆방에서 잘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면 돼.”

“옆방이라면…….”

“문 열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방. 그리고 문 앞에 기사들도 대기하고 있을 거야.”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감싼 온기가 사라지자 조금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비가 오고 밤이 되었다고 한들 전혀 그런 계절이 아닌데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레오나드의 옷자락을 손에 쥐었던 것은.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로레이나, 내일도 같이 있을 수 있…….”

“나는 지금 같이 있고 싶은데.”

투덜거리며 뱉은 말에 레오나드가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내 곁으로 다시금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이불을 내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레오나드는 내 상체가 이불에 완전히 가려지자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긴 한데 너 쓰러졌다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잖아.”

“그냥 기절 잠을 잔 거예요. 고작 몇 시간 잔 거 가지고…….”

“고작 몇 시간이라니. 너 꼬박 하루를 통으로 쓰러져 있었어.”

그런 레오나드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리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랐다.

아니, 하루를 통으로 쓰러져 있었다니?

“……제가 하루 동안 기절해있었다고요? 몇 시간이 아니라?”

“그래, 어젯밤에 습격을 받은 후에 기절해서 지금 일어난 거라고. 그러니 좀 쉬어야 해.”

레오나드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화제가 이쪽으로 전환된 것이 어쩐지 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잔뜩 얼굴을 구기며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들어.’

왜 자꾸 돌아가려고 하지?

레오나드는 내가 이대로 쉬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나는 아니었다.

하루를 꼬박 기절해 있었던 건 놀랍긴 하지만 그리 기겁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요즘 연이어 터진 안 좋은 일로 인해 내 몸이 허약해졌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다리도 이렇게 회복이 더딘 게 아니겠어?’

어제 산에서 뒹군 것을 고려하더라도 내 다리는 좀 심각한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휴식이 아니라 레오나드였다.

어차피 레오나드가 옆에 있으면 휴식을 취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레오나드가 금세 몸을 회복시켜 줄 텐데. 다리도 치유해 줄 테고.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아까 한 그 달콤한 고백의 여운을 더 느끼고 싶단 말이야.

나는 레오나드에게 최대한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에 레오나드는 잠시 멈칫하는 기색이었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호. 이래도 안 된다 이거지?

연이어 거절당하자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나는 잡고 있던 옷자락을 손에서 놓는 대신 레오나드의 손가락을 잡았다.

갑작스레 닿은 온기에 레오나드가 움찔 몸을 떨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엄청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게…….”

“그리고 혼자 있는 거 무섭단 말이에요. 같이 있어요.”

“앞에 기사들도 있…….”

“내가 같이 있고 싶은 건 레오나드란 말이에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잡은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나는 지금도 내일도 모레도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레오나드는 아닌가 보네요.”

“하아…….”

결국 레오나드가 항복하며 깊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음이 복잡한 듯 내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헤집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너랑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다고.”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마주친 눈이 평소와 다르게 짙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갈증이라도 난 듯 잔뜩 갈라진 음성이 들려왔다.

“……솔직히 말할게. 내가 지금 반쯤 제정신이 아니어서…… 더 같이 있으면 못 참을 것 같아.”

“…….”

“그러니까 오늘만 봐줘. 응?”

제 감정을 보이기 싫은 듯 레오나드가 제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애원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었다.

“봐주기 싫다면요?”

“그러면 남은 소원권 하나 써서라도…….”

“소원권 하루에 두 번 사용은 거부합니다. 안 돼요. 그리고 이제 한 장 남았는데 좀 더 중대한 순간을 위해 아끼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나한테는 지금이 제일 중대한 순간이야.”

진심인 듯 말을 내뱉는 음성이 제법 단호했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쉬던 레오나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 필요하면 나중에 기회 봐서 하나 더 만들면 되지.”

“네?”

“그때 그 디저트, 다시 먹고 싶지 않아?”

……이 사람이?

당당하게 하는 말에 눈을 흘기자 레오나드가 손가락 사이로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내가 예뻐서 봐준다, 진짜. 얼마나 간절하면 저렇게까지 말하나 싶기도 하고.

나는 곤란한 기색인 레오나드를 보다가 이제 슬슬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기로 했다.

사실은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그래서 잠깐 부려본 욕심이었다.

레오나드가 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천천히 레오나드의 눈을 가린 손을 잡아 내렸다. 드러난 눈빛이 태양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그 시선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웃었다. 그 역시 내가 바라던 바였으므로.

“아무래도 봐주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제발…….”

“나는 레오나드랑 밤새 같이 있고 싶어서, 보내주기 싫거든요.”

사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엘레노아의 일기장, 데프론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보물 그리고 산속에서 발견한 이상한 오두막.

하지만 잠시 묻어두고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이 먼저였다.

“그래서 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

“그럼 같이 있어 주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레오나드가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물어본 말에 대한 답은 없었다. 아니, 이미 이어지는 행동으로 답을 들었다. 몸을 감싸던 이불이 툭 하고 떨어졌다.

거친 몸짓에 옷자락이 침대 시트를 스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불쑥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무엇을 입었는지, 내 몰골이 어떠한지 같은.

어쩐지 기대했던 예쁜 첫날 밤과는 좀 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급하게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레오나드의 어깨를 감싸며 작게 중얼거렸다.

“좀 더 예쁜 옷을 입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며칠 몸도 안 좋아서 얼굴이 좀 창백한 거 같기도 하…….”

“그런 거 상관없어.”

어느새 내 뺨으로 올라와 짧게 입을 맞춘 레오나드가 입술을 떼지 않은 탓에 다소 뭉개진 발음으로 읊조렸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또렷하게 들렸다.

“넌 언제나 예뻐. 볼 때마다 안달이 날 만큼.”

그게 마지막이었다.

레오나드와 나 사이에는 더 이상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깊게 입을 맞추었다.

큼지막한 손이 내 뒷덜미를 감싸고 숨이 진득하게 얽혔다.

내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레오나드의 말이 맞았다. 그런 건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오로지 레오나드와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길고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레오나드에게 잠식되었고 때때로 그를 짓누르며 내게로 끌어당기기도 했다.

생전 처음 맛보는 환희에 잠겼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서로에게로 침잠했다. 눈물이 왈칵 치밀 정도로, 아주 완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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