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76화 (76/144)

#76화

“흐으음…….”

지쳐서 잠든 로레이나가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벌써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기에 로레이나도 꽤 늦게 잠든 편이었으나 레오나드는 그 이후에도 좀처럼 눈을 감지 못했다.

물론 오늘 잠들지 못한 이유는 로레이나 없이 황궁에 홀로 남겨졌을 때와는 달랐다.

늘 굳어 있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레오나드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내렸다.

레오나드 바로 옆에 있는 베개 위에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웠던 모습에 레오나드가 머리카락의 구부러진 방향을 따라 손가락에 감았다가 느릿하게 풀었다.

손에 만져지는 감촉이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 속에서 저와 같은 향이 나는 것이 좋았다.

다른 곳을 놔두고 머리카락만 매만지는 건 지난밤, 아니, 조금 전까지도 힘들어하던 로레이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드, 그만요!’

‘제발…… 더는 안 돼요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달콤한 색채인 속눈썹을 깜빡이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말을 길게 늘이며 애원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에 레오나드는 어쩐지 몸속의 열기가 더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를 놓아주었다.

같이 있을 시간은 앞으로도 많았으므로.

그렇게 레오나드가 지난 시간의 여운에 젖어 있을 때였다.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놓쳤습니다.”

문밖에서 보고하는 기사의 목소리에 레오나드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로레이나가 깰까 싶어 살폈으나 다행히도 그녀의 얼굴은 아직 평온했다.

“도망친 놈이 셋인 걸로 아는데. 다 놓쳤나?”

“둘은 도망치던 중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자결하였습니다.”

“그럼 놓친 건 하나군.”

“……죄송합니다.”

“되었다. 붙잡아둔 한 놈은 어쩌고 있지?”

“아직까지도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황궁으로 이송해서 제대로 심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라…….”

아이작 데프론이 이미 쓸모를 다한 제 편을 구해 주는 이는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참 대단한 충성심이었다.

레오나드의 시선이 어젯밤 로레이나의 목에 길게 나 있던 상흔의 잔상을 훑었다.

불그스름한 눈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진득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미처 조절하지 못한 살기가 방 안에 짙게 내려앉았다.

“흐읏…….”

그것을 느낀 것인지 로레이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몸을 뒤척였다.

그 미약한 음성에 레오나드는 재빨리 제 기운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이미 잠에서 깨버린 로레이나를 다시 재우기에는 늦었던 모양이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눈꺼풀을 보던 레오나드가 서둘러 문밖의 기사를 돌려보낸 후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로레이나가 완전히 눈을 떴다.

언제나 레오나드를 애타게 만드는 반짝이는 푸른빛에 그것을 물끄러미 보자, 부끄러웠는지 로레이나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레오나드는 머릿속에서 아직 지우지 못한 상처를 떠올리며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촘촘히 입을 맞추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붉게 달아오르는 피부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스스로도 놀랄 만한 인내심으로 그것을 떨쳐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았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레오나드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돌아가자.”

짧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것이 죽을 각오를 하고 황궁을 나선 로레이나에게 어떤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로레이나는 아무런 말 없이 레오나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혹여나 거절하려나 싶어서 그가 초조해하던 순간, 로레이나가 해사하게 웃었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사랑해요.”

물어본 말과 상관없는 말이었으나 어떻게 보면 가장 올바른 답이었다.

그 안에 가득 담긴 진심에 레오나드가 다시금 입술을 내렸다. 어느새 맞닿아 있던 손가락이 얽혔다.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하아암…….”

“백작님, 잠 못 주무셨어요?”

메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에 나는 하품을 하던 것을 멈추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 응. 아무래도 일이 좀 많았으니까 생각이 많아져서.”

“하긴, 그러실 만해요. 저 그때 옆방에 있었는데도 어찌나 무섭던지. 손발이 다 떨리더라니까요.”

메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기운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팔을 쓸었다.

심히 양심에 찔렸지만 애써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

‘레오나드가 아침까지 놔주지 않아서 못 잤다고 어떻게 말해.’

참지 않아도 된다고 말은 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머릿속을 스치는 지난 밤의 광경에 얼굴에 열이 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레오나드가 치료를 해 준 덕에 상태는 지금까지 중에 제일 좋았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아무도 모를 거다. 물론 밤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알겠지만……. 하, 더는 생각하지 말자.

“그나저나 생각보다 방 난방이 잘 되어서 놀랐어요. 아침에 이 방에 들어오는데 너무 후끈거려서 더울 정도였다니까요?”

“…….”

“분명 폐하께서 백작님이 아프신 걸 알아서 여관에 부탁하신 거겠죠?”

“그렇겠지?”

……메리가 눈치를 못 채서 다행이었다.

나는 아침에 서둘러 돌려보낸 레오나드가 있는 방 쪽을 힐끗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몇 발자국 걷자 내 뒤에서 그것을 보던 메리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엇, 백작님! 다리가 다 나으셨네요? 어제만 해도 절뚝거리시더니.”

“…….”

“그러고 보니 목덜미 상처도 없어지셨고!”

“…….”

“꼭 생명의 신이 치료해 준 것 같아요! 역시 신의 축복!”

“…….”

“정말 대단하네요. 이번에도 그것 때문에 빨리 나으신 것 맞죠?”

……눈치 못 챈 거 맞겠지?

나는 새빨간 얼굴을 숨기며 대충 그렇다고 답을 하고는 방을 나갈 준비를 했다.

혹시라도 뭔가를 더 물을까 봐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 * *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엘레노아의 일기장과 오두막에 관한 이야기였다.

레오나드에게 말해서 오두막에 같이 가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건 너무 위험했으니까.

내 예상대로 그곳이 마법과 관련된 곳이 맞는다면, 엘레노아의 일기장에 나온 인물이 정말로 그 ‘이사벨’이 맞는다면 나와 레오나드에게 결코 좋은 곳일 리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는데 그냥 가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커.’

레오나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럴드에게 말해서 그쪽으로 사람들을 보낼게.”

“맞는 사람들이 있나요?”

“헨티슨 가문에 마법에 관해 연구하는 이들이 있어. 혹시라도 저주를 풀 방법을 알 수 있을까 해서 날 데려온 순간부터 대대로 이어서 하는 중이라고 하던데.”

“……와, 엄청 오래되었네요.”

레오나드를 데리고 왔을 때부터라고 하면 적어도 300년은 진행된 연구라는 말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가서 알아보면 무언가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진즉 말할 걸 그랬나.’

잠시 그런 후회가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오두막은 발견한 지 얼마 안 되었기도 하고.

“오두막을 살펴보고 온 후에는 일기장도 봐 달라고 하자. 그것도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왜 갑자기 글자들이 사라진 건지.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레오나드가 잠시 숨을 삼켰다.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이사벨에 대한 것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사벨. 레오나드에게 저주를 건 여자.

도대체 얼마나 원한이 깊길래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이렇게 그를 괴롭히는 걸까.

정말 단순히 칼리드를 사랑했기 때문일까. 솔직히 잘 이해는 가지 않았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걸까. 불쑥 든 생각에 고개를 살짝 들어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레오나드가 만약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이미 수없이 떠올려 본 가정이었다. 레오나드에게는 셀리아라는 본래 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때문에 레오나드나 셀리아를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슬프고 괴롭기야 하겠지. 어쩌면 레오나드를 원망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복잡해진 기분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자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면 갓난아기한테 저주를 걸지도 않았어.”

“…….”

“자책하지도 말고. 설사 일기장에 나온 인물이 그 이사벨이 맞는다고 해도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엘레노아 님도 그럴 거야.”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너 같으면 자식에게 전해 주라고 한 물건에 자신의 과오를 그렇게 자세하게 적어놓았겠어?”

“그건 그렇네요.”

레오나드의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일기장은 엘레노아가 로레이나에게 주라고 남긴 물건이었으니까.

내 얼굴이 한층 밝아진 듯 보이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레오나드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옆으로 건너왔다.

그 순간, 덜컹거리는 마차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쳤어요? 그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가뜩이나 길도 험한데.”

“그럼 4년 전처럼 네가 받아주면 되지.”

“이제는 너무 커버려서 그렇게 못 안아주거든요.”

“어젯밤에는 잘만 안아주던데?”

살짝 눈을 흘기자 장난스레 웃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기울여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제 머리 위에 기대게 했다.

꽤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으나 나쁘지는 않았다.

레오나드의 머리칼이 뺨을 간질이고 곳곳에 와닿는 온기가 좋았다.

그냥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레오나드가 손을 잡아 깍지를 끼며 물었다.

“다리는 괜찮아? 아직 안 나았으면 내가 마저 치료해 줄 수 있는데.”

“다 나은 거 어젯밤부터 계속 확인했잖아요. 왜 모르는 척 굴까.”

“그랬나. 기억이 안 나서 다시 확인하고 싶은데.”

딱 봐도 시꺼먼 속내가 가득한 말에 나는 눈앞에 보이는 정강이를 살짝 걷어찼다.

그에 레오나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됐죠? 완전 멀쩡하죠?”

“그러네. 완전 튼튼한데. 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어.”

“……한 대 더 쳐줘요?”

살짝 토라진 말투에 레오나드가 내 어깨에 뺨을 비비며 나를 달랬다.

그 행동에 이미 기분은 다 풀렸으나 나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며 시치미를 떼었다.

“어젯밤에 누구 때문에 잠을 못 자서 지금 좀 자야 할 거 같아요. 그러니까 들으면서 자게 이야기 좀 들려줘요.”

“갑자기? 나 이야기 잘 못 하는 거 알잖아. 그건 네 전문이면서.”

“아무거나 빨리요.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내가 그런 말 들으면 거절 못 할 거 아는 거지.”

“당연하죠. 나 사랑하잖아.”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돌려 둥글고 예쁜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곧 못 말리겠다는 듯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들으면서 자겠다는 내 말을 고려한 것인지 레오나드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레오나드의 이야기는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이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 들을 수 있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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