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77화 (77/144)

#77화

“로레이나, 도착했어. 이제 일어나.”

“으으음…….”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어 가늘게 뜬 눈 사이로 화려하고 낯익은 성들이 보였다.

‘정말 황궁으로 돌아왔구나.’

꽤 오랜만에 보는 황궁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물론 레오나드가 오는 것을 알았던 탓에 곳곳에 불이 켜져 있긴 했다.

하지만 늘 일기장 업무를 하느라 이 시간이면 레오나드의 방에 있던 내가 보기에 썩 익숙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이곳이 반가웠다. 꼭 여기가 내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묘한 기분에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늦어서 제럴드한테는 내일 말하려고 해. 어차피 지금 연락한다고 해도 깨어있지도 않을 거고. 괜찮지?”

“네, 괜찮아요.”

느릿하게 답한 후 벌써 일어나 마차 밖에 서 있는 레오나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이 안아달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아들은 레오나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자꾸 사랑스럽게 굴지.”

“팔 아픈데. 안 안아줄 거예요?”

“그럴 리가.”

마차 안으로 허리를 숙인 레오나드가 무릎 뒤로 팔을 넣어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혹시라도 떨어질세라 서둘러 레오나드의 목에 팔을 감았다.

따뜻한 품은 나른해진 몸이 안기기에 딱 좋았다. 나를 위해 꼭 맞춘 것처럼.

기분 좋은 느낌에 레오나드의 품에 파고들어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향기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몸이 본능적으로 더 편한 곳을 찾아 움직였다.

종국에는 레오나드의 목덜미를 찾아가 얼굴을 묻자 나는 그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난밤 내내 붙어 있었음에도 여전히 부족했던 향기에 자꾸만 더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곧 나를 안은 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한숨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탄성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계속 옆에 두고 싶어지잖아.”

“오늘 밤은 안 돼요. 너무 힘들어…….”

눈을 감은 채로 웅얼거리며 말했다. 레오나드의 치유로 인해 나름 쌩쌩한 몸과 달리 정신은 한없이 지쳐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휴식이 필요했다. 그것을 알았던지 레오나드가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게 움직여놓고 지치지도 않아? 진짜 인간이 맞긴 한가.

아, 맞다. 레오나드는 인간이 아니었지…….

점점 생각이 무의식으로 흘렀다. 그것을 눈치챈 레오나드가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마차에서 내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푹 자. 침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금 잠이 들었다.

그날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 * *

레오나드는 날이 밝자마자 제럴드를 불러 어제 이야기한 일을 지시했다.

명령은 빠르게 전달이 되었고 금세 수도 북부로 갈 사람들이 꾸려졌다.

생각보다 빠른 일 처리에 당황한 것은 나뿐이었다.

이게 이렇게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러나 놀랄 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빨리요?”

“다들 빨리 가고 싶다고 하거든요. 아무래도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입니다.”

집무실 책상 앞에 서서 레오나드에게 보고하던 제럴드가 앞쪽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럴드 말에 따르면 다들 뭘 해 볼 기회도 없이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던 사람들이라, 작은 실마리라도 잡은 이 순간을 매우 반기는 눈치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제럴드의 표정 역시 한결 밝아 보였다.

잘만 하면 산사태 문제도 같이 해결되는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그들이 제럴드의 일을 덜어준 셈이니까.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그렇게 해.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면 지원은 아끼지 않고 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개새…….”

거기까지 말하던 레오나드가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말을 정정했다.

“그 당장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을 인간은 어떻게 되었지?”

……도대체 뭘 바꾼 걸까. 저기요. 아까랑 별반 다를 게 없잖아요. 애초에 눈치를 본 이유가 뭔가요.

‘욕만 안 했지, 뜻은 더 심각해졌잖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날 바라보는 눈이 너무 반짝이고 있었다.

칭찬해 달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해사하게 웃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못 말린다니까.’

어차피 어떻게 말하든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레오나드가 말하는 사람이 나를 죽이려 했던 암살자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잘했다는 의미로 눈꼬리를 사르르 접자 레오나드가 만족스러운 듯 쿡쿡거렸다.

그런 레오나드의 모습이 잘 적응이 안 되는 듯 잠시 헛기침을 하던 제럴드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여전히 입을 열지 않습니다. 수도 북부에서와 같은 태도입니다.”

“좀 더 강하게 나가야 하나. 그러다 죽기라도 할까 봐 적당히 한 거였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곧 입을 열 것 같나?”

희소식을 반기듯 아까보다 높아진 음성에 제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입니다.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더라도 같은 태도일 것 같거든요.”

“왜지?”

“중간에 혀를 깨물고 죽으려고까지 했습니다. 일단 수면제를 먹여 잠을 재운 상태인데 언제 또 날뛸지도 모릅니다.”

또 죽으려고 했다고?

아이작의 수하들이 그 정도의 충성심을 보일 줄은 몰랐던 터라 좀 놀랐다.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제 사람들은 끔찍이 여기는 편인가?

‘아니야. 예전에 데프론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보니까 딱히 그렇지도 않았는데.’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레오나드도 마찬가지였던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과한데. 데프론 공작의 뭘 믿고 저러는 거지?”

“그게…….”

제럴드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그에 계속하라는 듯 레오나드가 작게 턱짓하자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잘 들을 테니까 어서 말해.”

“……제가 보기에는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무언가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제럴드가 감옥에 있을 암살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말끝을 흐렸다.

곧 무언가 떠올랐는지 갈색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조금 ……아니, 많이 기괴한 모습이었습니다.”

상상만으로도 께름칙한지 제럴드가 서둘러 팔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레오나드와 내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아마 이번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에녹이 말했던 ‘마법에 관련된 무언가’.’

혹시 아이작이 벌써 그 물건을 발견한 건가?

아니다. 그랬으면 그 물건을 이용해서 나를 죽였겠지. 암살자를 보낼 것이 아니라.

굳이 에녹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그 방법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그 물건을 찾긴 찾았는데, 발동 조건을 알지 못해서 못 쓰고 있는 건가?’

그래서 힘을 조금밖에 쓰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엘레노아의 일기장이라는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글자가 사라지는 바람에 얻은 것이 얼마 없는 것처럼.

제럴드가 전한 말로 인해 집무실 안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레오나드가 나직이 목소리를 내었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도록 해. 무슨 변화가 있으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제럴드가 몸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레오나드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왜 그래? 불안해서 그래?”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건 언제나 그랬으니까 이제는 꽤 덤덤했다. 어쩌면 죽을 위기를 넘기고 와서 그럴지도 몰랐다.

“그것보다는 그냥 뭔가 척척 진행되어가는 게 신기해서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뭐.”

“물론 아직 일이 해결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잖아요. 저 혼자 고민했을 때는 앞길이 막막했는데…….”

“네가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그 오두막은 네가 아니라면 아무도 몰랐을 곳이니까.”

“……그렇네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나드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확실히 털어놓으니까 낫지?”

“훨씬 나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이야기할 걸 그랬나 봐요. 물론 무서워서 그러지 못했겠지만.”

이상한 기분에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매번 나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 앓았는데 이걸 얼떨결에 털어놓자마자 술술 풀리는 느낌이라니.

“솔직히 아직도 잘 안 믿겨요. 정신을 차리면 모든 게 꿈일 것만 같아요.”

너무 행복해서 그렇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 비현실적인 느낌은 더했다.

‘이러니까 꼭 내가 소설 속 주인공 같잖아.’

복잡한 기분에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는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내가 앉아있던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졌다.

한 폭의 명화 같은 그 장면 역시 몹시 비현실적이라 레오나드를 올려다보며 눈썹을 늘어뜨리자 그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전부터 말했잖아 안 믿긴다고.”

“원래 너무 행복하면 이런 걸까요? 자꾸 누군가한테 빼앗길 거 같아서 불안해져요.”

그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던 레오나드가 조심스레 내 뺨을 감쌌다.

떨리는 시선이 그와 맞닿았다. 마주친 눈이 어쩐지 조금 뜨겁다는 생각을 할 때쯤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믿을 수 있게 해 줄까?”

언젠가 내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그 기억에 자연스레 눈이 감겼다. 그리고 마치 정해진 수순인 것처럼 레오나드가 다가왔고 입술이 맞물렸다.

다소 가볍게 닿았던 시작과 다르게 레오나드는 조급하게 굴었다. 애원하는듯한 행동에 붙어 있던 입술이 열렸다.

뜨거운 열기가 입술 안으로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느릿하게 입안을 훑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움찔거리며 잘게 몸을 떨었다.

레오나드의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쌌다. 나는 어느새 등을 소파에 댄 채 누워있었다.

그 위를 아무렇지 않게 점령한 레오나드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코끝에 레오나드 특유의 시원한 향기가 맴돌았다. 그가 고개를 비틀자 더는 생각을 이어나가기 어려웠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고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것은 레오나드도 마찬가지였던지라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뗄 때마다 아까보다는 다소 더워진 숨결이 닿았다.

그마저도 사랑스럽고 부드러웠다.

그에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다시금 고개를 내리던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쳤다.

긴 속눈썹에 살짝 가려진 채 아래로 깔린 붉은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레오나드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방으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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