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저기, 두 분 다 제 말 좀 들어주실래요?”
“…….”
“……저기요?”
몇 번이나 뱉은 말에도 레오나드와 에녹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주한 시선에 다소 살벌한 느낌이 오갔다.
레오나드야 그럴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설마 에녹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저런 싸늘한 눈이라니.
‘물론 암살자들을 맞닥뜨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가 이 나라의 황제이자 하프 드래곤인 레오나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기함할 만한 일이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숨겨진 능력이 에녹에게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쯤, 에녹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죠. 그래서 아버지를 속일 수 있었던 것이고요.”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에녹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레오나드의 얼굴이 다소 누그러졌다.
물론 이어지는 말에 다시금 잔뜩 일그러졌지만.
“로레이나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말입니다.”
“……꼭 로레이나가 이곳에 있으면 그럴 수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레오나드가 으르렁거렸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살기가 그의 주위로 넘실거렸다.
그 기운을 분명히 느꼈을 텐데도 에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오나드를 직시하고 있는 녹색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로레이나를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라도 할 건가?”
“로레이나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그럴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이중 첩자 제안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죽고 싶어서 온 것 같은데.”
“죽이기보다는 이용하시는 게 더 편하실 겁니다. 아직 죽을 수도 없고요.”
붉은 눈동자와 녹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 사이로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대로 두면 정말로 싸우게 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싸우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레오나드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에녹은 검술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으니 굳이 따지면 세계관 내에서 레오나드 다음으로 강한 자가 아닌가.
원래도 훈련 한 번 안 한데다가 최근 여러 일로 개복치까지 된 몸으로 저들의 기 싸움을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 되겠다. 내가 나서야지. 나 때문에 그러는 건 알겠는데 그러다 내가 죽겠어요.
“에녹, 왜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굳이 따지자면 황궁이 저한테는 가장 안전한 곳인데.”
“지금이야 잘 해결된 것 같지만 이전에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무슨…….”
고개를 갸우뚱하자 에녹이 그제야 레오나드를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황궁을 도망 나왔잖아요, 로레이나. 폐하를 피해 다니던 거 아니었습니까?”
아아, 에녹. 그거 금기어인데…….
다시금 험악해진 레오나드의 기운에 나는 더 말릴 생각을 그만두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제럴드가 잘한 결정이라는 듯 엄지를 추켜세우는 것이 보였다.
진짜 난장판이 따로 없네.
“지금 내가 로레이나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는 소리인가?”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황궁을 도망 나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 반박하려던 레오나드가 내 쪽을 힐끗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내가 레오나드에게서 도망친 이유는 에녹이 생각한 종류의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러려면 이 세계가 소설 속이며, 내가 빙의했다는 사실까지 말해야 하는데.
아무리 에녹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오나드 입장이 많이 곤란하게 되었네.’
미안하다는 의미로 레오나드에게 살짝 웃자 그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곁에 있는 사람도 잘 눈치채지 못했을, 아주 찰나였다.
“로레이나가 나 때문에 위험해질 일은 절대로 없게 할 거야. 아니, 없어.”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이미 실컷 의심해놓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또 뭐지?”
“로레이나가 황궁을 나간 직후부터 곁에 호위를 붙여 보호하신 거 알고 있으니까요.”
호위를 붙였다고? 내가 황궁을 나간 직후부터?
에녹의 말에 나는 그제야 황궁을 나갈 때 뒤에서 느껴졌던 시선을 기억해냈다.
‘그게 레오나드였구나.’
그리고 암살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레오나드가 등장한 타이밍도 상당히 절묘했다.
어떻게 딱 내가 위험한 순간에 찾아왔을까. 내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레오나드는 내가 황궁을 나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를 붙잡지 않고 혹여 내가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 보호해 주었던 것이었다.
‘……레오나드 몰래 일을 잘 진행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레오나드는 늘 이런 식이었다.
평소에 바보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에 반해 중요한 사실은 빠르게 알아차렸던 적이 많았다.
내가 황궁을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레오나드에게 말하지 못할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왜일까. 나름 표정 관리를 잘해서 속내를 들킨 적은 몇 번 없었는데.
어쩐지 오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알기 쉬운 사람으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레오나드와 붙어 있으면서 그를 잘 알게 된 만큼 그 역시 나를 잘 알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었다.
‘레오나드는 그만큼 나를 아껴준 거야.’
저주를 푸는 것을 포기할 만큼 커다란 애정이었는데 바보같이 내가 그것을 몰랐다.
아니, 보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그냥 정해진 이야기를 바꾸려는 게 무서웠던 것이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라고 자신 있게 말해 놓고 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앞으로 이야기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레오나드와 나, 우리 둘의 이야기였다.
레오나드가 엄청난 것을 포기하면서 나를 선택해 주었으니 나도 그에 맞는 용기를 보여줘야지.
“에녹.”
“예, 로레이나.”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부드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아까까지는 굳어 있던 얼굴이 미약한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역시 에녹은 아이작에게 붙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간 지내 온 시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에녹은 나를 속이고 황궁까지 찾아올 성정이 못 되었다.
설사 정말로 에녹이 아이작과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고 한들 지금 레오나드를 만나기로 한 건 너무 위험한 판단이었다.
차라리 때를 기다리며 공작저에서 숨죽이고 있는 게 더 나았겠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
‘에녹의 손을 잡는 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래야 아이작이 정확히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있었다.
데프론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보물이 무엇인지도.
지금이라도 당장 알겠다고 하고 싶지만, 에녹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레오나드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서 밀어붙이는 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기에 나는 일단 한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에녹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허락한 것이 아니라 그런지 레오나드도 딱히 불만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이어나갈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에녹이 그만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것을 반기는 눈치인 레오나드를 두고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을 해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 정도는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에녹.”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는 에녹의 등 뒤에 대고 속삭였다.
꽤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에녹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얼굴에 떠오른 수많은 감정을 읽은 것일까.
흐린 빛인 녹색 눈을 깜빡이며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던 에녹이 곧 입꼬리를 당겼다.
그것을 끝으로 에녹이 밖으로 나섰고 집무실 문이 닫혔다.
아주 찰나였으나 알 수 있었던 것은 많았다.
에녹이 한 말이 전부 진실이었다는 것과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 말들을 했는지와 같은.
* * *
모두가 잠든 밤, 나는 이제는 꽤 익숙해진 커다란 문 앞에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황궁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내 역할을 다시 해야 해야지.
‘일기장 업무도 오랜만이네.’
분명 꽤 해왔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심장이 쿵쿵거리고 긴장이 되었다.
‘진정하자. 그냥 일하러 온 거잖아.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레오나드, 저예요.”
“들어와.”
방 안에서 들리는 나를 반기는 목소리에 문고리에 손을 올리기도 전이었다.
안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문이 열렸다.
나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허리를 감아 품에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에 입에서 옅은 웃음이 터졌다.
어느새 긴장은 날아간 뒤였다.
“들어오라면서요. 당신이 나오면 어떡해요.”
“네가 너무 느리잖아.”
“하나도 안 느렸거든요? 문 두드리자마자 바로 문 열려고 했다고요.”
“느렸어. 내 눈에는 문이 열릴 때까지 한참은 걸릴 것 같이 보였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보고 싶었어.”
황당하다는 말투로 답하려던 내 말을 가로막은 레오나드가 어미 품을 찾은 새끼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목덜미에서 그르렁거렸다.
하루 종일 붙어 있다가 잠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온 것뿐이었기에 오래 떨어져 있었다는 듯 구는 게 황당했지만, 굳이 그것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이 만족스럽다는 듯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덩치가 큰 사람이 귀여워 보인다니. 나도 진짜 중증이야.
내가 가만히 있자 은근슬쩍 목덜미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던 레오나드는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나서야 허리를 들었다.
“할 일은 해야죠. 어서 침대에 앉아요.”
물론 불만이 가득한 얼굴은 대놓고 드러낸 채였다.
“나는 다른 거 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