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빨리 앉아요. 또 꿀밤 때리기 전에.”
살짝 눈을 흘기자 레오나드가 내 손을 잡은 채로 침대 앞까지 가더니 내 몫으로 마련된 의자에 다다르고 나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나와 닿아있지 않은 시간은 다 아깝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 솔직히 너만 옆에 있으면 내가 뭔가를 잊어버리는 일 따위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래도 계속 확인은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게 제 유일한 일인데 자꾸 뺏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요즘 공작님 보기 눈치 보인다고요. 안 그래도 비서관이 해야 할 일 다 해 주고 계시는데.”
근래 많은 일을 해결하느라 부쩍 수척해진 제럴드를 보고 있자면 양심에 가시가 돋아난 기분이었다.
레오나드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뻔히 알 텐데 날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황궁에서 놀고먹으며 지내고 싶지는 않다고요. 공작님께 열심히 배워서 진짜 비서관 일도 할 거라고요.”
“놀고먹어도 상관없…….”
“레오나드.”
이름을 힘주어 부르자 레오나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내가 내 쓸모를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너 하나 놀고먹어도 카일룸 제국 국고는 끄떡도 없는데.”
“일 안 할 거면 저 갈게요.”
자리에서 일어서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레오나드가 다급히 내 손을 잡았다.
“가지 마.”
“…….”
“사람이 계속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잠깐 쉬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
“그리고 네가 분명히 이다음은 나중에 하겠다고 했었고.”
내 손에 손가락을 얽은 레오나드가 내 손바닥 안쪽 여린 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 진득한 행동에 담긴 의미는 명백했다.
이어서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춘 레오나드가 해사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루비 같은 붉은 눈이 달빛에 반사되어 오묘한 빛을 자아냈다.
“그렇지?”
그와 동시에 맞잡은 손을 당기는 힘에 나는 속절없이 끌려가 촘촘하게 내려앉는 입맞춤을 받았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완벽한 얼굴이었다.
* *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푸른빛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 아침은 아니지만,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을 보아하니 곧 해가 뜰 것이 분명했다.
황제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뜨는 아침이라니.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뭐가 이럴 줄 알아?”
언제 깨어난 건지 성큼 다가온 레오나드가 굵은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몸에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었으나 꽤 따뜻해진 날씨 때문인지 이불이 얇아서 살과 살이 닿는 듯한 감촉이 일었다.
이상한 느낌에 움찔 몸을 떨자 그가 괜찮다는 듯 어깨에 몇 번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에 오히려 더 부끄러워진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일 못 하게 될 줄 알았다고요오오…….”
“난 일하려고 했어. 듣지 않겠다고 한 건 너야.”
“뭐라고요?”
“내가 어젯밤 내내 뭘 기억하는지 말하려고 했잖아. 아니야?”
“그건…….”
반박하기 위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리자 레오나드가 나를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나는 분한 마음에 한참이나 그의 품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불은 점점 몸에 감겨왔고 시트와 이불이 마찰이 되어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항복이요. 항복!”
잠시 뒤 힘이 빠진 내가 몸을 축 늘어뜨리자 레오나드가 짧게 웃었다.
나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긴 그가 볼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그러게 그냥 가만히 있지 그랬어.”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저 이긴 게 그렇게 좋아요?”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은 거지.”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보게끔 나를 돌린 레오나드가 내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렸다.
또, 또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는 어제 일하려고 했어.”
“……어제 일을 하려고 했다고요? 정말로?”
“물론이지.”
양심 있습니까, 진짜?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레오나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리낌 없다는 태도였다.
“나는 말 하려고 했는데 네가 하지 말라고 입 막았잖아. 기억 안 나?”
“말을 이상하게 하니까 그렇죠! 누가 일과 보고를 그런 식으로 해요?”
나는 조용히 어젯밤 일을 회상했다.
다시 생각해도 진짜 가관이었다. 왜 자기 일과 보고를 내 기준으로 말하냐고.
레오나드는 연신 내게 입을 맞추며 집무실에서 내가 어떤 표정으로 제럴드의 말을 들었는지.
입을 맞출 때, 볼을 붉게 물들이던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와 같은 말을 귓가에 중얼거렸다.
나는 레오나드와 같은 철면피가 아니었기에 차마 그것을 눈 뜨고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레오나드의 입을 막은 것뿐이었다. 그런 말을 계속 듣고 있는 건 좀 아니잖아.
“내가 뭘 이상하게 말했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어젯밤에 뭐라고 했는지 생각 안 나요?”
“응, 기억 안 나.”
“아닌 것 같은데.”
의심하는 눈초리에 레오나드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다시 말해 주면 뭐였는지 알 것 같기도 한데…….”
“싫어요. 말 안 할 거야.”
눈을 가늘게 뜨며 즉각적으로 뱉은 말에 레오나드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는 이불이 쇄골 아랫부분을 드러내려고 해서 잡아당기느라 혼이 났다.
방 안이 환해서 그런지 아니면 자기 상체가 보이든 말든 별 신경 쓰지 않는 레오나드 탓인지 자꾸만 얼굴이 뜨거워졌다.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당연하죠! 절대로 안 해!”
“그래. 그럼 내가 말하지, 뭐.”
뭐야, 진짜. 미친 거야?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지 않았기에 서둘러 손을 들어 레오나드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마치 내가 이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레오나드가 입을 막은 손바닥에 입술을 길게 누른 것이었다.
쪽. 짧고 간지러운 소리가 침실 안을 작게 울렸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자 레오나드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이미 레오나드에게 안겨 있는 상태였기에 몸을 피할 수도 없었다.
“입을 막는 건 좋은데 말이야.”
“…….”
“나는 어제 했던 방식으로 해 주었으면 좋겠어.”
레오나드가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싱긋 웃었다.
아, 진짜…….
“……당신 진짜 짜증 나. 알죠?”
이 사람 자기 얼굴을 너무 잘 쓴다니까.
“알지, 그럼.”
낮게 웃던 레오나드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맞춰 눈을 감은 나는 깊게 맞부딪히는 입술을 느끼며 레오나드의 목에 팔을 감았다.
우리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 * *
“……레오나드.”
“레오나드.”
“으응.”
연이은 부름에 뒤에서 나를 꼭 끌어안고 있던 레오나드가 몸을 뒤척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깊게 잠겨있었다. 하긴, 잠든 지 한 시간도 안 되었으니까.
내 목소리 역시 레오나드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터라 나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레오나드가 치유해 주었다면 금방 나았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이 상태를 그대로 느끼고 싶어서 그냥 두었다.
“이제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좀 더 자. 오전 일정은 비워놨어.”
잠기운을 떨쳐내기가 힘든지 레오나드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하긴, 제럴드한테 듣기로는 일주일이 넘도록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했으니까.
오늘만큼은 느긋하게 자고 싶겠지.
“그럼 저라도 나갈게요. 더 늦게 나가면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 것 같아서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부르기 전까지 침실 근처에 오지 말라고 말해두었으니까.”
“그래도 제 침실에 들어가면 제가 없다는 걸 알 텐데요.”
“그럴 일도 없어. 네 침실에 누가 갈 일도 없을 거야.”
“…….”
“사실 침실 근처가 아니라 침실이 있는 층에 오지 말라고 했거든.”
“……처음부터 일은 안 할 생각이었죠?”
몸을 돌려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자 레오나드가 다시 졸린 것처럼 작게 하품을 했다.
연기는 하지 말지? 아까부터 목소리 또렷해진 거 다 들었는데.
“그러면 레오나드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제 침실에 아무도 안 들어온다는 거죠?”
“물론이지.”
“빨리 안 돌아가도 되겠네요. 저 좀 씻고 올게요.”
팔을 뻗어 근처에 떨어져 있는 실내용 가운을 몸에 걸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와주겠다며 같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에 나는 곧장 몸을 돌려 선언했다.
“저 혼자서요.”
또 분위기 이상하게 흘러가는 건 사양이었다.
* * *
씻고 나오니 레오나드가 말끔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기다리다가 다른 방 욕실에서 씻은 모양이었다.
대충 실내용 가운만 걸치고 나왔던 터라 재빨리 옷을 여미는데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찬 기운 하나 없는 말 그대로의 봄바람이라 그런지 가만히 바람을 맞고 있자니 어쩐지 노곤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마 레오나드가 수건을 들고 내 머리를 만지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대로 자면 감기 걸려.”
“따뜻한 바람이어서 괜찮아요.”
“안 돼. 머리카락은 차가울 거 아니야. 다 말리고 자.”
목욕도 뜨거운 물로 해서 정말 괜찮은데.
조용히 중얼거렸으나 수건으로 머리를 닦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어때? 불편하지는 않아?”
“솔직히 말해도 돼요?”
“……불편한가 보네.”
아까보다 눈에 띄게 뚱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웬만하면 좋다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레오나드의 손길은 그렇게 말해 주기도 민망할 정도로 엉성했다.
레오나드를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레오나드가 누구 머리를 말려본 적이 있어야지.’
내가 별로라고 했으니 그만해도 될 텐데 레오나드는 여전히 물기를 닦고 있었다.
서툰 모습임에도 어떻게든 열심히 하려는 것이 보여서 웃음이 났다.
왜 저렇게 진지한 얼굴이람.
갑자기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는지 레오나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어?”
“귀여워서요.”
그 말을 들은 레오나드의 얼굴이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라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도 레오나드는 못마땅한 얼굴이었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걸.”
“그거 마음에 드는데요? 제 눈에만 귀여워 보인다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나는 그런 적이 없다는 말이었는데…….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린 레오나드가 손을 좀 더 위로 올려 내 머리를 마사지하듯 매만졌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제법 익숙해져서 그런지 꽤 시원했다.
“또 왜 웃어?”
“제가 웃었어요?”
딱히 생각하고 웃은 건 아니었는데. 이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왜 웃음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냥 이 순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레오나드.”
“응?”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꼭 부부 같지 않아요? 좀 웃긴 거 같기도 하고…….”
눈꼬리를 해사하게 휘며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레오나드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결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