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네?”
“아니, 결혼하자.”
레오나드가 내 머리에서 손을 떼더니 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올려보았다.
“나랑 결혼해 줘, 로레이나.”
“……무슨 청혼을 이렇게 해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이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았다.
누가 청혼을 이렇게 해? 이렇게 돌직구로 얼렁뚱땅!
내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있자 레오나드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싫어?”
“싫은 건 아닌데…….”
“그럼 하자, 결혼.”
“이게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앗.”
갑작스레 잡아 당겨진 손에 놀랄 틈도 없이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내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훑는 것에 뭐라고 하려던 말은 레오나드의 눈을 마주한 순간 쏙 들어가 버렸다.
아침 햇살을 받아 유독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제법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간단하게 결정한 거 아니야. 이렇게 넘길 생각도 없고.”
“…….”
“나중에 제대로 다시 할 테니까. 일단 알겠다고 한마디만 해 줘.”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을 가볍게 그러쥐어 올린 레오나드가 그대로 고개를 내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뜨거운 감촉은 꽤 오래 머물러 있었다.
진득하면서도 경건한,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로레이나.”
나른하면서도 어쩐지 초조한 기색이 묻어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더는 뭐라 하지도 못하게 잔뜩 진지한 낯을 한 레오나드가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결혼 이야기하는 게 갑작스럽다는 거 알아. 나는 늘 생각해 왔던 거지만 너는 아닐 테니까.”
“…….”
“내가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이 나라의 황제이니 부담도 될 거야.”
“……부담이 되는 건 맞아요.”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레오나드와 결혼을 하면 카일룸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오나드를 떠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레오나드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그저 그에게 솔직해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 말에 고민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거 어때?”
“어떻게요?”
아래로 깔린 눈꺼풀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알았다. 레오나드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내 평생의 반려가 되어줘.”
* * *
평생의 반려.
이종족이 평생에 한 번 정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평생을 함께하는 존재.
소설 <크루시아>를 읽은 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설정이었다.
마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평범한 인간의 수명을 사는 셀리아가 훗날 레오나드와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장치였으니까.
그러니 방금 들은 말은 본래 셀리아에게 향했어야 할 말이었다.
‘물론 원작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부분이긴 했지만.’
어쩌면 청혼보다 더할지 모르는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원작을 바꿔버렸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레오나드와 함께하기로 한 이상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레오나드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에 여전히 초조한 얼굴인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굴어요?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 없어. 그냥…….”
“그냥?”
되물으며 고개를 기울이자 살짝 고개를 들던 레오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가 불안해서 그래.”
“다 잘 해결되는 중이잖아요. 뭐가 불안해서 그래요?”
“그래. 다 잘 되고 있지. 비현실적일 정도로 모든 게 완벽하고. 꼭 그때처럼.”
“그때요?”
레오나드의 불안이 내게 옮겨붙은 것일까. 살짝 떨리는 내 손을 잡은 레오나드가 말을 이었다.
“네가 황궁을 떠나기 전 말이야.”
“아…….”
“그래서 불안해. 그때는 운이 좋아서 네가 황궁을 떠날 거라는 것을 알았고, 제때 북부에 도착해서 너를 구했지만…….”
내 손을 감싼 온기가 더 짙어졌다. 레오나드가 힘주어 잡은 탓이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 찰나를 부러 길게 늘여놓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 입술이 다시금 열리는 과정이 더뎠다.
레오나드가 짙은 한숨을 뱉었다. 그에 나는 레오나드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확신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보장 못 하니까.”
“……레오나드.”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꼭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울고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
“반려의 언약을 맺으면 네가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바로 느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혹시 네가 위험해지더라도 구하러 가기 쉽겠지.”
레오나드가 다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거기에 대고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미 주위에는 계속해서 이상한 일들이 생기고 있었고, 아이작 데프론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반려의 언약은 할 수 없어.’
나는 아직 완전하게 데드 엔딩을 피하지 못했다.
레오나드 옆에 있다고 반드시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럴 가능성이 커지는 것뿐이었지.
그리고 아이작 데프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할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했다.
원작에서 로레이나는 레오나드와 접점이 없었고, 그렇다면 데프론 공작 역시 로레이나를 죽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는가.
원작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 세계에 남아있는 이종족은 레오나드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로레이나는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했을 확률이 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레오나드와 언약을 맺을 수는 없었다.
이미 원작의 스토리는 틀어졌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린다면 내가 죽는 순간, 레오나드의 숨도 같이 끊어질 텐데. 그런 결말을 바라고 레오나드의 옆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화내겠지.’
당장 언약을 맺자고 난리를 칠지도 몰랐다.
레오나드는 그것까지 각오하고 말을 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옆에 있는데 내가 위험하긴 왜 위험해요.”
천천히 손을 들어 레오나드의 뺨을 감싸 쥐며 싱긋 웃었다.
미안해요, 레오나드. 나는 그러고 싶지가 않아요. 아니, 그럴 수가 없어.
“그때는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랬던 거잖아요. 이렇게 붙어있으면 괜찮다니까요?”
“…….”
“옆에 생명의 기운을 계속 뿜어내는 사람이 있는데 안 괜찮은 게 더 이상하지.”
레오나드는 무려 300년 동안 지옥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누구하고도 교류할 수 없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을 지금껏 홀로 견뎌왔다.
그런 사람을 내 불행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당신은 행복해져야지, 이제.
‘그리고 나도 이대로 죽을 생각은 없어.’
어떻게든 데드 엔딩을 바꾸고 살아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레오나드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제 나에게는, 내 생존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중요해.
“그러니 언약은 시간이 좀 지나고 했으면 좋겠어요. 성스럽고 예쁜 의식이니까 상황이 좀 안정이 되면…….”
“…….”
“지금보다 더 더워지고 잎사귀들의 색이 좀 더 짙어지면, 그때.”
그때쯤이면 아마 모든 것이 해결되어있겠지. 나는 최대한 활짝 웃어 보였다.
이렇게 하면 결국에는 레오나드가 내 말을 따라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런 나를 잠시 빤히 보던 레오나드는 작게 헛웃음을 뱉으며 내가 얹은 손에 얼굴을 기댔다.
“못 당하겠네, 진짜.”
“그렇게 해 주는 거겠죠?”
“안 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기다렸다가 하자는데 어떻게 거절해. 그것도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어차피 거절하지 못할 거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며 레오나드가 작게 투덜거렸다.
나는 그에 마찬가지로 작게 웃다가 맞잡은 손에 깍지를 끼웠다.
꽤 힘주어 잡아서 그런지 레오나드와 내 손에 남아있던 옅은 떨림마저 멎은 듯했다.
닿아있는 체온이 따뜻했다. 그 순간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냥 미뤄달라는 거 아니에요. 다 나 때문에 불안해서 그러는 거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해 줘야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턱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레오나드가 낮게 웃었다.
눈꼬리가 해사하게 휘어지는 것이, 이제는 꽤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정말 다 해 줄 수 있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제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요.”
“그럼 오늘 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어.”
“그거야 뭐 맨날 하던 일…….”
“단둘이.”
기다렸다는 듯 내 말을 끊고 냉큼 뱉어진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안 될 거 알고 하는 말이죠?”
“아니, 진짜 진심인데.”
“쌓인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공작님 울어요.”
“걔는 좀 울어도 돼.”
제럴드에게 방해받았던 몇 번의 순간이 떠오르는 듯 레오나드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제 입술을 짓씹었다.
그것이 신경 쓰여 입술을 내리자 레오나드가 곧장 힘을 풀고 입을 맞춰왔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다시금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어느새 손을 뻗은 레오나드가 내 목덜미를 매만진 탓이었다. 목덜미를 쓸던 손길이 귓불을 스치더니 뺨까지 올라왔다.
나는 붉은 눈동자에 다시금 지독한 갈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된다는 뜻이었다.
“진짜 못됐다. 공작님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잖아요. 일단 그건 안 돼요.”
“그럼 소원권 쓸게. 하나 쓸 테니까 오늘 나랑 같이 있어.”
“……하나? 왜 꼭 그러고도 남은 게 있는 것처럼 말하죠?”
“소원권 두 개였잖아. 아니야?”
아니, 이 사람이? 저번에 하나 썼잖아요.
살짝 눈을 흘기자 레오나드가 정말로 몰랐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번에 다리 다 나은 거 잊어버렸다는 것도 그렇고. 요즘 들어서 능청스럽게 군다니까.
‘연기가 너무 늘었어.’
멍하니 있으면 이러다가 그대로 속아 넘어갈 것 같았다. 정신 차려야지.
“그거 말고 다른 거 말해 봐요. 일은 해야죠.”
“그러면…….”
“아, 소원권으로 소원권 늘리는 건 안 돼요. 그럼 무한대로 늘어나잖아요.”
정곡을 찔렸는지 레오나드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뭐로 보고 진짜.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여전히 내 뺨을 만지고 있던 레오나드가 조금 더 손을 올려 눈가를 쓸었다.
여린 살에 닿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안 되는 게 너무 많은데.”
“안 되는 것만 말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럼 이건?”
“뭐…….”
눈꼬리 부분을 살살 만지는 느낌에 웃음을 터뜨리려던 찰나였다.
레오나드가 나머지 손으로 내 허리를 감더니 확 잡아당겼다.
갑작스레 쏠린 몸에 중심을 잃을 뻔해서 서둘러 레오나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가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레오나드가 내 허리를 좀 더 당기자 몸이 살짝 닿았다. 명백한 의도가 담긴 몸짓이었다.
환한 시야 탓인지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슬쩍 눈을 피했다. 볼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왜 모르는 척 굴지.”
대답이 없는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시선을 피할 수도 없도록, 아주 활짝.
“내가 뭘 원하는지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