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니…….”
반박하려던 말은 불시에 닿은 입술에 그대로 삼켜졌다.
저기, 우리 아까 일어나서 방금 씻고 나온 건데요.
“레, 레오나드. 잠깐…… 흐앗. 아니, 잠깐만요!”
“왜.”
“일단 좀…… 으. 아까 분명히 오늘 일정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직 오전이야.”
“……그래도 준비하려면 시간이…….”
“남은 시간은 많고.”
“누가 올 수도 있…….”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층에 안 올라와.”
……내가 졌다. 졌어. 항복이다.
생각해 보니 반려의 언약을 미룬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 또한 레오나드가 이러는 것이 싫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게 다 레오나드가 너무 잘생긴 게 문제였다.
허락의 의미로 레오나드의 쇄골 부분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자 짧게 숨을 토해낸 레오나드가 다시금 입술을 부딪쳐왔다.
입맞춤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몸 안쪽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입술이 조금 더 깊게 닿았고, 자꾸만 안쪽으로 파고드는 뜨겁고 부드러운 것에 몸이 움찔 떨렸다.
허리에 올라와 있던 손길이 노골적으로 변하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침실 복도를 빠르게 걷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드, 밖에…….”
“잘못 들은 거야.”
빠르게 대꾸한 레오나드가 내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나를 안아 들었다.
침대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 약간의 조급함이 묻어났다.
그 와중에도 밖에서는 정장 구두 굽이 바닥과 부딪히는 특유의 또각또각 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진짜다.
아니나 다를까 곧 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제럴드입니다.”
“…….”
“명령하신 바를 기억하고 있으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목소리였다.
레오나드 역시 이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나를 안아 든 채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쩐지 이 상황, 익숙한 것 같은데.
“하. 또 제럴드…….”
나를 침대에 내려준 레오나드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말을 짓씹었다.
하지만 그 이상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레오나드는 분명 자신이 부르기 전까지 이 층에 올라오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제럴드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레오나드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들어오라고 말을 하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실내 가운만 걸친 채 흐트러져 있는 내 모습을 본 탓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 레오나드가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곧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곳곳에 달린 단순한 디자인의 보라색 드레스였다.
……아니,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역시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지.
“무슨 일이지? 급한 일인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까 일단 밖에서 말해 봐.”
서둘러 입으라는 듯 레오나드가 작게 눈짓했다. 그것을 알아들은 나는 드레스를 들고 재빨리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럴드가 조급한 마음에 그냥 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욕실로 향하는 동안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도감에 한숨 돌리는 사이 주위에 누가 있나 살피는 듯 잠시 말이 없던 제럴드가 입을 열었다.
“폐하, 북부에 보냈던 연구원들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명령을 어긴 것이 납득이 갈 정도로 엄청난 소식과 함께.
“아무리 찾아봐도 그 산에는 오두막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 * *
비상사태에 나는 재빨리 드레스를 입고 레오나드와 함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복잡한 디자인이 아니었기에 혼자 입기도 충분했다. 꽤 마른 머리는 어제 했던 장식으로 틀어 올렸다.
제럴드는 내가 레오나드의 침실에서 나온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기도 했고.
레오나드는 집무실 소파에 앉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오늘 아침에, 그러니까 30분 전쯤에 편지가 도착했는데…….아멜리오 백작이 말해준 위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당연하게도 나였다.
“말도 안 돼요. 제대로 확인한 게 맞나요?”
“네.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합니다. 혹시 몰라서 그 근방까지 다 뒤졌고요.”
“혹시 말이 잘못 전달된 건 아닌가요? 산 입구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나오는 곳 맞습니다. 제대로 전달되었어요.”
제럴드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진짜로 아무것도 없었다고?
‘혹시 그게 다 꿈이었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꿈이 아니야.
거기서 보았던 모든 것이 아직도 선명한데 이 기억이 꿈일 리 없었다.
‘게다가 그때 나는 혼자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분명 에녹과 함께……아, 맞다!
“그때 메리도 있었어요. 혹시 모르니 불러서 확인해 봐요.”
분명 그때 메리가 나와 에녹을 데리러 사람들을 이끌고 왔었으니까. 바로 앞까지 왔었으니 오두막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메리가 오면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오두막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사라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하지만 잠시 뒤, 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끔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오두막이요? 그런 것은 보지 못했는데요.”
집무실로 불려온 메리가 하얗게 질린 낯으로 대답했다.
혹시나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 불려온 것일까 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메리. 다시 잘 생각해봐.”
“네. 다, 다시 생각해 볼게요.”
“나랑 에녹이랑 비 피하느라 오두막에 들어가 있다가 나왔잖아. 기억 안 나?”
“비 피할 때…….”
그때를 회상하는 듯 메리가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굴렸다.
이윽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메리가 손뼉을 쳤다.
“아, 생각났어요!”
“그렇지? 오두막 있었지?”
“저 그게…….”
메리가 곤란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괜찮아. 편하게 말해도 돼.”
“제가 기억하기로는 백작님과 에녹 님은…….”
“응응.”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계셨는데요.”
메리의 말이 끝나고 집무실 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디를 보고 있는지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나를 힐끔 보던 제럴드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입에서 짙은 한숨을 터졌다. 긴장감에 말아 쥐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는 정말로 오두막에 있었어요.”
“알아.”
레오나드가 나직이 대꾸했다.
정말로 알았다는 말이 아니라 내 말을 믿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일기장 속 글씨도 사라지는 판에 오두막이라고 안 사라지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할 것 없는 일이야.”
“하지만 폐하. 보이지도 않는 것을 조사할 수는 없습니다. 뭔가 단서라도 있어야…….”
“단서야 찾으면 되지. 로레이나. 에녹 데프론도 그 오두막을 봤었어?”
“네. 같이 봤었어요. 오두막 안에 들어가서 벽지나 물건들에 관해 이야기했거든요.”
“그렇다면 오두막을 본 사람은 두 명이나 된다는 건데.”
레오나드가 짧게 숨을 뱉으며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그 찰나가 어쩐지 영겁의 시간 마냥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레오나드가 굳게 닫혀있던 입을 뗐다.
“아무래도 다시 북부로 가봐야 할 것 같아.”
파격적인 말에 제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께서 직접 가시려고요?”
“그래.”
“하지만 굳이 폐하께서 가실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아직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자리를 자주 비우시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아멜리오 백작이 있지 않습니까. 북부에는 아멜리오 백작을 보내시는 편이 더…….”
“로레이나는 당연히 가야지. 여기서 그 오두막을 실제로 본 사람은 로레이나뿐이니까.”
“그러면…….”
“그리고, 로레이나가 가니까 나 역시 가야 하는 거야.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니, 반박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듣지 않을 거니까.”
……저건 좀 막무가내 아닌가 싶은데.
나는 멍하니 레오나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제럴드의 눈치를 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물론 레오나드가 저렇게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자신과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 성격에 나를 혼자 보낼 리가 없지.
나도 오두막 보러 가다가 비명횡사하는 건 사양이었던 터라 굳이 나서서 레오나드를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단호한 분위기를 읽었던지 제럴드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서류들은 검토하고 가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오늘 안에 다 해 놓고 갈게.”
“설마 내일 바로 가시려고요?”
“빨리 다녀올수록 좋잖아. 그 사이에 산사태가 또 나기라도 해서 남아있는 단서마저 다 사라져버리면 어떡해.”
‘너를 누가 말리겠냐’는 생각이 가득한 얼굴로 레오나드를 보던 제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애초에 제럴드에게는 선택권조차 없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레오나드를 어떻게 말리겠는가.
“그래도 내일은 안 됩니다. 일주일 뒤쯤에 출발하는 건 어떠십니까.”
“일주일은 너무 길어. 사흘.”
“……나흘이요. 진짜 이게 최선입니다.”
“그렇게 할게요. 고맙습니다, 공작님.”
레오나드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그의 입을 막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네자 제럴드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거 한마디 했다고 저런 반응이라니. 도대체 평소에 레오나드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 거야.
‘그나저나 이대로 황궁을 비워도 괜찮으려나?’
나를 암살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안 데프론 공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짓을 또 계획하고 있을지 몰랐다.
“공작님.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될까요?”
“무엇입니까?”
“데프론 공작가를 주의 깊게 살펴주세요. 자리 비운 사이에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편지로 알려주시고요.”
“이미 공작가에 심어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백작과도 연락이 되도록 조처를 해 놓겠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제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공작가에 심어놓은 첩자와 연결되는 것을 기다리지 못했다.
그날 밤, 북부에서 2차 산사태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