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고마워요. 에녹.’
공작 가의 복도를 거닐던 에녹은 불쑥 떠오른 기억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날 집무실을 떠나려던 순간에 들린 작은 목소리에 몸을 돌렸던 것은 본능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녹은 집무실에 있는 동안 레오나드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내내 로레이나를 좇았다.
저 반짝이는 푸른 눈이 한 번이라도 자신을 향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레오나드와 로레이나 사이를 감돌던 묘한 기류에, 이미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 말 한마디가, 떠나던 자신을 따라 나오던 발걸음이, 여러 감정을 담고 자신을 보던 얼굴이.
그 모든 것이 기꺼워서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곱씹는 자신이 우습기도, 가엽기도 했다.
잇새로 자조 어린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에녹은 늘 달콤하던 분홍빛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이 들었다.
코너를 꺾다가 자신과 부딪힌 누군가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오늘 밤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었다.
“괜찮은가? 내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 미안해.”
에녹이 저와 부딪혀 휘청거리는 가냘픈 몸을 붙잡으며 물었다.
사실, 속도 조절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의 잘못이었지만 에녹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본래 그런 성정이었다.
저택의 작은 주인과 부딪혀 덜덜 떠는 사용인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공작저에 손님이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는 따로 못 들었으니 늦은 시간까지 저택을 정리하던 시녀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여기는 이 시간이면 출입이 통제되는 곳인데.’
요새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아이작은 일정 시간이 되면 자신이 정해 놓은 몇몇 군데의 출입을 금했다.
아이작을 제외하고 그 장소를 드나들 수 있는 건 얼마 전 아이작과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에녹뿐이었다.
물론 실상은 아이작의 비밀을 황궁으로 전달하는 이중 첩자이지만.
‘그것도 폐하께서 허락하셨을 때의 일이지.’
작게 한숨을 내쉰 에녹이 아무래도 그녀가 길을 잘못 들은 모양이라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눈같이 새하얀 은발이 눈부시게 빛났다.
곧이어 긴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던 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선명한 빛을 보는데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꼭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익숙한 느낌.
이상한 일이었다. 에녹은 오늘 이 여자를 처음 보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에녹.”
등 뒤에서 들린 낮은 음성에 에녹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곳이 보였다.
에녹은 그제야 여자가 입은 옷이 여느 공작가 사용인들의 복장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안 보였어.’
그렇다면 이 여자는 누구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에녹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아이작이 말했다.
“안 그래도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났으니 잘 되었구나.”
“아시는 분입니까?”
“그럼 알다마다. 우리 가문의 하나뿐인 방계 혈족이 아니냐.”
“방계라고요?”
에녹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방계라니. 데프론 공작가는 황권을 쥐게 되었던 순간부터 직계뿐이었다.
혹시라도 어렵게 얻은 자리를 방계들이 위협이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 미리 싹을 다 잘라내지 않았던가.
그 탓에 데프론 공작저는 주인도 없이 꽤 오랜 시간 비어있는 채였다.
그런데 이제 와 방계라고?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더 기함할만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래. 어렵게 찾은 친척이니. 이제라도 우리가 돌봐주어야 할 것 같아 데리고 왔다.”
“그 말씀은…….”
에녹이 말끝을 흐리며 여자를 보았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이라고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길고 어색한 침묵에 의아해하던 에녹이 뭐라 여자에게 입을 열려던 순간, 아이작이 말했다.
“이 아이를 양녀로 들일 생각이다.”
에녹의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종의 통보였다. 목소리에 언뜻 단호함 마저 서려 있었다.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었기에 그것에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도록 꺼림칙한 기분이 몸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묘하게 익숙한 듯한 느낌과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강렬한 존재감 때문인지.
아니면 또 뭔가가 있는 것인지.
“며칠 뒤 있을 연회에서 소개할 예정이니 그렇게 알아두어라.”
“아버지 생신 연회 말씀하시는 겁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아이작이 여자를 데리고 왔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있던 에녹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을 못 들었는데.”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아이작과 여자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듯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 * *
간밤에 들린 소식으로 레오나드와 나는 서둘러 북부로 갈 채비를 마쳤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마음이 급했다.
‘또 산사태라니.’
말이 씨가 된다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어제 레오나드가 무심코 뱉었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오두막이 있던 자리까지 망가졌으면 어떻게 하지?’
그랬다면 설사 정말로 그 자리에 오두막이 있었다고 한들 건질 것이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일단은 북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알려준 위치가 어떤 상태인지 묻는 편지를 보내놓았다.
오두막이 보이지는 않더라도 그 정도는 확인이 가능할 테니까.
답변은 가던 중에 받기로 했다.
우리가 어떻게 북부로 가는지 그쪽에서 동선을 다 꿰고 있으니 답장을 받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거의 다 챙겼고 또 뭐가 있더라…….’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생각하자 에녹이 집무실로 찾아온 날에 레오나드에게 일기장을 빌려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미쳤어. 제일 중요한 것을 놓고 갈 뻔했네.
“레오나드.”
“응.”
“저번에 제가 일기장 읽으라고 집무실에 놓고 갔었잖아요. 혹시 그거 다 읽었어요?”
“아니, 아직. 읽을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아서 말이야.”
레오나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갑작스럽게 앞당겨진 일정에 일을 미리 처리하느라 잠도 못 자고 고생했다고 들었다.
혹시 몰라 물어본 건데 역시 다 못 읽었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레오나드는 나와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으나 그 시간 동안 일기장을 본 적은 없었으니까.
“혹시 지금 줄 수 있어요? 아무래도 가지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해. 어차피 일기장도 조사해야 하니 그편이 나을 것 같고. 그냥 몇 명은 남아서 일기장을 보라고 할 걸 그랬네.”
“애초에 연구원이 몇 명 없잖아요. 북부 가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한 번 갔을 때 여러 명이 가서 확실하게 조사하고 오는 편이 나아요.”
그리고 이건 내 추측이지만, 저번에 내가 암살당할 뻔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수도 북부는 이미 아이작에게 매수당했을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마법 연구원들이 오래 머물러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자, 여기 있어.”
레오나드가 집무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낸 일기장을 내게 건넸다.
아무런 생각 없이 일기장을 받아들던 나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색이 더 옅어진 것 같지?’
아니, 정확히는 색이 바랜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천천히 표지를 더듬었다. 손에 닿는 감촉은 여전히 매끄러웠다.
그냥 기분 탓인가?
‘……아, 머리 아파.’
아무래도 피곤한 것은 비단 레오나드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며칠간 생각할 일이 많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한 번 개복치가 된 몸은 좀처럼 체력 회복이 안 되었다.
으으. 이래서 사람이 꾸준히 운동해야 하는 건데.
그래. 바쁜데도 새벽마다 꾸준히 몸을 단련하는 레오나드처럼.
‘……아니지. 굳이 운동할 필요가 있나?’
레오나드의 넓고 듬직한 등을 훑던 나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짐도 다 챙겼겠다, 이제 마차를 준비 중이니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뭐야?”
내가 갑작스레 뒤에서 허리를 감아 안자 레오나드가 물었다.
살짝 놀란 듯한 음성 뒤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아, 이러고 있으니까 조금 살 것 같다. 입술이 아니더라도 조금은 효과가 있다던 말이 맞네.
“무선 고속 충전기…….”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요. 엄청 좋은 거.”
레오나드의 등에 이마를 댄 채 몸에 차오르는 느낌을 가만히 느끼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뭘 보고 있느라 뒤에서 오는 줄도 몰라요?”
“아.”
희미한 탄성을 뱉은 레오나드가 살짝 고개를 돌려 들고 있는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데프론 공작이 연회를 연다고 해서.”
“갑자기 연회요?”
“곧 공작의 생일이라고 하더라고.”
레오나드가 몸을 돌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게로 건네주었다.
깔끔한 디자인의 흰색 종이에는 금색 테두리가 둘리어 있었고 군데군데 화려한 은색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레오나드 앞으로 온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나는 한쪽에 적힌 아이작의 이름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짓을 해 놓고 레오나드한테 초대장을 보내다니. 지금 상황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
“……이걸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저한테 안 온 게 다행이네요.”
“너한테도 왔어.”
“네? 저한테도 왔다고요? 어디 봐봐요.”
“지금은 없어.”
잠시 말을 멈춘 레오나드가 내게서 다시금 초대장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꽤 단단한 재질의 종이를 찢어버렸다. 아주 있는 힘껏.
종잇조각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허공에서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내가 바로 찢어버렸거든. 이렇게.”
“잘한 일이긴 한데. 이걸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죠?”
“어차피 연회에 갈 생각 없잖아. 2차 산사태 때문에 북부로 가야 해서 못 간다고 말하면 그만이야. 나한테 초대장을 보냈다고 해서 굳이 가야 할 의무도 없고.”
당연히 황제는 그냥 안 가도 아무 문제없겠지. 당신이 아니라 나한테 문제가 없냐는 말이었는데.
하지만 레오나드의 말을 듣고 보니 나 역시 상관없을 것 같았다.
황제의 비서관이 황제 옆에 있지 그럼 어디에 있겠어.
“그런데 레오나드 생일은 언제쯤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네.”
젠이었을 때도 모른다면서 알려주지 않았잖아.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든 정보를 흘리지 않으려고 그런 거 같지만.
“겨울이야. 아직 한참 남았어.”
“나랑 완전 반대인 계절이네요. 뭔가 어울린다.”
“별게 다 어울…….”
낮게 웃던 레오나드가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멈칫했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적안이 내 쪽을 향했다.
“그럼 생일이 봄……아니야. 여름이지?”
“맞아요. 봄이에요.”
“설마 벌써 지난 거야?”
현실 부정에 실패한 레오나드가 초조한 낯으로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내 생일이…….
“……지났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