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갑작스레 등장한 익숙한 이름들에 레오나드는 무언가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 또한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떨어졌다.
“이게 무슨…….”
혹시나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읽어보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셋 다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한 번도 엮어서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물론 이사벨은 나머지 둘과 연관이 있었다.
칼리드 히르 데르키안과 이사벨이야 카일룸 제국민이라면, 아니 어쩌면 이 세계 전부가 알지도 모르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사벨은 엘레노아의 일기장에서 한 번 더 등장한다.
로레이나는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이렇게 셋이 붙어있는 것을 봤으니 오늘로써 그건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데, 더 놀랄 만한 것은 이름을 담고 있는 글자였다.
‘……이건 신어(神語)야.’
생명의 신이 이 땅에 제 후손을 남기고 떠났을 때 준 것.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글자.
제국 초기에 드래곤을 중심으로 몇 고위 귀족층들이 쓰던 것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칼리드 히르 데르키안을 마지막으로 드래곤 황제의 역사가 끝나며 기억 속에서 사라진 글자.
칼리드가 즉위하던 당시에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300년 전에 사라진 글자를 그 당시에 태어난 레오나드가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드래곤의 언어입니다.’
‘훗날 자리를 되찾으실 때까지 큰 힘이 되어줄 거예요.’
‘언제나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하비 헨티슨. 300년 전 귀족들의 눈을 피해 갓난아기였던 레오나드를 황궁에서 데리고 도망친 장본인.
당시의 헨티슨 남작은 늘 레오나드의 본래 자리가 어디인지를 강조하고는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칼리드가 제 아들에게 신어(神語)로 남긴 편지를 읽는 것은 하비 헨티슨과의 몇 안 되는 기억 중 하나였다.
함께했던 순간이야 많았겠지만, 나머지 기억들은 이미 레오나드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어찌 되었든 간에 레오나드는 그 기억들로 얼굴도 잘 모르는 제 아비의 필체가 어떠한지 아주 잘 알았다.
벽에 새겨진 글씨가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다면 다른 둘 중 하나라는 건데.’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웬만한 귀족들은 알지 못하는 고대어를 알고 있을 만큼 둘의 신분이 높았다던가.
아니면 신어(神語)의 주인이 자신의 글자를 알려줄 정도로 셋의 사이가 가까웠다던가.
엘레노아는 순혈 엘프인 이종족이었으니 전자일 가능성이 크기는 했지만 레오나드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레오나드는 벽에 새겨진 모든 것을 종이에 옮기고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구들이 모두 옛날에 유행했던 디자인이고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점 외에는 더 얻을 것이 없어 보였다.
레오나드가 탐색을 끝내고 오두막을 나서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연구원들이 바로 몰려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으니 신경 쓰지 말도록.”
나직이 대꾸한 레오나드가 연구원 중 하나에게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갑작스레 그것을 넘겨받은 연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안에 있던 것들을 다 옮겨 넣은 거야. 한번 살펴봐.”
“이것들이 다 저 나무……아니, 오두막 안에 그려져 있던 것들이라는 말입니까?”
“그래. 수식 같은 것들도 섞여 있는 것 같던데. 무슨 의미인지 혹시 아는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허리를 숙이며 양해를 구한 연구원이 레오나드가 허락하자 종이를 들고 제 동료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끼리 잠깐 이야기가 오갔고 격양된 듯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릴 때쯤 연구원이 다시 돌아왔다.
심각한 얼굴이기는 했으나 무언가 엄청난 것을 발견했다는 듯 흥분한 기색이었다.
“폐하. 아무래도 이건 마법진인 것 같습니다.”
“……마법진?”
하지만 레오나드가 알기로 마법진은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
분명 예전에 어느 서책에서 봤던 마법진은 원형인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레오나드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이 쓴 종이를 쏘아보자 연구원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이건 마법진이 분명해요.”
“이런 마법진도 있나?”
“예. 드물기는 하지만 마법 자체를 숨기기 위해 이런 식으로 수식으로 늘어뜨려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 어떤 마법인지 파악이 가능한가?”
“파악은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원형의 마법진이었던 것을 순서가 뒤죽박죽되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조합해 보아야 하거든요.”
어쨌거나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 오두막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지.
어쩌면 이사벨에 대한 정보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얼마나 걸리지? 너무 오래 걸려서는 안 돼.”
“일주일 정도면 가능할 것 같아요. 최대한 빠르게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기록관, 다 적었나?”
“예! 다 기록했습니다, 폐하.”
기록관이 펜을 든 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기억이 흐트러져 기록관이 기록한 것을 쭉 확인한 레오나드가 곧장 몸을 돌렸다.
기사들 역시 곧바로 레오나드의 뒤를 따랐다.
“이제 여관으로 돌아가십니까?”
“그래. 아, 그 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예. 말씀하십시오.”
다시금 고개를 돌린 레오나드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물어보려는 건 다른 이에게 묻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건 로레이나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겠지.’
요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보니 잘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로레이나가 일기장을 건네주기로 약속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엘레노아가 수도에서 온 어린아이 하나를 맡아 가르친 적이 있다고.
‘아멜리오 백작 부인은 순혈 엘프야. 아무나 그녀에게 교육을 맡길 수 있지는 않았겠지.’
엘레노아가 가르쳤다는 어린아이는 신분이야 어찌 되었든 이종족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답은 딱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불쑥 떠오른 생각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잇새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가 백작 부인의 제자이셨던 건가.’
엘레노아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로레이나와 이런 식으로 엮여있었다니. 정말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빨리 가서 말을 해 줘야겠어.’
오두막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마 로레이나가 가장 궁금해할 것이었다.
그렇게 아픈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따라가려고 했었으니까.
한편, 기사는 계속해서 레오나드를 보는 중이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기사는 물어볼 게 있다고 해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레오나드가 이상했던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폐하?”
그에 기사를 잊고 있던 레오나드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춘 탓에 목 부근에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깍-.
‘뭐지?’
본능적으로 고개를 내린 레오나드의 시야에 어느새 옷 밖으로 나온 목걸이가 들어왔다.
상의에 달린 장식과 부딪혀 소리가 난 모양이었다.
선물을 준 사람의 눈을 닮은 푸른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보고 있던 레오나드는 대화를 접으려던 것을 관두고 질문을 바꾸었다.
“어제 아멜리오 백작이 들렸던 가게가 어디 있는지 혹시 아는 사람 있나?”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에 이 선물에 대한 답례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 *
“여기라고?”
“예, 폐하. 수제용품점인데 이 주변에서 평이 좋은 가게라고 합니다.”
진한 녹색으로 된 가게 문을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맞춰 기사가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딸랑-하는 종 특유의 청아한 소리가 가게 안을 잔잔하게 울렸다.
종소리를 들은 젊은 여자가 밝게 웃으며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로레이나가 왔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레오나드의 얼굴도 알아본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 황제 폐…….”
“내 초상화를 하나 부탁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하겠는가?”
“무, 물론입니다. 영광이에요!”
빠르게 움직인 주인이 곧장 자리를 잡고 레오나드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두막까지 가는 길도 어렵지 않았고 그 안에서 제법 중요한 단서도 찾았다.
수제용품점까지 오는 것도 로레이나와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기억을 몇 번 잊어버리긴 했으나 아직까지 로레이나에 대한 것은 레오나드에게 있어 마지막 보루와 같았다.
그러니 초상화가 완성되면 돌아가서 말해 줄 생각이었다.
힘든 일이 많아지겠지만 조금만 더 견뎌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너만 있으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아무리 잊어버린 기억이 있다고 한들 정신을 차렸을 때 옆에 너만 옆에 있다면 다 이겨낼 수 있다고.
그 달콤한 색채를 눈에 담을 수 있다면, 해사하게 휘어진 푸른 눈동자 안에 자신이 담긴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고.
이때의 레오나드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또한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이었다는 걸.
로레이나에게 줄 선물 가지고 여관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람이 바글거리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는데 꼭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마냥 주위가 술렁였다.
‘뭐지.’
들뜨던 기분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을 감추며 속으로 되뇌었다.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 거야. 로레이나에 관한 건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다독이던 말은, 저 멀리서 레오나드를 발견하고 펑펑 울면서 뛰어오는 다이아나에 의해 깨져버렸다.
“폐하, 로레이나가……!”
잘그락. 초상화가 맞게 들어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빼서 들고 있던 목걸이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마치 진창을 구르고 있는 그의 심장을 대변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