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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00화 (100/144)

#100화

살갗이 에일 만큼 시리다. 로레이나의 방에 들어선 레오나드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이제 완전하고 어엿한 봄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겨울 차디찬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손끝이 시렸다.

그만큼 한 발자국을 디디는 것이 어려웠다. 지금 레오나드의 앞길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레이나는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것을 누군가 옮긴 듯 그가 로레이나에게로 향하는 곳곳에 희미한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 과정이 영겁의 시간인 양 길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같은 이유로 눈물을 글썽일 사람들 곁을 지나치는 속도가 매우 더뎠다.

겨우 로레이나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도착한 레오나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시선을 내리자 그가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레오나드가 기대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얼굴이 지나치리만치 창백했다. 내뱉는 숨이 평소와 달리 미약하다.

“이게……무슨.”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상황에 레오나드가 뱉은 첫 마디는 고작 이거였다.

말도 안 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불과 한 시간 정도 전까지만 해도 그와 멀쩡히 대화하고 웃으며 배웅해 주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로레이나는 마치 숨을 거둔 것만 같았다.

중간중간 작게 오르내리는 가슴이라던가, 손끝을 대었을 때 느껴지는 희미한 숨 따위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언제나 봄 같던 색채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잠시 그 한기에 잠식되던 레오나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으면 어떡하지?

불쑥 든 생각이 레오나드의 가슴 속을 날카롭게 찌르며 파고들었다.

그 통증에 레오나드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다소 다급하게 두 입술이 서로 맞물렸다.

보는 이가 많다는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 로레이나를 빨리 치료해야 해. 레오나드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이었다.

신성한 생명력이 입술을 타고 로레이나에게로 넘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였으나 레오나드에게는 그마저도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언제나 부드럽던 입술이 메마른 가지처럼 버석버석하고 거칠다. 몸도 지나치리만치 차가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 아팠을 때와 다른 점이 많았다. 불안감에 레오나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 불온한 느낌은 적중했다.

‘생명력이 넘어가지를 않아.’

아니, 정확히는 넘어간 생명력이 몸에 흡수되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깨진 그릇에 물을 채우고 있기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허리를 든 레오나드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머릿속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더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레오나드가 같은 말만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아서 손으로 이마를 짚는데 뭔가가 묻어났다.

선명하고 강렬한, 끔찍하리만치 붉은 혈흔.

마치 로레이나의 혈색을 가져가기라도 한 것처럼 뚜렷한 색이었다. 레오나드가 매번 거울 속으로 마주하던 것과 같은 색채.

[결국 네 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왜 갑작스레 그 저주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데없이 떠오른, 300년 동안 레오나드를 옭아맨 끔찍한 족쇄에 그가 서둘러 로레이나를 감싸 안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그 말이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감싸 안은 몸이 너무 가냘프고 가벼웠다. 붙잡지 않으면 이대로 날아가 사라져 버릴 것 같다.

“……어서 빨리 마차를 준비해. 황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전하, 아멜리오 백작님의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의사라도 부르시는 게…….”

기사 중 하나가 뭐라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재빨리 기사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다이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명령하신 대로 서둘러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짧게 대꾸한 레오나드가 고개를 내리며 로레이나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로레이나만큼이나 새하얗게 질린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런 레오나드의 모습을 바라보던 다이아나가 기사를 끌고 다급히 움직였다.

“아직 상황을 모르시겠습니까? 폐하께서 치료를 포기하신 게 어떤 의미인지 말입니다.”

“그러니 의사를 부르자는 게 아닙니까. 폐하께서 힘에 부치셔서 그러실 수도 있으니…….”

“다른 누구도 아닌 로레이나입니다.”

기사의 말을 끊은 다이아나가 짓씹듯이 말을 뱉으며 눈을 비볐다.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손등에 훔쳐졌다.

“로레이나라고요. 그런데 고작, 힘에 부쳐서, 그렇다고요, 폐하께서요?”

정신이 없는지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짧게 끊어지는 다이아나의 말에 기사가 말을 멈추었다.

황제의 가까이에서 모시지는 않았으니 얼굴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로레이나 아멜리오.

오랜 시간 레오나드를 고통 속에 밀어 넣었던 저주가 유일하게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아.”

그제야 제가 뱉은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달은 기사가 조용히 탄식했다.

황제께서 유일한 안식처를 버렸다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알아들으셨으면 어서 빨리 황궁으로 갈 준비를 하세요.”

다이아나가 걸음의 보폭을 좀 더 넓히며 말을 이었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해요. 황궁은 드래곤의 둥지. 세계에서 신성한 기운이 가장 많은 곳이니까.”

지금도 로레이나의 몸은 계속해서 약해지고 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생명력을 넣어도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예 들이부어 줄 최적의 공간으로 가야죠.”

* * *

마차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렸다.

레오나드가 본체화해서 로레이나를 데리고 날아가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건 일찍이 기각되었다.

정신을 잃은 로레이나를 등에 태웠다가 그녀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로레이나를 붙잡아 둘 사람을 한 명 더 태운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나드는 현재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믿지 못했다. 혹시 모를 위험성은 전부 차단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초조한데 더한 걱정거리까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드래곤의 등 뒤에 탄 채 날아가는 건 로레이나도 원하지 않을 터였다.

로레이나를 제 무릎 위에 앉힌 레오나드가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로레이나의 턱을 조심스레 들고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하지만 여전히 생명력은 손아귀에 들어온 모래알처럼 스르륵 빠져나갔다.

심지어 들어가는 생명력보다 빠져나가는 양이 더 많았다.

자꾸만. 자꾸만 빠져나가서 이대로 가다가는 로레이나의 몸마저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네 번째.

이번에는 조금 더 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로레이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다섯 번. 여섯 번……열 번째에도 마찬가지였다.

로레이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레오나드는 결국 고개를 내려 로레이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잇새로 처절한 비명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제발 눈 좀 떠, 로레이나.”

말끝에 흐느낌과 원망, 증오와 같은 불순한 감정들이 뒤섞였다.

분명 북부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로레이나와 단둘이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러했는데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옆에서 재잘거리는 목소리도 손에 닿는 따스한 온기도 없었다.

너무 춥고 주변은 지나치리만치 조용했다. 그 소름 돋는 적막에 레오나드는 그만 제 목을 틀어쥐고만 싶었다.

왜 이리 신은 자신에게 가혹한가.

이미 300년을 홀로 지내게 한 거면 충분하지 않았냐고, 왜 기껏 얻은 유일한 구원마저 빼앗아 가려고 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얼굴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겠지. 자신의 선조는 본래 그런 존재였으니 말이다.

레오나드는 그제야 자신이 과거에 왜 제 능력을 달가워하지 않았는지, 왜 이를 축복이라고 여기지 않았는지를 기억해냈다.

그동안 로레이나를 치료하면서 맞본 달콤함에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치유 능력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 아니던가.

생명의 신이 제 핏줄을 버렸다는, 이 긴 시간을 홀로 살아가고 있노라면 깨달을 수밖에 없는 아주 당연한 사실.

그가 아직까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아주 티끌만큼의 관심이라도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어야 했다.

손이 닳도록 매일 빌었으니까.

능력을 거두어가도 상관없으니 대신 저주를 풀어 달라고. 이 지독하고 끔찍한 세상에서 제발 나를 구해 달라고.

볼 수 있는 얼굴이 오로지 제 얼굴뿐인 세상에서, 레오나드는 하루도 빠짐없이 괴로워했다.

오늘은, 내일은 또 어떤 기억을 잊어버릴까. 남아있는 기억이 있긴 할까 같은 말이 늘 입을 맴돌았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마저 떠나면 나는 정말로 혼자가 되는데. 이들이 배신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러면서도 언제나 신에게 빌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 망할 치유력도 여전했다.

지금 같은 중요한 순간에 제 역할도 하지 못하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도대체 뭘 하면 되는 건데.”

왜 꼭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로레이나가 위험해질까. 정말 중요한 일이어서 자리를 비웠던 건데 왜 늘 일이 이 모양일까.

‘레오나드.’

오두막으로 가기 전, 로레이나가 저를 부르며 옷소매를 잡던 순간이 불쑥 떠올랐다.

어쩌면 그게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시금 고개를 내민 죄책감이 레오나드를 갉아먹었다.

그 어둡고 끈적거리는 것들에 그가 저 아래 낭떠러지로 처박힐 때쯤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마차가 멈춰있었다.

“폐하, 다이아나입니다.”

“누가 마차를 멈춰도 된다고 허락했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살기와 함께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잠시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다이아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생각해 보니 꼭 지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부득이 마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

“황궁에 도착하고 나서는 너무 늦을 것 같아요. 그러니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잠시 기다렸으나, 마차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 침묵이 일종의 허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었더라면 곧장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니.

현재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차 문을 연 다이아나는 혹시 몰라서 곧장 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꺼내 보기도 전에 사망하는 것은 곤란했다.

“이것 좀 보세요, 폐하.”

레오나드가 여전히 날카로운 기운을 갈무리하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곧 다이아나가 준 네모난 물건이 잡혔다.

“책?”

아니, 책이 아니다.

래오나드는 황궁을 떠나기 전 이 물건을 본 적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레이나의 어머니인 엘레노아의 일기장이었으니까.

레오나드가 일기장을 살피는 것을 본 다이아나가 다시금 마차를 출발시켰다.

한참이나 일기장을 보던 레오나드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이게 중요한 이야기인가. 일기장이 뭐 어쨌다는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겉면을 좀 보세요.”

다이아나가 손을 뻗어 색이 바랜 표지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레오나드가 기억하는 마지막과는 다르게 일기장이 좀 낡아 있었다.

아니, 조금 정도가 아니었다. 일기장은 세월의 풍파를 한 번에 직통으로 맞은 듯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본 다이아나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안에도 보세요. 글씨가 다 사라졌다고요. 무언가 느낌이 오시죠?”

“…….”

“로레이나가 쓰러진 건 일기장이 백지인 걸 확인한 다음이에요.”

“그렇다는 건.”

“네. 글씨가 사라진 시기와 로레이나가 쓰러진 시기가 맞물린다는 거죠.”

황궁을 떠나기 전에 보았을 때는 일기장 상태가 이 지경은 아니었으니 확실했다.

생각을 굳힌 다이아나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무래도 이 일기장, 로레이나가 저렇게 된 이유와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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