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01화 (101/144)

#101화

‘……일기장 때문이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레오나드가 조용히 신음했다.

말도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고작 일기장 하나 때문에 로레이나가 이렇게 되다니.

그런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려고 마차를 세웠던 거냐며 따지려던 레오나드는 얼마 안 가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붉은 눈동자가 살짝 내리깔렸다. 인상도 잔뜩 구겨졌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그리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던 탓이었다.

로레이나의 몸이 안 좋아졌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레오나드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차분히 로레이나의 최근 몸 상태에 대해 떠올렸다.

곁에서 지켜본 로레이나는 체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혹시 정해진 미래대로 죽기라도 할까 봐 위험한 행동은 꺼려서인지 즐기는 운동도 딱히 없었다.

그러나 4년 전에 아멜리오 백작가에서 같이 뛰어놀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약한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상태가 나빠졌다. 누군가 그녀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것처럼.

신의 축복을 받은 몸이라 다른 사람에 비해 병에 걸릴 확률은 현저히 낮을 텐데도 불구하고.

‘처음 로레이나의 몸 상태가 안 좋아졌던 때가 언제였지?’

로레이나를 안은 팔에 힘을 준 레오나드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행히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일이라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확히 귀족 회의가 있었던 날이었다.

‘저는 방으로 돌아가서 좀 쉴래요.’

‘몸이 안 좋아?’

‘조금요. 잠깐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거 같아요.’

방까지 데려주겠다는 말에 손사래를 쳤었지. 그렇게 혼자 돌아가던 로레이나는 아이작 데프론을 만났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서 일기장의 글씨가 반 정도 사라진 걸 확인했다고 했어.’

그래. 바로 그 날이었다.

일기장의 글씨가 처음 사라졌던 것도. 로레이나가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던 것도.

모두 같은 날이었다.

“아.”

어쩐지 소름이 끼쳐서 레오나드는 뭐라 더 말하지도 못하고 작게 탄식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까? 시기가 그렇게나 딱딱 맞아떨어졌는데.

‘정말 일기장과 연관이 있는 건가.’

당연히 개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이아나의 말이 정말 맞았던 모양이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 레오나드가 말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다이아나는 그의 표정으로 제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 자신감이 붙은 다이아나가 몸을 좀 더 앞으로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만지고 있던 손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제 당장 목이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지금 제 의견에 동의하는 중이시죠? 일기장이랑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다.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이아나가 레오나드의 손에 쥐어진 낡은 일기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본래 색이 어땠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하얗게 색이 바랜 겉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이 일기장은 뭘까요. 저게 무엇이길래 조금 낡았다고 로레이나가 저렇게 아파하는 걸까요?”

물론 어떻게 봐도 조금은 아니긴 하지만. 다이아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불안감에 뛰는 제 심장 소리와 뒤섞여, 마치 배경음처럼 깔렸다. 레오나드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정말 뭘까. 이 일기장은.

레오나드가 엘레노아의 일기장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 안에 제 아비와 ‘이사벨’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하나 더 있긴 했다.

일기장의 주인이 제 딸인 로레이나가 아멜리오 백작가를 떠나게 될 시, 반드시 일기장을 넘겨받도록 조치해 두었다는 것.

백작저를 벗어나게 되면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어찌나 집사에게 신신당부를 해 두었는지, 황궁으로 가겠다는 로레이나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황했을 텐데도 일기장은 잊지 않고 건네주지 않았던가.

꼭 밖을 나설 때마다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로레이나처럼.

로레이나는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저를 보호해 줄 호위 기사를 한가득 데리고 나가는 건 잊지 않았으니까.

레오나드는 저가 아멜리오 백작저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적, 크루시아 축제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로레이나는 놀러 가는 중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기사를 이끌고 나갔었다.

그때는 솔직히 조금 과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제 부하가 에녹 데프론을 암살하려던 것을 생각하면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마터면 그 화살을 로레이나가 맞을 뻔했으니까.

자신을 부르려 뒤를 돌아보던 로레이나의 앞으로 화살이 날아와 바닥에 꽂히던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그렇게 했던 것이 당연하지.’

제 몸을 보호해 주는 것이라면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이 맞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레오나드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놀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보호막.”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폐하?”

다시금 로레이나를 살피던 다이아나가 물었다. 하지만 레오나드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수도 북부에서 수상한 여자를 마주했다고 했던 날, 로레이나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나뿐인 보호막이 사라져간다고 했어요.’

‘레오나드 옆에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냐고도 했고요.’

그때는 도통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 말들이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알고 있었던 거다. 일기장이 점점 낡아가고 그 안의 글씨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이 일기장이, 로레이나를 지키는 보호막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 단정은 짓지 말아야…….’

아니. 확실하다. 레오나드의 마음이 그렇게 속삭였다.

일기장이 보호막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다.

일기장의 글씨가 사라질수록 로레이나의 몸이 약해졌던 것도, 엘레노아가 제 딸이 일기장을 가지고 가도록 조치를 해 놓은 것도 말이다.

이전에는 로레이나가 늘 백작저에서 지냈으니 일기장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로레이나가 가지고 다니지 않았을 뿐, 일기장과 같은 공간에 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엘레노아 님은 로레이나가 위험해질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건데.’

어떻게 그것을 미리 알았던 거지? 그리고 일기장이 정말 로레이나를 보호해 온 것이 맞는다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잠시 고민하던 레오나드의 머릿속에 자신의 저주가 스쳐 지나갔다. 저주로 인해 세상을 떠난 제 부모가 떠오른 탓이었다.

엘레노아가 있을 당시에도 존재했던, 로레이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라면 이사벨이 건 저주뿐이지 않은가.

엘레노아가 제 아비인 칼리드와도 친밀한 사이였다면 필시 저주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좀 이상한데.’

로레이나가 저주의 예외 대상이라 믿었던 하프 엘프인 건 둘째 치고, 조금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사벨의 저주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생명의 신의 핏줄이자 순혈 드래곤이었던 칼리드 히르 데르키안도 제 아들이 태어난 뒤 몇 달밖에 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만큼.

분명 그랬는데…….

‘그렇다면 로레이나는 여태까지 어떻게 멀쩡하게 살아온 거지?’

정말 저주가 그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면 현재 로레이나와 12살 이전의 로레이나가 살아간 그 몸은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숨을 쉴 수 있었단 말인가.

보호막인 일기장이라도 진즉에 낡기 시작했었다면 또 모를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로레이나에게 듣기로 처음 집사에게 받았을 때의 일기장은 새것처럼 멀쩡했다고 했었다.

레오나드 역시 글자가 반 정도 사라진 다음이긴 했지만, 겉면이 깨끗했던 일기장을 보았으니 이는 확실했다.

‘그럼 정말로 일기장이 낡기 시작한 건 최근이라는 건데.’

갑작스레 보호막이 사라진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일기장에 변화를 줄 만한 일이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지난 6년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았었던 일이.

“다이아나.”

“네?”

갑작스레 들린 제 이름에 다이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앓고 있는 로레이나가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다이아나는 여전히 그녀를 살피는 중이었다.

“혹시 로레이나가 최근에 뭔가 말했던 거 없었어? 갑자기 달라진 점이라던가.”

“달라진 점이요? 글쎄요. 그건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무슨 말이냐는 듯 레오나드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자 다이아나가 말을 이었다.

“로레이나랑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많았던 건 폐하시잖아요.”

“……나 역시 생각해 보고 있으니까 좀 떠올려봐. 아주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까.”

“으음.”

대화중에도 로레이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다이아나가 조용히 신음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다이아나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달라진 점이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없네요.”

“역시 그런가.”

“네. 폐하께서도 바로 안 떠오르시는 걸 제가 생각해낼 리가 없죠.”

멋쩍은 듯 살포시 미간을 구기며 하는 말에 레오나드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도 같은 여자니까 나 몰래 로레이나가 뭔가 말했던 건 아닐까 했어.”

“아는 게 없어서 괜히 죄송하네요.”

다이아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민했다. 로레이나가 제 목숨이라도 되는 양 끌어안고 있는 레오나드가 너무 안쓰러워서 뭐라도 기억해내고 싶었다.

‘……최근 달라진 점이라.’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집고 이리저리 헤쳐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다이아나가 중얼거렸다.

“최근 달라진 거라곤 로레이나가 폐하를 따라 황궁에 왔다는 것뿐인데…….”

“뭐?”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레오나드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에 놀란 다이아나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갈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로레이나가……폐하를 따라 황궁에 온 것밖에 생각 안 난다고……했는데요.”

“……바로 그거야, 다이아나.”

“네?”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 말에 레오나드가 작게 읊조렸다.

“로레이나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보다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이 문제였다.

최근 로레이나 주변의 가장 큰 변화. 그녀의 인생의 전환점.

바로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이었다.

“황궁으로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나를 따라오면서……몸이 약해지기 시작한 거야.”

레오나드의 고개가 밑으로 처박혔다. 자조적인 목소리에 다이아나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돼요. 로레이나는 4년 전에도 폐하와 함께 있었잖아요.”

무려 반년간 함께했지만, 로레이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잘 뛰어놀았고 무척이나 건강했다.

그러니 이제 와 레오나드가 곁에 있는 것이 문제라고 보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니까, 레오나드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는 내가 성체가 아니었으니까.”

“…….”

“성체가 되면서, 저주의 힘도 강해진 거야.”

로레이나는 하프 엘프라서 저주의 영향을 피해간 것이 아니었다.

저주의 영향력도 애초부터 약해진 적이 없었다. 무려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힘은 여전했는데 그것을 몰랐다.

그저 일기장이 저주로부터 로레이나를 보호해 주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성체가 된 레오나드의 저주가, 그것을 아주 빠르게 거침없이 갉아먹었다.

손에 들린 낡아빠진 일기장이 레오나드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위로 로레이나를 처음 만났던 날이 겹쳐졌다.

로레이나가 제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곤란해 보이는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했던 날이었다.

기억을 곱씹던 레오나드의 눈에 그제야 당시 로레이나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본 얼굴에 기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럴드를 만나기 전부터 어디 아픈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던 것이. 속이 안 좋은 듯 자꾸만 가슴께를 꾹꾹 누르던 모습이.

“아아.”

아니다. 이번에 로레이나를 황궁으로 데리고 온 것이 시작이 아니었다.

첫 만남부터 자신은 천천히 로레이나의 보호막을, 아니 그녀의 생명을 좀 먹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살기 위해 저를 찾았다고 말하는 로레이나에게 남자 주인공이라 다행이라는 말을 웃으며 지껄였다.

아득한 기분에 레오나드는 로레이나가 쓰러진 것을 처음 알았을 때의 상태로 돌아갔다. 다시금 제 목을 틀어쥐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문제는, 아까와 달리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다는 점이었다.

“폐하!”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다이아나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레오나드가 제 목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손은 좀처럼 목을 조르지 못하고 자꾸만 엇나가 애꿎은 생채기만 남겼다.

그것을 보다 못한 다이아나가 손을 올렸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폐하.”

퍽. 다소 과격한 소리가 마차 안을 울리고 뒷덜미를 가격당한 레오나드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목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셔츠 자락을 살짝 적셨다.

그것이 꼭 레오나드가 미처 흘리지 못한 눈물 같다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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