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셀리아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하고 물었다. 질문은 매우 간단했다.
초상화 속 여인이 다이아나 헨티슨이 맞느냐.
다이아나 헨티슨은 레오나드의 측근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인물. 그러니 누가 보기에도 그가 금방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드에게는, 누구에게나 쉬운 그 물음이 당장 아이작 데프론을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만큼 어려웠다.
‘이걸 어떻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레오나드가 조용히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여느 인간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목구비가 흐릿한 초상화 속 여인은 다이아나처럼 갈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언뜻 보면 다이아나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외양이었다.
‘하지만 아닐 가능성이 있으니 그냥 답할 수는 없어.’
갈색 머리가 아니었다면 속 시원하게 다이아나가 아니라고 말할 텐데 이러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여자는 옆에 있는 제럴드를 내버려 두고 왜 하필 자신에게 물은 걸까.
‘차라리 정말 사람을 데리고 왔으면 나았을 텐데.’
그렇다면 상대의 감정이나 목소리를 통해서라도 파악할 수 있었을 테니까.
생김새만으로 누구인지 파악하려니 저주에 걸린 레오나드에게는 곤혹이 따로 없었다.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 초조해졌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야속하게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이제 정말 대답을 안 하면 이상한 정도가 되었을 때, 레오나드는 결국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이 영애는…….”
“아아악!”
레오나드가 그냥 맞다고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비명을 내지른 제럴드가 손을 뻗어 앞에 있던 초상화를 거둬갔다.
“이, 이건 제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난데없는 상황에 레오나드를 바라보던 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제럴드에게로 옮겨갔다.
그냥 그뿐이었는데도 레오나드는 한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꼭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다 걷어지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초상화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 그게…….”
“혹시 헨티슨 영애가 아닌 건가요?”
셀리아가 눈썹을 늘어뜨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래서 폐하께서 대답을 못 하셨…….”
“아, 아닙니다!”
다시금 레오나드에게 향하려는 시선에 제럴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단순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상황을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 눈물겨운 사투였다.
“이 초상화는 다이아나의 것이 맞습니다.”
“그러면 왜…….”
“그게……이 초상화가 잘못 나왔다고. 새로 그리고 싶다고 다이아나가 말했었거든요.”
“아아.”
“그런 초상화를 영애가 봤다는 걸 알면 다이아나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영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거든요.”
어쩐지 개소리로 보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것을 느끼면서도 제럴드는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흐윽. 폐하. 저 보상 두둑이 주셔야 합니다. 휴가도 주셔야 해요.
“아, 그러셨군요! 귀여우셔라.”
“혹시 나중에 만나게 되더라도 이 초상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죠.”
셀리아가 즐겁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제럴드는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마주 웃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지나가긴 했지만 방금 분명…….
‘……비웃지 않았었나?’
얼굴 위로 선명하게 드러내었던 감정에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의 그건 좋은 감정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걸 대놓고 물어보거나 눈치챈 티를 내는 것도 웃긴 짓이라 레오나드는 다시금 인내했다.
이 어딘가 찝찝한 느낌은 다 착각일 거라고.
그리고 그 생각에 확신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셀리아는 말갛게 웃어 보였다.
“어서 빨리 헨티슨 영애를 만나고 싶네요. 너무 기대되어요. 혹시 지금 만날 수는 없을까요?”
“아, 지금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많이 바쁘신 걸까요?”
“황실 기사단이 지금 수련 중이어서요. 나중에 시간 맞춰서 초대하겠습니다.”
“전 언제나 좋아요! 영애가 여는 파티는 어떨지 설레요. 칵테일을 무척 잘 만드신다고 들었거든요.”
“칵테일하면 다이아나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아마 즐거우실 겁니다.”
“아무래도 저는 엄청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첫 또래 친구가 이렇게 멋진 분이라니…….”
잠시 생각하던 셀리아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또래 하니까 생각이 난 건데요. 저 황궁에 오면 꼭 만나 뵙고 싶은 분이 있었어요!”
그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녹색 눈이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찌나 꼼꼼히 보는지 방 구석구석까지 살피려는 기색이었다.
이러다가 제 뒤에 있는 커튼 너머까지 시선이 닿을 것 같은 예감에 레오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아, 그게…….”
“만나고 싶으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어.”
다행히도 레오나드의 물음에 셀리아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대답이 레오나드가 원하는 방향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멜리오 백작님이요! 백작님도 저와 비슷한 나이라고 들었거든요.”
“……백작을 만나고 싶다고?”
“네! 그 유명한 하프 엘프시잖아요. 오라버니와 아버지께서 많이 이야기하셨거든요. 그래서 꼭 만나고 싶었는데…….”
다시 한번 주위를 살핀 셀리아가 시무룩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안 계신 모양이네요.”
“그래. 백작은 지금 여기 없어.”
아멜리오 백작은 따로 지시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
애초부터 이 자리에 있는 이들과 그렇게 입을 맞춰 놓았기에 레오나드는 그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뭐, 굳이 이렇게 변명하지 않아도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로레이나가 아프다고는 생각 못 할 테니.’
하프 엘프인 로레이나는 아플 일이 없는 건강한 몸이라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었으니까.
신의 축복이라는 힘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일종의 환상이었다.
‘실제로는 병으로 죽지 않는 것일 뿐 낮은 확률로 질병에 걸리기도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이종족이 자리를 비울 만큼 아픈 경우는 거의 없으니 애초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종족은 아파 봤자 가벼운 감기 정도의 증상만 보이다가 끝난다.
그러니 셀리아는 로레이나가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다음에 시간이 맞을 때 보았으면 좋겠다고, 정말 기대된다고.
다이아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처럼 그렇게 웃으며 넘겼어야 했다.
“혹시 몸이 안 좋아서 쉬고 계신 걸까요? 어디가 많이 아프신 건지…….”
“…….”
“아, 그러고 보니 북부에 갔을 때 오두막도 못 올라가셨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걱정하는 체하며 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굳이 드러낼 것이 아니라.
“……너 뭐야.”
“네?”
“네 정체가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레오나드가 겨우 유지하고 있던 웃는 낯을 집어던지고 물었다.
방금까지 대화하고 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변화였다.
적안이 품은 특유의 색감과 달리 눈빛이 내뿜는 기운이 살갗이 에일 정도로 차가웠다.
갑작스러운 제 주인의 행동에 제럴드가 식은땀을 흘리며 다가왔다.
“폐, 폐하…….”
“뒤로 물러나 있어, 제럴드. 방해되니까.”
제럴드의 앞을 막은 레오나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셀리아가 앉아 있는 반대편 쪽으로 향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셀리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몸을 떨었다.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폐하?”
“……하. 갑자기 왜 그러냐고?”
“네. 저, 저는 도무지 왜 그러시는지…….”
아까와 달리 눈앞의 이가 위협적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녹색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대로 졸도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에 레오나드는 곧장 셀리아의 옆쪽으로 서 있던 기사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검집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울렸다.
곧 제 목에 들이 밀어진 칼날에 셀리아가 크게 숨을 삼켰다.
“너는 내가 아주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지.”
“…….”
“그따위 말을 뱉어놓고 내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어줄 거라 생각하나.”
“무, 무슨…….”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는지 셀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사이, 녹색 눈동자 위로 많은 감정이 오갔다.
다른 사람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아주 찰나였다.
곧 보는 것만으로 안쓰러울 지경이었던 가냘픈 몸의 떨림이 멎고 녹색 눈의 흔들림 또한 사라졌다.
“아.”
작게 탄식한 셀리아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입가에 다시금 말간 미소를 띠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웃음이었지만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어쩐지 섬뜩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기괴한 모습에 옆에서 레오나드를 말리려던 제럴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런.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네요. 오두막이라니. 측근도 아닌 제가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그래. 황궁 안에서도 몇 사람밖에 모르는 걸 내 앞에서 잘도 지껄이더군.”
레오나드가 검날을 하얀 목으로 조금 더 가까이 대며 읊조렸다.
이 자리에 로레이나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바로 그녀가 아픈 것이라 생각한 것도 이상한데 오두막까지 언급했다.
오두막에 관한 건 철저하게 비밀리에 부쳤는데도 불구하고.
레오나드와 로레이나. 그리고 헨티슨 가문의 주요 인물 몇을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런 사실을 셀리아 데프론이 알고 있다는 건 결국 이 여자도 아이작 데프론과 동류라는 뜻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이작보다 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목에 칼이 닿아있는 상태에서도 여유로운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진짜 이 여자가 마녀라도 되는 건가.’
제 여동생이 마법을 부린 것 같다던 에녹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로레이나가 말한 그 책 속의 ‘셀리아’라는 존재도.
그리고 실제로 로레이나는 북부에서 마법을 부리는 여자를 보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이 여자일지 몰라.’
그날, 로레이나가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든 게 이 여자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여관 안으로 뛰어 들어왔던 로레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러지기라도 할까 늘 귀중하게 대하던 팔에 시퍼렇게 멍 자국이 남아있었던 것도.
‘……그냥 죽일까.’
이 여자를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가 뭐지?
불쑥 든 생각에 레오나드가 검을 쥔 손을 움직였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금 여기서 조금만 움직여도 이 여자는 죽을 거다. 레오나드는 정말 이를 실행에 옮길 생각이 있었다.
이전에 생각했던 대로 레오나드는 정말 로레이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니까.
갑작스레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하하.”
반쯤 정신을 놓은 듯한 레오나드를 보던 셀리아가 작게 웃었다.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가더니 천천히 열렸다.
“후회하실 텐데요.”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저주를 풀어줄 사람, 찾고 계셨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