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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06화 (106/144)

#106화

말을 마친 셀리아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낯이 마치 하루의 끝자락에 인사라도 건넨 것 같은,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느낌이라 듣는 사람이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뱉은 말이 담고 있는 파급력은 그런 인사 따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셀리아가 언급한 저주는 그녀가 절대로 알고 있어서는 안 되는 레오나드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니까.

“……하.”

레오나드의 잇새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몸 깊숙한 곳부터 끓어오르던 분노가 이제는 한계치를 넘어 차게 식어갔다.

“방금 저주라고 했나?”

“…….”

“내가 지금 이 칼을 휘두르면 후회할 거라고?”

붉은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며 번뜩였다. 이사벨의 저주는 레오나드의 평생을 갉아먹은, 탄생 전부터 그와 함께해 온 일종의 역린이었다.

그런 금기어를 이 여자가 태연하게 제 앞에서 내뱉었다. 로레이나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이가.

귓가에 인내심이 뚝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까부터 조금씩 새어 나오던 레오나드의 기운이 제 주인의 상태에 맞춰 날카로워졌다.

숨을 뱉을 때마다 그 칼날 같은 기운이 짙어지는 것이, 이러다가 주위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기라도 할 기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응접실 분위기를 내기 위해 방에 급히 가져다 놓은 소파의 가죽이 곧 찢어졌다. 소파 팔걸이의 금속 장식에 이리저리 흠집이 났다.

어느새 셀리아는 레오나드에게 밀려 소파 등받이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미처 힘을 조절하지 못한 힘에 의해 조금 밀린 칼날은 셀리아의 여린 목에 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레오나드가 노리고 있는 것은 목뿐이었지만 다른 곳도 위협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피해 가고는 있으나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이 기운은 곧 셀리아의 몸까지 갈기갈기 찢어놓을 터였다.

그야말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었다.

레오나드의 생각대로 조금만 더 움직이면 셀리아는 그대로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셀리아는 웃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아주 여유롭고 매끄럽게.

“아니라고 하실 수 있나요? 매일 밤 간절히 비셨을 텐데.”

“…….”

“부디 이 저주를 거두어 가달라고.”

말을 마친 셀리아가 다시금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이 이 방을 처음 들어올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꼭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레오나드는 알았다.

이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아이작 데프론에게 이용당하는 희생양이 아니었다.

셀리아 데프론. 이 여자는 절대로 누구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남의 평판을 신경 쓰는 그 데프론 공작이 어느 정도 욕을 먹을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파티를 열었다.

고작 제 양녀 하나를 위해.

최근 일어난 모든 일이 다 이 사람의 손바닥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쯤은 굳이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레오나드가 입매를 뒤틀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아, 그래.

“정말…….”

역시 그냥 없애버려야지.

“가지가지 하는군.”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겼다. 불길이 인 적안에 살기가 더해졌다.

쨍그랑!

아까보다 더 거세진 기운에 소파의 금속 장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탓에 이리저리 날린 파편이 레오나드와 셀리아의 뺨에 각기 다른 상처를 남겼다.

단숨에 베어버리려는 듯 높게 들린 검이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그 칼끝이 하얀 목덜미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제럴드가 레오나드의 뒤쪽에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만하십시오, 폐하!”

“이거 놔.”

“제발 진정하세요!”

안간힘을 다해 매달린 제럴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셀리아 데프론이 위협적인 인물이라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아직 아무 증거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게 셀리아 데프론이 죽어버리면 레오나드는 귀족사회에 갓 들어온 영애의 목숨을 앗아간 폭군에 불과하게 된다.

게다가 셀리아는 공식적인 초대를 받고 황궁에 온 상황이다.

아무리 변명한들 셀리아가 황궁에서 죽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니 아이작 데프론이 어떤 방식으로든 레오나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데프론 공작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래. 역시 이런 식은 아니야.’

무언가 레오나드를 말릴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지금 폭주 상태인 그를 멈출 수 있는 무언가.

다시금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제럴드의 시선이 제 뒤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방 한쪽에 쳐놓은 커튼에.

“폐하.”

“…….”

“계속 이러시면 더 버티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간신히 상태가 안정되지 않았습니까.”

제럴드가 레오나드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 작은 소리에 레오나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금세 알아차린 탓이었다.

셀리아를 의식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레오나드의 신경이 곧 커튼 너머에 있을 누군가에게로 집중되었다.

제럴드의 말이 맞았다.

로레이나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였다. 오늘에서야 겨우 안정적인 호흡을 하게 되지 않았는가.

여기서 더 했다가는 기껏 회복시켜놓은 것이 없던 일이 될지도 몰랐다.

사태를 파악한 레오나드가 점점 몸에 힘을 풀었다. 덩달아 사라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그제야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의 숨통이 좀 트였다.

제럴드가 더 빨리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들도 무사하지는 못했으리라.

모두가 한마음으로 안도하는 가운데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낯으로 웃고 있던 셀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을 들어 목에 살짝 흐르는 핏방울을 훔친 셀리아가 조금 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못 믿으시겠다면 보여드릴까요?”

“…….”

“제가, 폐하의 구원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요.”

셀리아가 뱉은 말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레오나드의 낯에 다시금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지금 기분이 엉망진창이겠지. 셀리아는 그가 얼마나 비틀린 상태일지 알았다.

저 저주는. 다름 아닌 제가 300년 전에 직접 건 마법이었으니까.

머릿속에 잠시 그때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눈을 감으면 항상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그때의 제가 어떤 심정으로 그 저주를 걸었는지가.

셀리아는 천천히 힘을 끌어모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금 고개를 들자 눈앞에 간신히 이성을 끈을 잡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 보였다.

저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주었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이와 꼭 닮은 낯이.

정말 기분 거지 같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작게 읊조린 셀리아가 사르르 눈꼬리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덜 닮았더라면 그냥 다 죽여 버리고 끝냈을 텐데.

“잘 보세요, 폐하.”

“관심 없으니 그냥 눈앞에서 꺼져.”

“보시면 더는 그런 험한 말은 못 하게 되실 테니까요.”

분명 날카로운 음성을 들었을 텐데도 셀리아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굴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기색이 아닌지라 레오나드는 뭐라 더 말을 얹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금 제 뒤쪽에 집중했다.

혹시 아까 기운을 방출한 것이 많이 해가 되었을까.

조금만 더 참았어야 했는데. 적어도 여기서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떻게 돌려놓은 상태인데 고작 그것을 못 참아서.

귓가에 미약하게 들려오는 숨소리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심장은 쿵쾅거리고 점점 초조해졌다.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지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냥 눈앞의 여자를 무시하고 달려갈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앞에서 환한 빛이 번뜩였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반짝임에 레오나드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 눈부심의 출처는, 당연하게도 셀리아 데프론이었다.

손바닥에 환한 빛무리를 가득 담은 여자가 빙그레 웃더니 그것들을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마치 뭐에 끌리기라도 하듯 빛들이 그녀의 상처로 스며들어 갔다.

빛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남긴 상처도, 파편이 남긴 흔적도. 그 어느 것도.

“말도 안 돼…….”

누가 뱉었는지 모를 음성이 방 안을 나직하게 울렸다.

상처가 한순간에 말끔히 치유되었다. 이 말이 뜻하는 의미는 하나였다.

셀리아 데프론의 말 따라 정말로 그녀가 마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

생명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도 아닌 그녀가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가능성은 마법뿐이었으니까.

레오나드가 차마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직까지 살기 가득한 시선이었지만 셀리아는 알았다. 그 복잡한 감정 속에 미약한 희망이 섞여 들어가 있다는 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셀리아는 그가 300년 동안 애타게 찾던 존재였을 테니.

물론 선택하라면 고민할 새도 없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백작을 고르겠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갈까?’

아니,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얼마나 있을까?

녹색 눈이 이 방에 있는 이들이 숨기려고 애쓰는 커튼 너머로 향했다.

로레이나 아멜리오라고 했던가.

확실히 커튼 너머로 느껴지는 기운이 지난번 북부에서 만났을 때보다 현저히 약해져 있었다.

이쯤 되면 저 남자도 알았겠지. 저 사랑스럽고 증오스러운 아가씨가 아픈 건 다 저 때문이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고 놓을 수도 없겠지.’

그렇다면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셀리아, 아니 이사벨은 그 광경을 가까이에서 전부 지켜볼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제 능력을 조금씩 보여주면서, 그의 희망을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잠깐 장난 좀 쳐볼까.’

힐끗 레오나드 쪽을 본 이사벨이 그 몰래 손을 살짝 휘저었다.

아까보다 약한 빛무리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커튼 사이로 쏙 들어갔다.

‘자기가 왜 이리 고통받는지는 알고 당하는 것이 좋겠지.’

이사벨이 아까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웃었다.

아이작 데프론은 얼른 제가 눈앞의 하프 드래곤을 치워주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그녀는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와 가장 증오하는 여자의 결실이라니.

그냥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래. 그래서 그런 것이다.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야.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인 이사벨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잘 생각해 보세요, 폐하.”

그의 절망을 기대하며.

“폐하께 정말로 필요한 이가 누구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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