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16화 (116/144)

#116화

“그게 무슨…….”

이사벨이 멍하니 말을 뱉었다.

방금 들은 말이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칼리드는 그런 이사벨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여기 올 일은 이제 없을 거야. 레아도 마찬가지고.”

“스승님이야 밖에서 따로 만나면 되는 거니까. 굳이 여기 오지 않아도 되겠지. 진즉에 이렇게 해야 했는데.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여러 말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이사벨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칼리드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뗐다.

“……그날 너를 구하는 게 아니었는데.”

원망하는 기색이 명백하게 느껴지는, 낮고 선명한 음성.

“아.”

그에 이사벨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게 끝이었다.

말을 하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이사벨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의미 없는 탄식만 반복했다.

고장 나버린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이사벨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집 안에 잠시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귓가에는 소파에 누워 잠이 든 레아의 옅은 숨소리만 이따금 들려왔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밖에서부터 들린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등장한 엘레노아였다.

“아까 내가 놓고 간 케이크, 레아는 먹으면 안 돼!”

다급한 얼굴로 집에 들어선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집 안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탓이었다.

엘레노아의 시선이 가만히 서 있는 칼리드와 이사벨에게로 향했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시나몬 빼달라고 말한 걸 까먹었다고 방금 연락이 와서…….”

“…….”

“그래서 레아는 먹지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잠깐 머뭇거리던 엘레노아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세상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에 삐비빅-하는 새 특유의 소리가 들렸으나 당연하게도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연과 타이밍이다.

칼리드가 조금만 더 늦게 말했더라면, 아니 엘레노아가 조금만 더 빨리 들어왔더라면…….

하지만 그렇게 아쉬워하며 지난 일을 돌이켜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것을 칼리드 역시 깨달은 것 같았다.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던 적안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잠깐만, 이사벨.”

“…….”

“그러니까 나는…….”

“하하.”

별안간 들린 웃음소리가 칼리드의 말을 끊고 들려왔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의 출처는 쭉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굳어있던 이사벨이었다.

짧게 웃음을 터뜨린 이사벨이 곧 실성이라도 한 듯 연거푸 웃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착각일까. 맑기 그지없는 그 소리가 어쩐지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

“어리광이라고요? 그날 나를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다고요? 내가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뻔히 알면서.”

“이사벨 그건…….”

칼리드가 말을 뱉으며 이사벨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가 그만큼 뒤로 물러난 탓에 별 소용은 없는 일이었다.

“늘 궁금했어요. 내가 왜 저 여자를 좋아해야 하는지. 제가 발작을 일으키고 난 뒤부터 계속 그러셨죠. 무슨 강요라도 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니까, 친해지라고.”

“그건 네가 너무 레아를 경계하는 것 같으니까, 빨리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가 왜요? 저 여자의 뭘 믿고? 전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저도 알아서 좋은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이사벨.”

칼리드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그에 이사벨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지난 1년간 쌓아온 것을 터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금껏 내가 만나왔던 인간들이 다 모두 저랬어요. 처음에는 웃으면서 호의적으로 다가와도 내가 힘을 쓰면, 자기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면 곧장 괴물 취급했다고요. 정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전부.”

“……알아. 그래서 인간을 싫어하는 거.”

“네 맞아요. 저 인간이 너무 싫어요.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스승님하고 전하께서 분명히 그러셨잖아요. 저는 미워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언제까지고 곁에 있어 줄 테니 걱정 말고 미워하라고.”

“…….”

“그렇게 말씀하셔놓고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니까 바로 생각이 바뀌시던가요? 험하게 말하면서 괴롭혔다고 바로 살인자로 몰 만큼?”

말을 뱉을수록 이사벨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녀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킬 거 같다는 신호였다.

이대로는 큰일이 날 것 같았는지 지켜보던 엘레노아가 앞으로 나섰다.

“일단 진정하자, 이사벨. 아무래도 칼리드가 오해를 한 모양이야. 상황이 좀 그랬으니까 네가 조금만 이해를…….”

“상황이요? 아, 그래. 저도 잘한 거 없죠. 알아요.”

이사벨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래도 맹세코 그 여자가 죽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제가 한 번도 마법을 쓴 적이 없다는 거, 그 여자한테 손댄 적은 없다는 거 조금만 생각해도 아셨을 텐데.”

“…….”

“아무리 그래도 저한테 먼저 물어는 보셨어야죠. 저는 그 케이크에 시나몬이 들어있는지도 몰랐다고요.”

말 뒤에 자조적인 웃음이 내려앉았다. 칼리드와 엘레노아 둘 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깐 대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소파에 누워있던 레아가 옅은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칼리드와 엘레노아의 눈빛에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한 경계심이 생겼다는 걸.

혹시나 폭주한 상태의 이사벨이 레아를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의심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든 찰나의 감정에 칼리드와 엘레노아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정말이네. 진짜 저를 믿지 못하셨군요.”

“벌써 평생의 반려로 삼기까지 하고, 인간들과 어울리기 힘들다더니 참 쉽기만 하네요.”

“이사벨, 우리 말 좀 들어봐.”

“가족이라더니, 평생 함께 있을 거라더니.”

이사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녹색 눈동자 안에 빛이 사라졌다.

칼리드에게 구해진 뒤로, 늘 반짝반짝하던 그 빛이.

“그냥. 딱 그 정도였던 거겠죠.”

“이사벨 잠깐만!”

엘레노아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이사벨이 무언가 작게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곧 그녀의 주위로 강한 바람이 생겨났다.

도저히 눈을 뜨고는 버틸 수 없을 세기에 칼리드와 엘레노아의 시야가 가려졌다.

그리고 그 둘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이사벨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 *

그 뒤로 이사벨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그녀를 찾던 칼리드와 레아도 그 기간이 한 달이 넘어가자 그만두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황제가 그리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레아의 임신 소식이었다.

“코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드래곤 문양이 새겨진 청첩장을 보며 엘레노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사이 늘 자신감 넘치던 그녀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가장 연장자인 내가 잘 해결했어야 했는데. 역시 내가 문제였던 걸까.”

“…….”

“다 내 잘못일지도 몰라. 그 아이들을 맡는 게 아니었나 봐.”

엘레노아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살짝 푸른 기가 도는 녹색 눈동자 안에 이사벨의 향한 걱정과 자책감이 가득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곧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어졌다.

상황이 안 좋았던 거라고. 그 모든 일이 다 당신의 잘못으로 벌어진 건 아니라고.

물론 하필 빙의된 것이 앵무새였던 탓에 제대로 된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삐비빅!”

“세상에. 지금 나 위로해주는 거니?”

희한하게도, 엘레노아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사벨이 떠난 뒤로 늘 처져 있는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고맙구나, 코코. 정말 착한 아이네.”

새장을 연 엘레노아가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따스한 온기를 가만히 느끼려던 순간, 또 시간이 뒤로 넘어갔다.

‘지금 넘어간다는 건, 다음은 저주를 거는 장면인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에 나름 추측해보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슬슬 멈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광경은 좀처럼 느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곧 있으면 이사벨이 저주를 거는 때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장면을 안 보여줄 리가 없는데.’

물론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칼리드와 레아의 결혼과 임신 소식을 듣고 데프론 공작을 찾아간 이사벨. 이사벨의 힘에 굴복해 그녀를 결혼식장에 몰래 데리고 들어가는 공작.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레오나드에게 저주를 거는 이사벨의 모습까지 전부 머릿속에 들어왔다.

전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대로였다.

하나 예상하지 못한 바라면, 저주를 걸 때 이사벨의 마음이 어떠했는지가 머릿속에 들어왔다는 것 정도일까.

‘저 아이는 평생 고통 같은 건 모르고 행복하겠지.’

‘잠깐이라도,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저 아이가 힘들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당신들도, 혼자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내가 왜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텐데.’

‘생각보다 큰 힘이 필요해서 몇 년은 죽은 듯 잠만 자야겠지만…….’

잠깐 자고 일어나면, 다들 예전처럼 나한테 웃고 미안하다고 하게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이사벨이 남긴 저주의 내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네 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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