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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17화 (117/144)

#117화

“……허억!”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번쩍 떴다. 어쩐지 호흡이 가빴다.

꼭 깊은 수면 아래 갇혀 있다가 올라오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확실한 건, 내가 더 이상 앵무새 코코의 몸속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지금 새장이 아닌 침대에 누워있었고 몸 곳곳을 살펴보았을 때 이건 분명 로레이나의 몸이 맞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눈앞에 보인 천장이 낯설었다.

북부에서 머물렀던 여관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황궁에 마련된 내 방도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주변을 좀 둘러봐야…….’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손가락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스쳤다.

꼭 사람의 머리카락 같은.

그에 조금 더 시선을 내리자 시야 끝에 익숙한 것이 잡혔다. 반짝이는 검은색 머리칼이었다.

내가 계속 그리워하던 색채.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나는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레오나드다.’

진짜. 진짜 레오나드야.

누워서는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다소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레오나드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엎드려 잠든 채였다. 보아하니 나를 간호하다가 잠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내가 제대로 돌아온 게 맞는다는 거겠지.

‘왜 이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어. 똑바로 누워서 자지.’

레오나드가 날 두고 절대로 그러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면서 나는 괜히 투덜거렸다.

꿈속에 갇혀 걱정하던 것과 달리 그가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이사벨이 무언가 해를 끼치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했으니까.

혹시라도 다시 눈을 떴을 때 레오나드가 이 세상에 없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정말 다행이야.’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살짝 내려온 머리칼이 그의 눈을 찌르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다.

손가락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 곧 눈가를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딱 그 순간, 기다란 속눈썹이 몇 번 팔랑거리는가 싶더니 곧 적색 눈이 번쩍 뜨였다.

깨지 않게 조심히 한다고 한 건데 아무래도 레오나드에게 기척을 숨기기란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나.’

하지만 계속 걱정했을 텐데. 정신 차려놓고 가만히 있는 것도 웃긴 일이니까.

나는 레오나드에게서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처음부터 잠들지 않았던 사람처럼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온몸이 그대로 꿰뚫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생각보다 거친 목소리에 놀라 나는 서둘러 입을 닫았다.

말을 안 한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몸 상태가 그만큼 안 좋기 때문인지, 목구멍이 누가 바늘로 찌르기라도 하는 듯 따끔거렸다.

뭐, 둘 다일지도 모르지만.

“잘 지냈……어요?”

“…….”

“뭐라고 말……좀 해봐요. 저는 엄청 보……고 싶었는데.”

목 안쪽의 통증에 말이 계속해서 끊겨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이 순간을 바랐으니까.

오랜만이라고 인사했지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꿈에서는 무척 오랜 시간을 건너뛰었지만, 실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원했다.

어서 꿈속에서 벗어나 레오나드의 상태를 확인하기를. 그와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기를.

그러나 레오나드는 몸을 일으킨 상태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내가 환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레오나드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나 역시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곳저곳 많이 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답기 그지없는 낯에서 처음 보는 상처를 발견했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얼굴이 이……이게 뭐예요. 뺨에 상처가 났네.”

“…….”

“이곳저곳 상한 곳도……많고.”

나는 레오나드의 뺨에 조심스레 손을 대며 조곤조곤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레오나드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그의 눈가가 찌푸려지나 싶더니 곧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메마른 한숨을 토해냈다.

“……지금 누가 할 소리를.”

레오나드가 내게로 손을 뻗으며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그에게 한쪽 팔을 잡힌 나는 그대로 끌려가 넓은 품 안에 안착했다.

거친 움직임과 달리 나를 껴안는 힘은 그다지 세지 않았다.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을 만지기라도 하는 양 부드러운 손길로, 레오나드가 한참이나 내 등허리를 매만졌다.

그제야 나는 레오나드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걱정 많이 했구나, 당신.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

“이대로 네가 다시 눈을 뜨지 않으면 어떡하나. 정말 그러기라도 하면 나는…….”

빠르게 중얼거린 레오나드가 다시금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 센 힘은 아니나 아까보다는 확실히 더해진 악력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던 레오나드가 천천히 내 몸을 떼어내더니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리고 확인이 끝난 자리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입맞춤이 뒤따랐다.

어깨를 살핀 뒤에 한번, 다리 쪽을 살핀 뒤에 한번. 그렇게 곳곳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살폈을 때는, 붉은 눈동자가 꽤 오래 한 자리에 머무르며 떠나지를 않았다.

레오나드의 고개가 점차 가까워졌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그가 나른 숨을 쉬었다.

레오나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레오나드, 저 아직 아파서 치료가 필요한 거 같아요.”

“…….”

“아주, 오래. 되도록 많이.”

그러자 레오나드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곧 두 입술이 맞물렸다.

레오나드는 아주 느릿하게, 그러나 조급한 몸짓으로 입맞춤을 시작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아주 오래, 그리고 많이.

* * *

정신을 차린 나는 레오나드에게 꿈에서 본 내용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레오나드가 그토록 오랜 시간 고통받은 것과 그의 부모가 죽어버린 것이, 사실은 이사벨의 의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이사벨은 그들이 죽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저와 같은 고통을 느껴보기를 바랐을 뿐이지.

아니,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나는 이사벨이 저주를 거는 장면만 보고 깨어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주를 걸고 나서 내가 기절하면, 전에 말했던 오두막에 옮겨놔 주세요.’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는 않을 거예요. 공작가로 텔레포트할 거고, 오두막은 내가 정해놓은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으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자신의 아버지, 당시의 데프론 공작을 다시 찾아간 날, 이사벨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공작은 자신이 버린 사생아의 마력에 겁을 먹고 그녀의 요구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사벨의 오두막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몇 명 되지 않았다.

나와 레오나드. 그리고 에녹과 아이작 데프론. 마지막으로 그 오두막의 주인인 이사벨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 당시 어울렸던 세 명. 그 당사자이거나 그들의 피를 이은 자.

그러니까 이사벨은 제 오두막에 엘레노아와 칼리드를 들일 생각이었던 거다.

자신이 힘을 되찾아 깨어나고 나면 다시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버릴 줄 모르고.

‘아직 엘레노아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죽음 역시 아마 저주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원래도 이종족은 저주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피를 토하며 쓰러졌으니 혼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리고 분명 깨어나기 전 마지막 장면은 현재의 이사벨이었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이사벨의 오두막을 찾아 그녀를 깨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작이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이사벨은 다소 기대감이 어린 얼굴로 물었다.

‘전하와 스승님은?’

아이작에게 지금이 300년이나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그 밖의 모든 것을 들은 이사벨이 어떻게 되었을지 뻔한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 선, 고통에 찬 비명을 들으며 깨어났다.

‘그대로 미쳐버린 것 같았어.’

그래. 그러니 지금 이렇게 날뛰고 있는 거겠지.

그제야 왜 이사벨이 나나 레오나드를 한 번에 죽이지도, 그렇다고 편하게 두지도 않는 건지 이해가 갔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뭘 원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 그런 마음이니 원작 초반에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어주겠다며 나타났던 거겠지.’

그때쯤이면 시간이 꽤 지났을 테니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저가 뭘 잘못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걸.

‘셀리아’의 태도는, 처음 만난 상대를 향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꽤 필사적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한 모든 일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레오나드가 그것을 이해해줄 이유도 없고.’

그러니 그에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레오나드가 300년 동안이나 받은 고통은 절대로 이런 이유로 용서되어서는 안 되니까.

“자, 말 다 했어요. 이게 꿈에서 본 전부예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면서 말하자 레오나드가 안도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목 상태가 안 좋은 내가 오래 말을 하는 것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긴 내용을 귀족 회의 때처럼 손바닥에 써가며 말할 수는 없잖아. 이름같이 짧은 것도 아닌데.

“레오나드는 저한테 해줄 말 없어요?”

“쉿. 알아서 이야기해줄 테니까 이제 말 그만.”

레오나드가 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중얼거렸다.

아직 그와 더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다른 때 같았으면 투덜거렸겠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내가 느끼기에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얌전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지 내 뒤로 쿠션을 여러 개 덧대어 놓은 레오나드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법 겹치는 내용이 많아서 내가 더 해줄 말은 별로 없어.”

“…….”

“일단 그 오두막에 쓰인 글자는 그 세 명의 이름과 마법진이었다는 것. 해석해보니 마법진은 힘을 다한 누군가를 살리는 형태였다고 해.”

역시. 그 오두막은 이사벨의 부활을 위한 장소가 맞았구나.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더라니.

내부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다 이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에녹 데프론이 도와주기로 했다는 것. 우리 쪽에서도 ‘아브로고’라는 꽃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거든. 그걸 찾는 데 협력해주기로 했어.”

“와! 결국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예요? 너무 잘 되었……콜록.”

갑작스레 흥분해서 말을 한 탓일까. 목구멍이 심하게 아프다 싶더니 잔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뒤에는 웬 핏덩이가 나와 이불을 적셨다. 꼭 처음 쓰러지던 그 날처럼.

“괜찮아? 그러게 내가 말하지 말라니까!”

“미, 미안해요.”

“네가 사과를 왜…… 아니야, 됐어.”

급하게 일어난 레오나드가 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입 주변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다 정리한 후에 보니 그것은 내가 준 손수건이었다.

수도 북부에서 산 바로 그 선물 말이다.

“……그거 계속 가지고 있었네요. 콜록. 저 간호해주느라 더러워졌을 텐데. 지금도 피 닦느라…….”

“누가 준 건데, 그런 거 상관없어.”

“와. 너무 감동…….”

“그리고 제발 말 좀 그만하고.”

작게 타박한 레오나드가 마저 내 얼굴을 닦았다.

더 입을 열면 정말 화를 낼 것 같아서, 나는 더 말하지 않고 그의 손바닥 쪽으로 손을 옮겼다.

이렇게라도 전하지 않으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았으니까.

손수건에도 새겨 넣었던, 영원히 잊지 않을 그 마음을.

[사랑해요.]

내가 뭐라고 적었는지 단번에 눈치챘는지 레오나드가 잠시 멈칫했다. 그 뒤의 반응은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지만.

“……나는 이런 과분한 거 받을 자격이 없어.”

손수건에 묻은 핏자국과 꽤 수척해진 내 몸을 보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네가 이렇게 된 거, 결국 나 때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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