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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18화 (118/144)

#118화

“……레오나드.”

내 부름에 레오나드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럴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러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건 레오나드의 잘못이 아니에요. 알죠?]

차분히 그의 손바닥에 써 내려가자 굳어있던 얼굴이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변했다.

아. 어쩌면 좋아.

“저주에 걸린 게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너를 이렇게 만든 건 내가 맞아, 로레이나.”

“…….”

“엘레노아 님이 남겼다는 그 일기장. 그게 너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었으니까.”

[거기에 아브로고가 첨가되어있다는 거, 원래부터 알고 있었어요?]

설마 그럴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다소 놀란 마음으로 물었다. 내가 꿈 내용을 말해서 알게 된 줄 알았는데.

손바닥에 적힌 말을 곱씹던 레오나드가 ‘역시나.’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일기장이 여태 나를 보호해주었다는 것과 아브로고의 특성을 비교해보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친히 보호막까지 남기고 가셨는데 내 옆에 있느라 다 망가져 버렸잖아.”

“…….”

“나는,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레오나드가 제 손바닥 근처에 머물러있던 내 손가락 하나를 붙잡았다.

마치 그게 유일한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레오나드를 위로하느라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 몸은 아주 심각한 수준이었다.

레오나드에게 듣기로 내가 깨어난 것은 무려 3주 만이라고 했다.

온통 새하얗던 공간에 갇혀 있던 동안, 그리고 이사벨의 과거를 보는 동안 그렇게나 긴 시간이 흐른 거다.

빙의 전의 세계처럼 의료 기술이 발달한 곳이라면 모를까, 이런 곳에서 3주 동안 의식이 없었다니.

나를 내내 껴안고 생명력을 쏟아부은 레오나드가 없었다면 아마 진즉에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쨌든 난 살았잖아.’

지금도 몸은 좀처럼 나아지지를 않고, 곧 죽을 가능성이 아주 크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서 바라던 대로 레오나드의 얼굴을 보았잖아.

‘그러니 아직 포기해서는 안 돼.’

이건 신이 주신 기회였다.

나는 이 기회를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레오나드,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에녹이 아브로고를 찾는 걸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그걸 찾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예요.]

레오나드가 잡고 있던 손가락을 살짝 빼내 뒤 그의 손바닥에 다시금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그러자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전국을 다 뒤지고 있는데도 아직 아브로고에 대해 알아낸 것이 없어. 그만큼 발견하기 힘든 곳에 있다는 거겠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아브로고는 엄청 귀한 꽃이었다. 그러니 먼저 이에 관한 정보를 접한 아이작 데프론도 아직 찾지 못한 것일 테니까.

“그리고 설사 아브로고를 찾는다고 해도 네 몸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 결국 일기장도 그렇게 망가져 버렸는데.”

[있어요.]

자신 있게 답하자 레오나드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눈을 뜬 이후로 가장 마음에 드는 얼굴이라 나는 작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어.”

[하지만 정말 가능한걸요.]

“그럼 일기장은 왜…….”

[일기장이 망가진 건, 아브로고를 반만 썼기 때문이에요. 꽃을 통으로 써야 효과가 영구적이라고 들었거든요. 이사벨 본인이 한 말을 직접 듣고 온 것이니, 확실한 정보예요.]

빠르게 덧붙이자 레오나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흠. 이렇게 못 믿으면 곤란한데.

[그럼 믿을 수 있게 제가 아는 정보를 더 말해볼까요.]

“어떤 거.”

[음. 예를 들어서 300년 전에 아브로고가 어디에 피어있었는지 같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기울이자 레오나드가 어느새 반쯤 일어나다시피 한 내 몸을 눕히며 입을 열었다.

“보나 마나 신성한 곳에 피어있었겠지. 아브로고는 그런 장소에만 핀다고 했으니까.”

응? 신성한 곳이라고?

[레오나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네가 쓰러진 뒤로 에녹 데프론이 몇 번 왔다 갔는데. 그때 말해줬어. 셀리아 데프론과 공작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는군.”

이제 셀리아가 이사벨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아브로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저건 꽤 정확한 정보라는 건데.

‘그럼 왜지?’

나는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300년 전, 아브로고가 피어있던 곳은 엘레노아의 집 근처였으므로.

* * *

그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레오나드가 내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다시 확인하겠다며 난리를 칠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저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니 별다른 치료제가 없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의사가 하는 말은 특별할 것 없는 말이었다.

절대 안정. 충분한 휴식.

한 마디로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황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고, 레오나드의 옆에 꼭 붙어있으라는 뜻이다.

물론 이전과 달리 그의 곁에 있는 중에도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그런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을 시간 없어.’

어차피 내가 시한부인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다.

괜한 거 곱씹지 말고 살길이나 생각하자.

‘가장 신성한 곳에 핀다는 아브로고가 왜 엘레노아의 집 근처에 있었던 걸까?’

혹시 그녀가 이종족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말이 되었다. 이종족은 신의 축복을 받은, 그 누구보다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그러니 충분히 신성하다고 일컬을 수 있지.

‘하지만 그런 거라면 황궁에 피어있는 게 더 맞지 않나? 그쪽은 아예 신의 후손인데.’

아무래도 레오나드에게 더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의사의 진찰을 받은 뒤 다시금 나를 눕히려는 레오나드의 팔을 잡았다.

[레오나드. 아까 그 꽃에 대한 거 말인데요. 그거에 관해서 에녹이 더 했던 말 없어요?]

“그 이야기라면 이제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몸 안 좋아지니까 더 신경 쓸 거 없어.”

[제발요. 뭔가 하겠다는 게 아니고, 곧 중요한 것을 알아낼 것 같아서 그래요. 뭐라도 좋아요.]

손으로 적는 글자에 최대한 간절함을 담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구기던 레오나드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움직임에 침대가 한쪽이 살짝 출렁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도, 내가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왜요?]

“알다시피, 내가 요즘 기억력이 온전치가 못하거든.”

레오나드가 허리를 숙여 내 머리를 정리해주며 대답했다. 생각하지 못한 답이라,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뻐끔거렸다.

정신없이 생각하느라 레오나드의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미안해요.]

“괜찮아. 너를 만나기 전에는 항상 이랬는데. 난 익숙해.”

[그렇지 않다는 거 알아서 하는 말이에요. 미안해요.]

무언가를 얻기 전과 그것을 이미 가진 뒤 잃어버린 것은 다르다.

나는 레오나드를 만난 뒤로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돈 많은 백수 생활이나 꿈꾸던 내가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으니까.

그 정도로 내게는 레오나드가 소중해졌다.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한 기억’이든 ‘나’이든, 레오나드에게도 마찬가지겠지.

“나는……당신이 꼭……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이러면 목이 상한다며 레오나드가 화내겠지만, 꼭 이 말만은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든 살 거야. 내가 살아야 당신이 행복할 테니까.

두 눈을 맞추며 나직이 말하자 레오나드가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곧 질끈 감은 눈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떨어졌다.

기어코 나는 저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드는구나.

“……그러니까, 무조건 살아.”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서, 레오나드가 명령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절대로. 절대로 죽지 마. 그러면 안 돼. 그러지 마. 제발.”

“안…… 죽을…… 거예요. 절대로.”

손을 뻗어 레오나드를 껴안자 그가 침대 위에 몸을 누이며 얌전히 내 품에 안겼다.

나는 흐느끼기 시작하는 그의 등을 작게 토닥이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죽더라도 꼭…… 어떻게 해서든 다시 돌아……올 거니까.”

“…….”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마지막 말이 끝난 순간, 레오나드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그의 서글픈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방에 어둠이 깃들 때까지, 한참이나 계속.

그에 나 역시 더는 참지 못하고 울었다. 내 어깨가 젖어 든 만큼, 딱 그 정도로.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온전히 울지 못하는, 지금의 기억이 날아가기라도 할까 봐 겁을 먹은 레오나드가 너무 안타까워서.

안 그래도 너덜너덜해진 그에게 내가 또 다른 상처를 주게 될까 봐 무서워서.

* * *

그렇게 나는 한참을 울다가 잠이 들었다. 아마 지쳐서 기절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다시 눈을 떠보니 레오나드의 품 안이었다. 아무래도 곧바로 잠들지 않고 또 나에게 생명력을 내내 쏟아붓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사람.’

그래봤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나는 눈을 감고 있는 레오나드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평소보다 거친 검은 머리카락이 닿았다. 속상해라. 내가 이 느낌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렇게 만지면 잠을 잘 수가 없는데.”

“헉, 나 때문에 깼어요? 콜록.”

작게 잔기침을 하자 레오나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 아래 붉은 눈동자가 살짝 가려져 있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역시 남자 주인공이라 이건가.

펑펑 울다가 잠들어도 좀처럼 망가지지를 않네.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바라보자 내가 당황했다고 생각했는지 레오나드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농담이야. 안 자고 있었어.”

“자려는데 제가…… 방해한 건, 콜록, 아니고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으니 레오나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를 더 힘주어 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것 같은데.

뭐, 더 말하면 목 상한다고 혼날 테니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줄까.

“……좋다.”

“뭐가?”

“지금처럼 있는 거요. 이렇게 사람 없는 곳에 단둘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레오나드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리며 조금 더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나와 몸이 닿아서라기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뭐지?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있어요?”

“……아무래도 네가 한 말 때문에 생각난 거 같아.”

“네? 뭐가요?”

“에녹 데프론이 아브로고에 대해 했던 말.”

뭐라고?

희소식에 놀라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나는 온몸을 강타한 고통에 옅은 신음을 흘리며 다시 뒤로 자빠졌다.

물론 침대 위였고 레오나드가 나서서 안전하게 받아준 덕에 더 다친 곳은 없었지만.

“제발 조심 좀…….”

“뭔데요? 에녹이 말한 게?”

다급하게 묻자 뭐라 타박하려던 레오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없는 곳. 정확히는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고 했어.”

“그럼 아브로고가 피는 곳의 조건은, 콜록,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가장 신성한 장소’네요?”

나는 혹시라도 내 상태가 안 좋아지기라도 할까 불안한 기색인 레오나드를 모르는 체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레오나드, 나 아브로고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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