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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19화 (119/144)

#119화

레오나드는 내 말에 곧장 제럴드와 다이아나를 불렀다.

내가 언제 또 쓰러질지 모르고, 또 레오나드의 기억이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으니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은 최대한의 효율을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으니까. 어차피 내 몸 상태 때문에 두 번 말하는 건 못 할 짓이기도 하고.

“아브로고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는 게 사실이에요, 로레이나?”

레오나드가 그동안 들어오지 못하게 한 모양인지, 다급히 들어와 내 상태부터 확인한 다이아나가 물었다.

급한 일이니 우선 확인을 하긴 해야 하는데 여전히 내가 많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남색 눈동자 안에 차마 숨기지 못한 감정들이 묻어났다.

하긴. 무려 3주 만에 일어난 것이니 이런 반응을 보일만도 했다.

나도 처음 레오나드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놀랐는걸.

“네, 에녹이 말을 해주고 갔다면서요. 아브로고는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가장 신성한 곳에 피어있다고요.”

“그거야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모호한 말로 찾기에는…….”

“그게, 제가 300년 전에 아브로고가 어디에 피어있었는지 들었거든요. 콜록.”

작게 기침을 하자 내 옆에 앉아있던 레오나드가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살폈다.

나는 그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어준 뒤 다시금 말을 시작했다.

“엘레노아 아멜리오. 그러니까 제 어머니의 예전 집이었어요. 아브로고가 피어있던 곳 말이에요.”

“확실한 정보입니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제럴드가 물었다. 그동안 레오나드와 함께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인지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다.

“네, 확실해요. 이사벨이 직접 말했거든요. 어머니의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찾았다고요.”

“그 꽃이 왜 거기에…….”

“사실, 저도 처음에 신성한 곳에 핀다는 말만 들었을 때는 황궁에 피어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목이 막혀서 잠시 말을 멈추자 다이아나가 빠르게 움직이더니 물컵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목을 축이는 사이 레오나드가 말을 이었다.

“그래.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서 황궁부터 뒤졌는데 아무것도 없었어. 꽤 오래 뒤졌으니, 못 찾았을 리는 없을 거야.”

“황궁은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 아니니까요. 조건이 다 성립해야죠.”

“하지만 엘레노아 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이니 그곳은 이제 더는 신성한 곳이 아닐 텐데.”

“레오나드도 참. 그런 곳이 하나 더 있잖아요. 이미 갔다 왔으면서.”

방 안에 있는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에 살포시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이종족이 최근까지 살았던 장소이면서,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곳.”

“아.”

“무언가 생각나는 곳이 하나 있지 않아요?”

그제야 내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은 제럴드와 다이아나가 재빠르게 방을 나갔다.

이번에 아브로고가 피어있을 곳.

바로 로레이나 아멜리오가 살던 아멜리오 백작가였다.

* * *

주변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주 깊은 밤이었다.

탁탁탁.

나무로 된 의자 손잡이 부분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적한 방 안에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물론 그 소리를 냈을 장본인의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다. 방금 들은 말 때문인지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네.”

‘아브로고’가 아멜리오 백작가에 피어 있다라.

제법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아멜리오 백작가에 피어있었다면 아이작 데프론이 지금껏 찾지 못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고.

설마 그런 귀한 꽃이 별 볼 일 없는 백작가 땅에 피어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테니.

‘어찌할까.’

손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빠르고 커졌다.

일기장에 남아있는 제 마력의 흔적으로 이야기를 엿듣기는 했지만, 문제는 미약한 흔적을 훑는 것이기에 제게 전달되는 속도가 느리다는 점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이미 이야기가 나온 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속도를 생각해보면 아마 사흘 정도는 지났으리라.

‘그리고 하필 그 타이밍에 맞춰서 에녹 데프론은 자리를 비웠지.’

아이작 데프론은 제 아들을 제법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이사벨이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데프론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는 결코 공작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늘 쓰레기 같던 이 핏줄에서 도대체 어떤 그런 성정이 나왔나 싶을 정도로.

그러니 이사벨은 알 수 있었다.

절대로. 에녹 데프론은 그녀나 아이작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데르키안은 제 연인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 테니, 에녹 데프론이 움직인 거겠지.’

지금 따라 가볼까도 생각했으나, 아멜리오 백작가는 그녀에게 상당히 꺼려지는 곳이었다.

하나하나 다 전대 백작 부인의 취향에 맞춰 꾸며졌을 그곳을 보고 있노라면, 꼭 예전의 ‘그 집’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이미 3일이나 지났으니 아마 도착했겠지.’

수도부터 아멜리오 백작가까지는 그보다 적게 걸리니까.

안 그래도 에녹 데프론에게 호감이 가득한 백작저 사람들은 제 주인을 위해 움직이는 그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 이사벨이 그곳에 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사벨이 손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불쾌하다. 이상하게 찝찝했다.

무엇일까.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처음 한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데프론 공작의 양녀가 되었고, 로레이나 아멜리오와 레오나드 젠 데르키안을 만난 뒤였다.

눈을 감기 전 분명 어떤 결심을 한 것 같았는데.

‘그래, 이사벨로 하자. 네 이름은 오늘부터 이사벨인 거야.’

‘……당장 그 손 치워.’

‘그래. 마음껏 미워하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래도 돼. 너는 그래도 된단다.’

몇 가지 기억들이 이사벨의 머리를 다시금 어지럽혔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난도질한 듯 아파 왔다.

무언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웠다. 누군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또 졸랐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머리를,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그냥 이대로 다시 눈을 뜨지 않았으면.

“아아.”

이사벨은 신음을 흘리며 이리저리 발버둥을 쳤다. 몇 번의 미약한 몸짓 뒤에 그녀는 다른 기억들을 떠올렸다.

이 잔혹한 고통을 상쇄할 만한 또 다른 것.

‘……그날 너를 구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나 이사벨을 괴롭히던 고통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깔끔하게.

그제야 이사벨은 비로소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감정들이 지워졌다. 몇 가지 기억들이 묻혔다.

붉은 입술이 다시금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너희들의 유일한 희망이 그 꽃이라면, 내가 박살을 내줘야지.

똑똑똑.

잠시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작 데프론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저를 찾아온 손님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 아들이 지금 너를 배반하고 제가 사랑하는 이를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곧 그녀를 구할 꽃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것까지.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이작 데프론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다.

태어나서부터 제 자리라고 생각했던 자리를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이사벨은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자,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절박한 자가 그 손을 잡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 *

“에녹 님. 인제 그만 들어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멜리오 백작가의 집사, 길버트는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풀숲을 해치며 무언가를 말없이 찾기만 했다.

남자, 그러니까 에녹은 아멜리오 백작가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웬 꽃 한 송이를 찾고 있었다.

분명 보랏빛 꽃이라고 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 정도로 반짝이는 것이라고.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물으니 로레이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딱 그뿐이었다.

다소 불친절한 설명이었으나 에녹의 얼굴이 워낙 간절해 보여서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정체도 알 수 없는 꽃을 찾은 것이 꼬박 하루가 넘어갔다.

“오신 후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찾으셨지 않습니까. 물 한 모금 드시지 않았고요.”

“…….”

“이러다 쓰러지시기라도 할까 걱정입니다. 저희가 계속 찾을 테니 잠깐이라도 쉬세요.”

“……괜찮네. 그럴 시간이 없어.”

에녹은 다시금 꽃을 찾는 것에 집중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로 절박한 마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로레이나가 깨어났다는 말에 3일 전 황궁을 찾았으나 에녹은 결국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레오나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궁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낸 장본인은 에녹이 힘없이 황궁을 나설 때까지 보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레오나드 대신 그를 맞이하러 나온 헨티슨 공작 덕분에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로레이나의 상태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까 싶어 애써 내색하지는 않지만 자는 사이 비명을 내지르고, 피를 토하고, 종종 혼절한다고 했다.

아마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제럴드 헨티슨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꼭 찾아야만 했다.

에녹은 로레이나가 다시금 건강하게 제 앞에서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러기 위해선 꼭 그 꽃이 필요했다.

‘여기가 마지막이야.’

백작가 주변은 다 둘러보았다. 이제 이 구역이 마지막이었다.

에녹은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제 앞에 있는 덩굴 더미를 거두었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덩굴에 가려져 있던 제법 널찍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녹은 보았다.

“……찾았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꽃 한 송이가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보라색 꽃이 그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에 에녹은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허리를 숙여 그 부드러운 꽃송이를 손에 쥐었다.

“분명 뿌리가 상하지 않게 통으로 들어내라고 했었지.”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조심스레 꽃 주변의 땅을 파내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렇지만 재빠르게 맨손으로 땅을 파냈을 때 중심을 잃은 꽃이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뿌리가 온전히 드러나 중심을 잃은 것이다.

“……됐다.”

긴장해서인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이 꽃을 로레이나에게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아버지도 어느 정도 용서받을 길을 찾을 수 있겠지.

에녹은 그렇게 생각했다.

땅에 놓인 꽃을 들어 제 품에 넣으려는 그 순간에, 별안간 낯선 인기척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사각사각.

무언가가 풀들 사이를 스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에녹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굴렸다.

‘아멜리오 백작가의 사람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러면 숲을 배회하던 짐승이라도 되는 건가?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다는 생각에 에녹은 챙겨왔던 검 손잡이를 조심스레 쥐었다.

하지만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백작가의 사람도, 그를 잡아먹으러 온 맹수도 아니었다.

“……아버지?”

눈앞에 보인 익숙한 모습에 에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히 등장한 것뿐이었다면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었다.

분명 아이작도 아브로고를 찾고 있었으니까.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꽃을 찾아내거나 저를 따라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에녹은 제 아버지와 대적할 각오도 충분히 다진 상태였다.

하지만 맹세코, 이런 상황을 바란 적은 없었다.

“……에녹.”

“…….”

“나 좀, 살려……다오.”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은 아이작이 몇 마디를 남기고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입가에는 선명한 피가 흐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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