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에녹?’
나는 불쑥 그렇게 말하려던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현재의 ‘나’는 로레이나 아멜리오가 아닌 셀리아다. 그러니 내가 에녹을 알고 있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에녹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단순히 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뒤로 30년이나 지난 탓에 모습이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에녹은 에녹이었다.
‘나라는 걸 알아차린 걸까?’
그래서 저렇게 급하게 뛰어나온 건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었다. 로레이나일 적의 인연을 만난 것은 처음이라 자꾸만 긴장되었다.
‘뭐, 뭐라고 말을 해야…….’
어떻게 만난 건데 이대로 아무런 말도 안 하고 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러려고 어제 그렇게 무리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말하지?’
아까 말한 대로 나는 지금 로레이나 아멜리오가 아니다.
만약 에녹이 단순히 로레이나와 닮아서 나를 쫓아온 것이라면, 내가 먼저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에녹의 입이 열렸다. 그조차도 아주 느릿하게 느껴졌지만.
“……아, 미안합니다.”
“…….”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은 것 같아서 그만…….”
역시나. 에녹이 나를 알아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로레이나라는 것을 에녹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에녹과 나는 악연이나 다름없었다.
둘 사이에 좋았던 추억은 그냥 이대로 묻어두는 편이 나았다.
‘그래도…….’
완전히 헤어지기 전에, 잠깐 이야기기를 나누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에녹과 내 사이는 뭐라 정의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끝이 나버리고 말았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요동치는 마음 탓에 무너지려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밝게 웃었다.
한때 내 친구였던 이를 위해.
“저한테 할 말이 있으신가요?”
* * *
상인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나는 직원에게 이끌려 잠시 여관으로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그런 내 옆에는 에녹이 함께했다.
식탁 하나를 잡아 나와 에녹을 앉힌 직원은 어쩐지 후련한 얼굴을 하더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녀가 사라지자 잠시 자리에는 깊은 정적만 흘렀다.
묘한 어색함 속에서 먼저 입을 열었던 것은 에녹이었다.
“많이 놀랐죠? 정말 미안해요.”
에녹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끝에 살짝 어린 웃음기가 몹시도 익숙하다.
아니, 사실 익숙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많이 고생한 듯 데프론 공자로서 칭송받았을 시절보다 늙은 모습이었고, 몸이 이곳저곳 많이 상해있었지만 맑은 눈동자만큼은 그대로였으니까.
애초에 내가 에녹이라는 것을 알아봤던 것도 다 저 눈 때문이었다.
“제가 알던 사람과 닮아서 그랬다는 건 사실이에요. 정말 놀랐거든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라.”
“많이 친하셨던 분인가 봐요.”
“제가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에요.”
무언가를 고민하던 에녹이 잠시 멈칫거리다가 대답했다.
사랑이라.
완전한 고백이었으나 나는 그 의미보다는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에녹이 한 말은 ‘과거형’이었다.
과거형이라는 건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이제는 30년이나 지나버린, 추억이라고 칭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말.
‘하긴,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 30년이란 무척이나 긴 세월이지.’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게 먼저 마음을 표현한 것은 에녹이었는데, 내가 준비가 안 되었다고 그것을 들을 노력도 안 한 것이 늘 미안했으니까.
그리고 나 또한 에녹을 사랑했다. 그 감정의 결이 에녹과는 같지 않았을 뿐이었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정말 이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털어낼 작정이었으므로.
“그분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건 아닐 거예요. 그 사람한테 내가 너무 큰 죄를 지었거든요.”
나름 생각하고 꺼낸 말에 곧바로 반박이 돌아왔다.
……큰 죄라.
‘내가 죽었던 일에 에녹이 연관되어있는 건가?’
정확히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니 에녹이 이렇게 나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녹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제 와서 그것을 따진들 뭐가 중요하겠는가. 나는 어찌 되었든 이미 죽었고, 그리고 다시 태어났는데.
‘……그나저나 에녹까지 연관이 되어있다니, 레오나드가 많이 화가 났겠네.’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작게 웃었다.
아무래도 너무 시간을 오래 끈 것 같다. 화가 났다면, 서둘러서 달래주러 가야지.
“아니요. 그래도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에녹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나와 에녹이 나아가려면, 과거는 이만 끊어내야 했으니까.
그것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더 좋은 방법이었다.
내가 혼란스러운 낯을 완전히 지우고 웃자 에녹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했다.
입술이 할 말을 찾아 여러 번 달싹였다. 잠시 그렇게 있던 에녹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럴까요.”
녹색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뿐이던 눈물은 어느새 배가 되어 불어났고, 곧 폭포수처럼 흘렀다.
결국 에녹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쏟아내었다.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다 토해내듯, 아주 처절하게.
그 잠깐만으로도 그가 지금껏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가슴이 아팠지만, 에녹을 위로해주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잠시 에녹의 우는 얼굴을 지켜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나아가겠지.
내가 레오나드를 만나 그렇게 될 것처럼.
일어나는 내 모습에 잠시 몸을 움찔 떨던 에녹은 고개를 들어 다소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예상과는 좀 다른 대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뜻이려나. 어찌 되었든 마음에 들었다.
나는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대로 여관을 나섰다.
이제 마음 편히 황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가셨나요?”
셀리아, 그러니까 로레이나가 나간 뒤 여관 1층 구석에 있는 방에서 직원이 슬그머니 나왔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여관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시네.’
분명 직원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그는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녀는 에녹, 그러니까 여관의 주인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술에 취해 저가 사랑하는 여자에 관해 중얼거리던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사람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제 분홍 머리 아가씨가 처음 여관에 발을 들이던 순간-.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몸을 숨기는 여관 주인을 보며, 꼭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제대로 이야기는 하신 걸까?’
물론 그녀가 본 아가씨는 여관 주인이 말한 여자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일단 나이부터 달랐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가씨는 눈앞의 주인이 사랑한,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맞았다. 그리고 그 역시 그것을 알았으리라고 직원은 확신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주인이 아가씨를 보던 눈빛, 그것은 사랑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가 아직까지도 애지중지 키우는, 크루시아 같은 마음 말이다.
* * *
“잘 가게! 정말 즐거웠어!”
“혹시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짐마차에 탄 상인들이 내게 일제히 손을 흔들었다.
상인들이 장사하는 곳에 가려면 조금 더 가야 했던 터라 내가 먼저 내리게 된 참이었다.
며칠 좀 붙어있었다고 그새 정이 든 모양인지 손을 흔드는 시간이 꽤 길었다.
하긴, 내가 살던 마을은 아멜리오 백작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수도와 멀어서 에녹과 헤어진 뒤에도 대충 4일은 더 이동했으니까.
이대로 헤어지려니 나도 좀 아쉬웠던 터라 나 역시 그에 맞춰 손을 흔들며 인사해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내 인사에 함박웃음을 지은 상인들이 마부에게 뭐라 말을 하는 것이 보였고, 곧 짐마차는 다시 속력을 올려 자리를 떠났다.
나는 마차가 멀어져 작은 점이 되어버린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에 내가 애타게 바라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 이거 긴장되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이러다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나드와 무려 20년 만에 만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죽어 있던 시간까지 합하면 30년이지.’
와. 이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엄청난 시간이네.
‘……나 잘할 수 있을까.’
분명 집을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저주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황궁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만약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아니야. 일단 부딪혀 봐야지.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지금 내가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도 레오나드는 절실하게 제 저주를 풀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레오나드가 더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이 세계를 선택한 거잖아.
‘그래, 할 수 있어.’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작게 주문을 중얼거렸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어느새 황궁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확실히 이게 편하긴 하네.
‘레오나드의 집무실이 이쯤이었던가.’
나는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애써 더듬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예상대로 이쪽이 집무실이 맞은 모양이었다. 아까와 달리 높아진 시야에 제법 익숙한 건물이 들어왔다.
창문도 다행히 열려있었고.
‘황실 기사들과 말씨름을 하며 황궁으로 들어가느니, 레오나드와 바로 대면하는 게 낫겠지.’
결심을 굳히자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건 쉬웠다. 나는 그대로 열린 창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마침 창밖을 보고 있던 레오나드와 곧바로 맞닥뜨렸다.
두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늘 그리워하던 아름다운 붉은빛이었다.
그 순간이 눈물이 날 만큼 벅차올라서, 나는 곧장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저주를 풀어주려고 왔어요.”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놀란 듯 레오나드의 눈이 잠시 크게 뜨였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던 감동적인 재회 같은 것은 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레오나드의 얼굴이 굳었고, 돌아오는 답은 참 차갑기 그지없었으니까.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 감옥에 가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