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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36화 (136/144)

#136화

“젠장…….”

나는 황궁 지하 감옥의 쇠창살을 부여잡고 작게 욕을 뱉었다.

집무실에 있던 내가 난데없이 여기 있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레오나드가 정말로 나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으니까.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어찌나 빠른지, 레오나드가 명령을 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나를 그대로 끌고 가버렸다.

‘일 처리 하나 진짜 끝내주네.’

나는 여기까지 끌려오느라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내 앞에 있는 쇠창살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부수고 나가려면 그럴 수 있는데.’

아니, 쇠창살을 부술 것까지 뭐가 있겠는가. 나는 순간이동 마법을 쓸 수가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여길 탈출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내 목표는 단순히 지하 감옥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레오나드의 저주를 푸는 것이니까.

이대로 감옥을 탈출했다가는 괜히 경계심만 높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여기는 카일룸 제국이다.

이 세계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여기는 특히 마법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좋지 않다고 할 수준이 아니다. 원래도 안 좋았던 것이 이사벨 이후 최악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섣불리 능력을 드러내서는 안 돼.’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하지? 계속 여기에 갇혀 있을 수는 없잖아.

게다가 로레이나였을 적이라면 모를까 나는 지금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대로 레오나드가 내 존재에 대해 잊어버리면 나는 그대로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아, 요즘 황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살펴보고 들어왔어야 했나.’

솔직히 말해, 이런 식으로 갇히는 건 내 예상 밖이었다.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었다. 셀리아가 감옥에 갇히는 건 내가 레오나드의 일기장에서 봤던 부분이었으니까.

레오나드를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봤던 것과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물론 레오나드가 처음부터 내 말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이야기 한번은 들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이 어떻게 되었는가.

뭐라 제대로 말을 꺼내 보기도 전에 끌려와 버렸지. 꼭 이런 일이 아주 빈번했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나를 끌고 가는 기사들도 익숙하다는 태도였지.’

음. 아무래도 다시 말을 해봐야겠어. 우선 내 이야기를 레오나드에게 전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무턱대고 미친 취급하지 말고 정말 차근차근 내 말을 고민해볼 사람.

‘그런 사람이 누가 있지?’

잠시 고민하는데, 불쑥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만 있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던 지하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던 소리는 이내 내 앞에 실체를 드러낼 정도가 되었고, 마치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는 듯 내가 있는 감옥 앞에 멈춰 섰다.

“여기군.”

들리는 목소리가 낮고 중후하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음성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것의 주인을 살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한 남자였다.

남색 머리칼은 보기 좋게 뒤로 넘겨져 있었고 그와 비슷한 빛깔의 눈동자는 그가 살아온 세월을 담은 듯 꽤 깊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놀란 듯 쩍 벌어진 입은…… 어라? 쩍 벌어진 입?

무언가 앞의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에 나는 완전히 고개를 들어 다시금 남자를 살폈다.

그러자 그 반동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던 로브의 후드 자락이 뒤로 넘어갔다.

이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홍빛 색채에 내 머리칼을 본 남자의 두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어?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내가 어디서 봤더라.’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윽고 기억 속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을 찾아내었다.

……세상에.

“제, 제럴…… 아니, 헨티슨 공작님?”

“……아멜리오 백작?”

나와 제럴드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서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 물론 지금 나는 아멜리오 백작이 아니지만 그건 예외로 치고.

‘아니 그나저나 정말 제럴드라고?’

방금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아직 잘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를 먹었음에도 예전의 느낌이 남아있던 에녹과 달리 제럴드는 옛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생김새가 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특유의 느낌이 말이다.

예전에는 레오나드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조금 안쓰럽고 여린 모습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잘못했으면 그냥 우아하고 품격 있는 중년의 신사분인 줄 알았겠어.

하지만 지금 내가 놀란 것은 비할 바도 아니었다. 갑작스레 예전에 죽은 사람을 마주하게 된 제럴드는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당신이 정말 아멜리오 백작이 맞습니까? 그 로레이나 아멜리오? 30년 전에 죽은?”

“네, 30년 전에 죽은 여자 맞네요.”

“말도 안 돼. 아니 근데 왜 여기에……?”

제럴드가 멍하니 굳은 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죽었던 내가 살아 돌아온 것보다 난데없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더 의문스러운 모양이었다.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여기는 왜 내려오신 건가요? 저라는 걸 알고 오신 거예요?”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물어는 봐야지.

하지만 제럴드는 대답할 정신조차 없는 듯했다.

한동안 내 얼굴만 멀거니 쳐다보던 제럴드가 곧 제 뺨을 내리쳤다.

짝-.

살과 살이 맞닿는 찰진 마찰음이 지하 감옥에 울려 퍼졌다.

“아, 아프네요.”

“……그렇게 보이네요.”

“이거 정말 꿈 아닌가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그렇겠죠?”

나는 선명하게 손바닥 자국이 남은 제럴드의 얼굴을 보며 작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믿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하긴 나 같아도 몇십 년에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오면 저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덤덤하지는 못했겠지.

그래서 나는 제럴드가 쉽게 믿을 수 있도록 아주 오래전 기억을 하나 꺼내놓기로 했다.

내가 로레이나 아멜리오가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일을.

“헨티슨 공작님. 34년 전에 계약서 한 장 쓰셨죠?”

“…….”

“로레아나 아멜리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시 모든 책임은 헨티슨 공작가에서 지겠다고.”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내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순간이었다.

제럴드가 감옥 앞을 지키고 있는 간수들에게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굳게 닫혀있던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일단 나와서 이야기하죠.”

문을 잡고 서 있는 제럴드를 보며 나는 방긋 웃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네. 역시 이 이야기가 제일 효과가 좋을 줄 알았다니까.

* * *

제럴드는 나를 황궁에 있는 한 방으로 안내했다.

응접실 같은 분위기의 방이었는데 잘 쓰는 곳은 아닌 듯했다.

하긴, 데프론 공작가가 멸문을 당함으로써 제국 유일의 공작이 되었을 제럴드가 웬 젊은 여자 하나와 독대하고 있다는 말이 퍼져봐야 좋을 게 없지.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감옥에서 나와도 되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있는 게 마음이 편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닌데…….”

레오나드 허락 없이 이래도 되는 건가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

제럴드 헨티슨은 황제의 최측근이 아닌가. 괜히 나중에 말이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제럴드가 어쩐지 퀭한 낯으로 대답했다.

“……뭐 어떻게 되기야 하겠습니까.”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아마 그럴 거예요. 사실 아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내 불안한 얼굴을 본 것인지 제럴드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제가 지하 감옥에 들어갔던 게 폐하께서 한 명령 때문이거든요.”

“폐하께서요?”

“네. 어떤 미친 여자가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가서 알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미친 여자라.

나는 어색하게 웃는 제럴드를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정말로 미친 취급을 받은 모양이었다.

내가 대놓고 실망하는 기색이자 제럴드가 위로하듯 말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폐하께서도 저러시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까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네. 백작이 죽은…… 그러니까 아무튼 그렇게 된 뒤로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갔거든요.”

상황이 이상해졌다고?

무슨 뜻인지 잘 몰라 고개를 기울이자 제럴드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데프론 공작가가 멸문을 당하면서 폐하를 반대하는 세력이 크게 휘청거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지금 황권이 막강하다고 들었어요.”

“예, 그러니 그들도 이제 알아차린 거죠. 폐하께 도전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걸.”

“…….”

“그래서 작전을 바꾸기로 한 모양이에요. 폐하의 환심을 사는 것으로.”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역시 상인들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던 고급 정보다.

귀족들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동안 수도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던 내가 쉽사리 알 수 없는 것들.

그런 것들을 들으니 확실히 좋기는 한데…….

“근데 그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이게 ‘레오나드의 저주나 나와 연관이 있느냐’였다.

지금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거니까.

“상관이 있죠. 그들이 노린 게 ‘로레이나 아멜리오’와 닮은 여자를 찾는 거였으니까.”

“……네?”

“이미 폐하께서 아멜리오 백작을 사랑했다는 소문은 알음알음 다 퍼진지 오래였습니다. 알고 계실 텐데요.”

물론 그렇긴 했다.

내가 레오나드와 함께 수도 북부에 들렀을 때도 그런 분위기가 풍겼으니까.

“지금 가장 좋은 건 폐하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거죠. 그것 때문에 계속 난리였습니다.”

“…….”

“외모가 닮은 여자를 찾던가, 그것도 아니면 분홍 머리를 찾던가. 그렇게 폐하께 들이 밀어진 여자가 벌써 몇백 명이 넘어가는걸요.”

“…….”

“그런 여자들을 계속 처리하다 보니 호위 기사들도 점점 질려가는 중이죠.”

……어쩐지 나를 바로 끌고 가는 게 능숙해 보이더라니.

나는 곧장 제럴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제가 지금 무턱대고 로레이나 아멜리오라는 걸 밝히면 큰일이 난다는 거죠?”

“네. 지금껏 백작을 사칭한 이들도 많았으니까요. 혹시라도 운이 안 좋으면…….”

제럴드가 갑작스레 손을 들더니 그대로 쓱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지도 모릅니다.”

……저주를 풀어주려고 왔다가 다시 데드 엔딩이라니.

하. 레오나드 행복하게 해주기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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