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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유일한 기억이 되었더니-139화 (139/144)

#139화

레오나드의 생일 파티 준비는 순조로웠다. 그의 측근들이 다 달려와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기사들 양성에 힘을 쏟느라 바쁜 다이아나까지 달려왔다. 파티에는 칵테일이 빠질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너무 반가웠지만, 처음 내 존재에 대해 납득시키기 전까지는 좀 애를 먹었다.

‘하긴, 쉽게 믿기 힘들기는 하지.’

갑자기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로레…… 아니, 셀리아. 준비 얼추 된 거 같은데요?”

“그러네요.”

나는 모두가 힘을 합쳐 꾸민 방 안을 쭉 훑어보았다.

며칠 동안 고생해서 준비한 결과물답게 방 안은 여느 파티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요, 여러분. 다들 고생했어요.”

“고생은 셀리아가 제일 많이 했죠. 방 구성부터 장식품 배치, 그리고 음식 준비까지 다 셀리아가 했잖아요.”

“맞습니다. 저희는 그냥 작은 것들을 도왔을 뿐인걸요.”

다이아나와 제럴드가 차례로 칭찬을 건네자 다른 측근들 역시 박수를 쳤다.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고 나니 조금, 아니 많이 쑥스러웠다.

‘……열심히 준비하기는 했지.’

레오나드가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이제 가지고 있는 패가 많지 않았다. 레오나드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계속 찾아가는 것도 웃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생일 파티라면, 다른 측근들도 함께한다면 어쩌면 오지 않을까?

그런 희망이 마음속에 부풀었다.

그리고 준비한 것들을 보면, 내가 그의 저주를 푸는 일에 정말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아주겠지.

‘……레오나드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작게 웃으며 품 안에 들고 있던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손수건이었다. ‘크루시아’라는 글귀가 새겨진, 레오나드라면 그 의미를 알 수밖에 없는 물건.

‘옛날 건 낡았을 테니까. 새로 준비했지.’

오늘 분위기가 괜찮다면, 생일 선물로 이걸 건네 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것마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운이 좋다면 내가 로레이나라는 것도 알게 되겠지.

“저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방을 다시 점검하는데, 제럴드의 아들이 들어왔다.

제럴드는 여기서 나를 도와주고 있으니, 레오나드를 보필하는 그의 아들이 레오나드에게 초대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긴 참이었다.

“폐하께 말씀드렸느냐?”

“네! 혹시 잊어버리실까 봐 초대장도 책상 위에 올려놓았어요.”

“잘 보이게 둔 거 맞지?”

“아예 편지 봉투도 열어보셨어요. 제가 초대장 읽으시는 거 다 확인하고 나왔다고요!”

흥분해서 외치는 그의 말에 방에 모여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황궁에는 이렇게 웃을 일이 없었다고 들었으니, 다들 오랜만에 생긴 이벤트에 즐거운 것일 터였다.

‘여기에 레오나드까지 오면 정말 완벽하겠다.’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오지 않았다.

방 안의 웃음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아예 사라졌을 때에도. 테이블 위의 음식이 다 식어 굳어버린 다음에도.

푸르던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다음에도 말이다.

* * *

“……리아.”

“…….”

“셀리아.”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위를 바라보자 걱정스러운 다이아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맞닿자 다이아나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요. 여기서 눈을 다 맞고 있으면 어떡해요.”

“……눈?”

뜻밖의 말에 의아해하는데, 순간 볼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멍하니 있던 나는 그제야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맞다. 나 밖에 나와서 레오나드를 기다리는 중이었지.

“들어가서 기다려도 되잖아요. 네? 어서 가요.”

“다이아나.”

나는 쭈그리고 앉아있는 나를 일으키려는 다이아나의 손을 못 본 체하며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움직임을 멈춘 채 내 말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레오나드가 올까요?”

“물론이죠. 누가 연 파티인데요.”

다이아나가 웃으며 나를 달랬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겠으나 지금 나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아, 그런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준비한 거라 오지 않는 건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정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분명 올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

“하지만, 다이아나. 이때까지 안 오는 건. 그냥 안 오겠다는 거 아닐까요.”

내 말에 다이아나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단순히 늦는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둑해진 주변에 그녀 역시 뭐라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이아나가 말을 멈추자 뒤이어 나온 제럴드가 대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잊어버리신 모양입니다. 제가 지금이라도 가서 말씀을 드릴게요.”

“아, 제가 다녀올게요, 아버지! 뛰어서 가면 금방이에요.”

“그러겠느냐?”

나를 안쓰럽게 보던 제럴드의 아들이 곧장 뛸 준비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간단한 동작도 이상하게 버거웠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요. 레오나드는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예요.”

레오나드를 보좌해야 할 제럴드의 아들이 여기에 있다.

만약 레오나드가 초대장을 받은 것을 잊어버렸다면 제 보좌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렇다면 레오나드는 다른 측근을 시켜 그를 찾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이 될 때까지 레오나드로부터 어떠한 명령도 없었다.

그건, 레오나드가 기억을 한다는 뜻이었다. 제 보좌관이 어디에 있는지, 제가 무엇을 받았는지도.

‘……다 알고도 안 왔다는 거지.’

그 초대장, 정말 열심히 만든 건데.

내가 직접 준비했다고, 맛있는 요리도 많이 해둘 테니 오시라고 적어두었는데.

너무 바쁘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들르라고, 최대한 부담 주지 않게 썼는데.

‘정말 정성스럽게…….’

좀 영악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레오나드의 눈에 밟히도록 적었다. 정말 안 오고는 못 버틸 정도로.

그런 걸 보았는데도 오지 않았다면 이제 끝이다. 정말 끝이 나고야 말았다.

나는 결국 레오나드의 벽을 부술 수가 없었다.

“그럼 더더욱 들어가야죠. 방까지 데려다줄게요. 이제 그만 들어가요.”

“아니요. 저는 여기에 있을래요.”

“로레이나.”

다이아나가 굳은 얼굴로 나를 불렀다. 셀리아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내 태도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레오나드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 여기 앉아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니까.

그래, 그냥 고집이었다.

“……눈이 오는 걸 보고 싶어요.”

“제발 들어가요. 걱정되니까. 눈은 안에서도 볼 수 있…….”

“다이아나.”

제럴드가 다이아나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이아나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 우산을 쥐여주었다.

“그럼 우산이라도 써요. 자꾸 눈 맞잖아요.”

“알겠어요. 바쁠 텐데 다들 이만 들어가 보세요.”

“그래도…….”

“다들 해야 하는 일이 있잖아요.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

“가봐요.”

나를 두고 가는 것이 꺼려지는지 다이아나와 제럴드가 서로를 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절대로 나를 혼자 두지 않을 사람들이 고민한다는 건, 정말 바쁜 상황이라는 말이다.

진즉에 갔어야 했는데 나를 위해 이제까지 버텨준 거고.

다들 할 일이 있을 텐데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꼭 우산 써요! 되도록 들어가는 게 좋고!”

마지막까지 들어갈 것을 강조한 다이아나가 제럴드와 함께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 있던 나머지 측근들도 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동안에도 같은 자리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는데, 갑작스레 손에서 힘이 빠졌다.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이 디딜 곳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 우산이 떨어졌네.’

주워야 하는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움직이면 되는데,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좀 이상했다.

‘좀 무리를 하긴 했지.’

며칠 동안 거의 밤을 새워가면서 준비했는데 딱히 마법으로 치료를 하지도 않았으니까.

이 상황에서도 레오나드가 한 말을 지키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났다.

레오나드는, 그 사람은. 정말로 나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생명의 신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는데, 바보처럼 ‘기적’이라는 것이 있을 거라 믿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면서.’

그런 기대를 한 것이 너무 슬퍼서, 그 기대가 처참히 짓밟힌 게 너무 슬퍼서,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우산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눈을 맞으며 펑펑 울었다.

그나마 있던 힘까지 다 빠져 녹초가 된 내가 쓰러질 때까지.

* * *

“이건 다시 제대로 보고해서 올려. 중요한 문제니 서면으로 다시 받아야겠어.”

“예, 폐하.”

“그리고 저번에 이야기한 북부 건도…… 하아. 여기서 뭐 하나, 헨티슨 공작?”

제 보좌관에게 보고를 듣던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앉아 내내 험악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제럴드 헨티슨 때문이었다.

게다가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 옆에는 다이아나 헨티슨도 함께하고 있었다. 제 오빠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서.

“지금 한창 바쁜 시간 아닌가? 헨티슨 공작, 헨티슨 경?”

“지금 업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서요.”

다이아나가 다소 삐딱하게 대꾸했다.

평소라면 제럴드가 그것을 지적하며 뭐라 했겠으나 무슨 일인지 이번에는 그도 가만히 있었다.

그들의 주군인 레오나드는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보아하니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빨리해. 괜히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셀리아가 쓰러졌습니다.”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이때라는 듯 제럴드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답에 레오나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어제 폐하가 생일 파티에 안 오셔서 그거 기다리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요!”

다이아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이아나와는 언제 또 친해진 건지. 레오나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측근들이 하나같이 얼마 전 나타난 마녀 하나 때문에 열을 내고 있지 않은가.

“그게 왜 내 탓이지? 내가 그 파티를 열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나?”

“그건 아니죠! 깜짝 파티니까!”

“그럼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내가 직접 그 마녀에게 명령이라도 했나?”

“그건……아니지만…….”

“보아하니 여기 있는 이들이 마녀가 그냥 쓰러지게 두었을 리는 없고, 자기가 원한 거겠지.”

다 맞는 말이긴 하다. 다 맞기는 한데…….

다이아나가 차마 반박은 하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표정을 볼 수 없으나 레오나드는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제럴드도 마찬가지였다.

덩달아 신경이 날카로워진 레오나드는 옆에 있는 보좌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보나?”

“저는 한 번 찾아가셔야 한다고 봅니다. 어쨌든 폐하를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고, 폐하를 도우려다가 저렇게 아프게 된 거니까요.”

기다렸다는 듯 곧장 대꾸하는 제 보좌관의 모습에 레오나드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측근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보여주기식이라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만신창이가 된 제 옆에 꾸준히 머무르며 어떻게든 일으켜 준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망가진 자신을 말이다.

“갈게, 가면 되잖아.”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게 낫겠는 생각에 레오나드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셀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런 광경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과거의 저를 보는 것 같은, 매우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분홍 머리의 마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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