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레오나드는 방문을 열고 한 발짝 내디딘 순간, 안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셀리아가 여전히 쓰러져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어쩐지 ‘죽었다’라고 생각했다.
분명 셀리아는 숨을 쉬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레오나드는 곧 착각이겠거니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아팠으니까, 그래서 그런 것일 터였다. 그리고 어차피 레오나드는 그녀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돌보는 일도 벅찼다.
“……내 측근들을 아주 잘 구워 삶아놨더군.”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레오나드가 말했다. 그에 셀리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녀가 한참 뒤에 입을 뗐다.
“……헨티슨 공작님이 가보라고 하시던가요?”
“그래.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레오나드의 말에 셀리아가 이불을 꽉 쥐었다. 그 움직임에 이불이 잔뜩 구겨졌다.
깊은 절망감이 셀리아의 온몸을 통해 느껴졌다. 그 이유를, 레오나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레오나드는 셀리아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귀찮았다. 싫다는 그를 억지로 끌어내려는 그 행동이. 제가 다 해결해줄 수 있다는 그 태도가.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레오나드가 그나마 셀리아를 내치지 않고 이 정도로 봐주는 건 다 그녀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측근들이 가라고 했다지만, 안 가도 상관없는데 굳이 여기까지 온 것도 그 이유였다.
어찌 되었든 그를 기다리다가 저렇게 되었다고 하니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아무리 셀리아가 대단한 존재라고 한들, 그의 측근들이 이 정도로 휘둘리는 건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하나같이 꼭 그리워하던 이를 만난 것처럼 구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레오나드는 오늘, 더는 나서지 말라는 말을 돌려서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셀리아였다.
“저는 괜찮으니까 그냥 가세요.”
“무슨…….”
“공작님께는 제가 알아서 잘 말씀드릴 테니까 이만 가보시라고요.”
말투가 전과 달리 싸늘했다.
독한 감기라도 걸린 것인지 목소리가 메마른 가지처럼 갈라지는 와중에도 전혀 나약하다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아마 지나가는 누구라도 단번에 알았을 것이다.
지금의 셀리아가 레오나드를 거부하는 중이라는 것쯤은.
레오나드가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음에도 그는 어쩐지 잘 되었다며 곧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이상했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것을 눈앞의 여자가 거슬려서 그런 것이라 치부해버렸다. 이게 얼마나 큰 후회로 돌아올 줄도 모르고.
“웃으며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황궁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다가 안 되니 짜증이라도 내는 건가?”
“……뭐라고요?”
셀리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사실, 레오나드 입장에서는 그녀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도와주려는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고, 지나치게 헌신적인 데다가 제 측근들까지 단기간에 휘어잡았다.
악의가 없다고 애써 결론을 내렸는데, 다시 만나고 나니 그렇지만도 않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짜증 나.’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그가 애써 쌓아놓은 벽을 허물어뜨리려는 것이.
머릿속에 점점 희미해져 가는, 제 소중한 이와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좋은 황제래요, 레오나드는.’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 남긴 말. 레오나드는 잠시 그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로레이나.’
난 좋은 황제가 아니야. 이건 좋게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아.
“왜? 아니라고 할 생각인가?”
마음을 굳힌 레오나드가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레오나드가 그렇듯, 마찬가지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셀리아는 그만 열이 머리끝까지 오르고 말았다. 안 그래도 몸이 아팠던 것까지 한몫한 셈이었다.
“원래 그런 성격이셨나요? 선의도 이런 식으로 모독하는?”
“단순한 선의가 아닐 수도 있는 일이니까.”
“언제는 악의가 없는 걸 안다면서요?”
“안 그래도 정정할 생각이었어. 내가 착각을 한 것 같아서 말이야.”
……이, 이 자식이? 말 다 했어, 진짜?
셀리아, 아니 로레이나는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애써 쌓았던 신뢰도 무너져서 절망적인데 아픈 사람을 두고 굳이 찾아와 저런 말이나 내뱉고 있지 않은가.
안 그래도 열이 낫던 몸에 화로 인한 열기가 더해지자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냥 대놓고 말해봅시다! 왜 저주를 안 풀려는 건데요? 내가 풀어주겠다는데! 내가 다 해줄 테니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데!”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저주를 푸는 데 집착하는 거지? 당사자가 싫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도대체 왜 싫은 건데요? 저주를 풀면 얼마나 좋은 게 많은데! 옆에 있는 사람들 얼굴도 볼 수 있고! 굳이 서면으로 보고 받지 않아도 되고!”
“참 자세하게도 알고 있군. 저주를 풀겠다고 난리를 치기 전에 네가 이 저주에 관해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설명하는 게 맞지 않나?”
“그건……!”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내 저주를 풀려는 건지도 말해줘야겠는데. 날 구원해주러 왔다는 그런 뻔한 답 말고.”
……당신 구원해주려고 온 거 맞는데.
하지만 로레이나가 아니라 셀리아인 상태에서 이 이유를 댈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지만, 생판 몰랐던 사이인 사람을 이렇게까지 구하려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니까.
로레이나는 처음으로 레오나드가 자신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참 얄궂기도 하지, 레오나드의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결국 로레이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제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요. 저주에 대해서 말해준 것도 그 사람이고요.”
틀린 말은 아니다. 레오나드의 저주를 풀려는 건 레오나드 때문이고, 저주에 대해서 말해준 것도 그가 맞으니까.
하지만 레오나드에게는 이것이 얼버무리는 말로 들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아까보다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내 저주를 풀어야 한다? 그 사람은 어쩌다 저주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렇죠.”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레오나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로레이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다 당신을 위해서인데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해!
“아, 답답해. 폐하께도 안 좋을 거 없잖아요! 그냥 우선 저주부터 풀고…… 콜록콜록!”
흥분해서 말을 뱉던 로레이나가 고개를 숙이고 연달아 기침했다.
목이 안 좋은 상태에서 여러 번 크게 무리해서 말한 탓이었다. 한번 시작한 기침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좀처럼 기침이 멎지 않자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레오나드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분홍 머리.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 뒤에 내뱉는 미약한 숨. 그리고 항상 이어지던 이불 위의 핏물 같은 것들이.
과거와 현재를 겹쳐본 레오나드가 사색이 된 채로 거의 쓰러지다시피 있는 로레이나를 부축했다.
“괜찮아?”
그 다급한 손길에 로레이나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흐릿하기까지 한 시야에 무언가 흔들리는 것이 잡혔다.
그것이 옷 사이로 나온 레오나드의 목걸이라는 건 조금 더 눈을 찡그려 살핀 뒤에야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정체를 확인한 로레이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내가 선물한 로켓 목걸이잖아.’
30년이나 되었을 목걸이는 전보다는 낡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관리를 해준 모양인지 괜찮은 상태였다.
로레이나는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것이 달라진 황궁에서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으니까. 그것도 제가 선물해준 것을.
‘이걸 왜 아직도 하고 있는 거지?’
쿵쿵쿵.
기대감에 가슴이 큰 소리를 내며 뛰었다.
하지만 곧바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오나드는 지금까지 그녀가 뱉은 말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목걸이도 그냥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목걸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을 제럴드와 다이아나가 이것을 버리게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로레이나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레오나드가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발견한 그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사실대로 다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내 저주에 대해 알고 있다니 말하기도 쉽겠군.”
“…….”
“내게는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어. 이 목걸이도 그중 하나지.”
레오나드가 로레이나를 받치지 않은 손을 들어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 말과 행동에 로레이나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기억하고 있었어?’
잊어버리지 않았던 거야? 내가 그 목걸이를 주었다는 걸? 로레이나 아멜리오를?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로레이나는 잠자코 레오나드의 말을 들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앞으로 살날이 몇백 년은 남았어. 누군가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아마 그럴 테지.”
“…….”
“저주를 풀게 되면 그만큼 또 새로운 기억이 쌓여갈 거야.”
레오나드는 이제 목걸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목걸이와 관련된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이.
“……안 그래도 나는 그 기억들을 점점 잊어가고 있어. 그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고 싶지 않아.”
아니, 가능하면 이 기억을 영원히 묶어 두고 싶다. 어디든 가지 못하도록.
저주를 풀지 않는다면, 새로운 기억이 오래된 기억을 덮지 않는다면. 최대한 그렇게 있을 수 있겠지.
“그러니까, 저주를 푸는 건 그만둬. 네게 소중한 것이 있듯 나 역시 그러하니까.”
말을 마친 레오나드가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고 로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말했으면 그녀도 이제는 알아듣고 단념할 것이었다. 정말 순수한 선의로 다가온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로레이나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큰 충격을 받아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레오나드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말을 뱉으면서.
“……제가 로레이나라고 한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