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저주를 풀게 되면 그만큼 또 새로운 기억이 쌓여갈 거야.’
‘……안 그래도 나는 그 기억들을 점점 잊어가고 있어. 그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저주를 푸는 건 그만둬. 네게 소중한 것이 있듯 나 역시 그러하니까.’
나는 이어지는 레오나드의 말을 들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그가 뱉은 말 하나하나가 내게로 날아와 심장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레오나드의 말은 하나같이 무겁고 뜨거웠다. 도무지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고작, 고작 그런 이유로?’
레오나드가 저주를 풀지 않는데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의 곁에 있을 적만 해도 저주를 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 어느 누가 그런 지옥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싶겠는가.
그러니 저주를 풀고 싶다는, 그런 엄청난 욕망이 사라진 거라면. 틀림없이 아주 중대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랬는데…….
‘다 나 때문에 그런 거였단 말이야?’
저주를 풀어서 새로운 기억이 생기게 되면, 나와 있었던 일이 묻힐까 봐? 그대로 사라질까 봐?
정말 어이가 없었다. 너무 한심했다.
몇백 년을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는데, 고작 옛 연인과의 기억을 간직하겠다고.
안 그래도 점점 잊어가서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겠다는 레오나드가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바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날 것만 같은지.
‘……내가 이 세계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내가 돌아오지 않는 세계에서 레오나드가 혼자 이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손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이 세계에 오지 않았다면, 레오나드는 그러고 있었겠지.
내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아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는 동시에 어쩐지 화가 났다.
그래서였다. 말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으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입을 열었던 것은.
“……제가 로레이나라고 한다면요?”
“뭐?”
레오나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무래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다시금 말했다.
“제가 로레이나 아멜리오라면요. 그러면 저주를 푸실 건가요?”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아까까지는 다소 부드럽던 기운이 내가 ‘로레이나’라는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칼날같이 변했다.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기운에 살갗이 에일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레오나드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어.”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로레이나 아멜리오라고.”
카앙-.
레오나드가 제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나는 내 목덜미에 닿은 그것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준비성도 참 철저하시지.’
집무실에서 여기로 왔을 레오나드가 칼을 소지하고 있다는 건, 그가 중간에 챙겨왔다는 소리였다.
저런 칼을 들고 집무를 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쯤 되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정말 나를 하나도 믿지 않았구나.’
한 달, 아니 다시 태어나 레오나드를 구원하기 위해 고생했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 떠올라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그의 신뢰를 얻기 위해 애쓴 건, 다 쓸모없는 짓이었나? 여기서 더 노력한다고 변하는 게 있나?
그렇게 생각하니 망설임은 사라졌다.
내가 지금껏 잘못 생각했다. 내 목적은 레오나드의 환심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저주를 푸는 거지.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레오나드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살짝 베었고 그 상처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비하면, 이런 상처 따위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런 나를 보던 레오나드가 조소했다.
“……역시, 단순히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었군.”
“…….”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게 많더라니. 황궁에 첩자를 심어놓고 주워듣기라도 했나?”
말을 잇던 레오나드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 옆쪽, 그러니까 분홍색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디서 잘도 비슷한 머리 색을 가진 여자를 구해온 모양인데.”
“…….”
“꺼져. 잘못 짚었으니까.”
나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하는 거니까.
지금의 레오나드에게 모든 걸 설명하고 납득시킬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어제 밖에서 쓰러져 내내 눈을 맞은 몸뚱이가 이제는 한계라는 듯 비명을 질러댔다.
“아까 내가 말한 게 로레이나 아멜리오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나?”
“…….”
“천만에. 그런 여자 잊은 지 오래야. 별로 중요한 존재도 아니라고.”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는지.”
“……말도 안 되는 수작이라.”
레오나드가 폭포수같이 말을 쏟아낸 이후로 처음 뱉은 말이었다.
그가 왜 저러는지 알았다. 제럴드가 말하길, 레오나드는 로레이나 아멜리오를 사칭하는 자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으니까.
괜한 희망으로 괴로워할 바에는 그냥 모든 것을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나는 그 과정들을 납득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이제 더 못 버틸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듣는 건 아니었다.
너무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자연스러운 레오나드를 보고 있자니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게 정말 연기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레오나드가 말한 소중한 기억이 정말 로레이나와 관련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래요. 뭐, 내가 꺼져주면 되는 거죠.”
나는 내 앞의 칼을 손등으로 밀어 치우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땅에 발을 디딘 순간, 머리가 울렸으나 꾹 참았다. 적어도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된다.
“저는 나갈 테니 저주 같은 거 풀지 말고, 소중한 기억 끌어안고 평생 사세요.”
“…….”
“바라시는 대로 다시는 안 올 테니까.”
그대로 레오나드를 지나치려던 나는 다시금 몸을 돌려 그의 앞에 섰다.
아, 까먹을 뻔했네. 아직 남은 게 있었는데.
“그 전에, 너무 열이 받아서 이건 하고 가야겠어.”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레오나드에게 다가간 나는 그대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하얗고 둥근 이마에 세게 꿀밤을 먹였다.
탁-!
꽤 커다란 소리에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뇌까렸다.
“혼자 잘 살아라, 이 자식아.”
그리고 나는 레오나드의 생일 선물로 준비했던 손수건을 그 앞에 던져주었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못 한 레오나드를 두고 성큼성큼 밖을 나서자, 밖에서 허둥지둥 움직이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여니 제럴드와 다이아나가 밖에서 딴청을 부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레오나드를 보내기는 했는데, 어떤 식으로 굴지 몰라 걱정이 되어 따라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해. 대차게 망했는데.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떠납니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문을 닫은 뒤 걸어가는 내 뒤로 다이아나가 따라붙었다. 그 옆에는 절망적인 얼굴의 제럴드도 함께였다.
“이,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아직 폐하의 저주도 못 풀었잖아요!”
“당사자가 안 푼다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그냥 저렇게 살라고 하세요.”
“로, 로레이나. 잠깐만요. 일단 흥분 좀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생각해봐요. 몸도 안 좋잖아요.”
“아니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빙글 몸을 돌려 제럴드와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생각해 볼 것도 없어요. 여기 있다가는 몸이 더 나빠질 것 같아요.”
“하,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는 건…….”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꾸벅 인사를 건네자 제럴드와 다이나아는 뭐라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이제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제약을 지킬 필요도 없으니, 내 마음대로 써도 괜찮으니까.
그렇게 순간 이동이 되기 직전, 나는 내가 닫고 나온 방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맞다. 폐하께서 나오면 이렇게 전해주세요.”
“…….”
“제가 던진 거, 마지막 선물이고. 소원권 하나 남은 건 그냥 없는 셈 치는 걸로 알겠다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앞에 환한 빛이 깃들었다.
잘 있어라, 황궁아.
진짜 다시는 안 올 거다, 정말로.
* * *
‘뭐지?’
방에 혼자 남게 된 레오나드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먼저 칼을 뽑아 들고 공격을 시도한 것은 그였으니, 무언가 반격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난데없이 꿀밤을 맞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레오나드는 폭풍처럼 지나간 어질어질해진 머리를 짚었다.
‘정말 간 건가?’
한 달이나 끈질기게 따라다닌 사람이 갑작스레 사라지니 잘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라면 경멸하며 곧장 죽일 듯 달려들었어야 할 자신이 망설였다는 것도.
왜일까? 로레이나를 사칭한 것들은 다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작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던 레오나드의 손에 살짝 튀어나온 곳이 잡혔다.
겉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았고 만져봐야 겨우 알 수 있는 정도의 붓기였다.
그래도 저를 따라다니느라 헉헉대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온 힘을 다해 힘껏 때렸을 것이 분명했다.
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라?’
저도 모르게 한 생각에 레오나드가 멈칫했다. 예전이라니? 언제를 말하는 거지?
레오나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고, 곧 해답을 찾아내었다.
애초부터 남은 기억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일이었다.
레오나드가 성년이 된 이후로 처음 아멜리오 백작가에 갔던 날이었다.
그때의 그는 무작정 찾아온 제 이기심을 깨닫고 돌아가려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분명 그를 붙잡으려고 달려오던 여자가 있었다.
너무 급히 달려온 탓에 여자는 넘어지고 말았고, 그런 그녀를 레오나드가 받아들자 곧 이마에 꿀밤이 날아…….
거기까지 생각한 레오나드가 숨을 멈추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아니었더라면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까.
곧 진즉에 깨달았어야 할, 그가 그토록 바랐던 이름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로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