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1 - 내 부하가 미친 듯이 유능하다 =========================
#1 - 내 부하가 미친 듯이 유능하다(16)
내 파티를 향한 엄청난 오해를 풀고자 싸늘한 주검이 된 모험가 킬러들의 시체를 보여주었다. 모험가 킬러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죽어있었다.
“정말요...?”
“저게, 킬러라고요?”
아무리 봐도 선량한 피해자로밖에 보이지 않나보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는 나도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명할 방법이 아주 없지만은 않았다.
“이걸 보라고. 이놈들의 모험가 신분증.”
보다 못한 리나가 킬러들의 목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동그란 회중시계 옆에 달린 버튼을 달칵 달칵 누르고 조작하자 회중시계 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악명 434] [악명 412] [악명 377]
모험가들은 그제야 납득했다.
“정 뭣하면 이것도 보라고.”
리나는 회중시계를 다시금 조작해 다른 창을 띄웠다.
[모험가 살해 횟수 31회] [모험가 살해 횟수 27회] [모험가 살해 횟수 22회]
의외로 신분증에는 별에 별 게 다 기록되나보다.
“모험가 킬러는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고 다니지 않으니까 보통은 걸리지 않아. 대신 검문절차에서 신분증을 확인할 때, 살인기록이 안 들키게 수를 써야지.”
“수를 쓴다니...?”
“애초에 죽일 때 치명상만 입히고 죽이는 건 몬스터가 하도록 방치하거나, 아니면 경비들의 감지마법을 속여 위조기록을 보게 만들거나.”
모험가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걸 꼬마아가씨는 어떻게 아는 거야?”
“어... 그건...”
난처해하는 리나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마무리가 어설프기는.
“저 녀석이 알려줬다.”
나는 카이사르를 가리켰다.
모험가들은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저런 흉악한 생김새면 의심할 법도 하다.
이후로는 별 다른 소동은 없었다.
다행히도 모험가들은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하루 만에 간신히 입구로 돌아왔다.
“B2층부터 여기까지는 걸어서 고작 4시간 거리인데...”
“초행이라잖아. 무슨 일을 당할지 무서우니까 조용히 해.”
난 너희들의 반응이 무섭다.
“탐사를 마치고 오시는 길입니까?”
“네. 검문은 좀 생략해도 될까요? 모험가 킬러와 마주쳐서 길드에 급히 보고를 해야 하거든요.”
“으음. 알겠습니다. 경과보고만 경비대에 제대로 전달해주십시오. 연대책임을 질 대표자는 누구로 선정하겠습니까?”
나는 깔끔하게 정했다.
“저쪽과 이쪽은 다른 파티다. 여기서는 내가 대표자다.”
“알겠습니다.”
모처럼 모험가 킬러들을 넷이나 잡았다고.
괜히 공적을 공유하는 건 사양이다.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것도 공적이지만 킬러를 죽인 공적에 비하면 월등히 부족하단 말이지.
“쳇...”
삼인조 모험가 파티에서 도적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나 약삭빠르게 공적을 합쳐서 공유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미궁도시 내에서만 한 세기를 보냈던 초 베테랑 게이머인 내가 그런 속셈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다.
“그쪽의 도적. 홀란이라고 했던가?”
“예, 옙?”
“덕분에 미궁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왕 모험가 길드에 보고할 겸, 함께 가도록 하지.”
도적은 죽을상을 지었다.
모험가 길드도 본점이 도시 중앙부근에 위치해있는 거지, 네 방위마다 하나씩 분점이 자리하기도 했다.
은근슬쩍 다른 곳으로 가서 우리를 피하려던 속셈도 무산되었고, 수작을 부리려던 것도 들켰으니 저런 얼굴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맙소사. 이 정도 증거물이라면... 틀림없군요. 요즘 한참 떠들썩하던 신입털이 파티입니다. 현상금도 달려있어요.”
모험가 길드 직원은 퀘스트 완료 정산과 모험가 킬러들에게 달린 현상금 지불, 경비대에 제출할 보고서 작성을 모두 마쳤다.
[모험가 길드의 퀘스트 ‘고블린 토벌(반복)’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1실버 5쿠퍼를 습득했습니다.]
[모험가 킬러들로 구성된 신입털이 파티를 사살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상금 10골드를 습득했습니다.]
[모험가 길드 내에서의 평판이 상승합니다.]
[수행 가능한 퀘스트 목록이 증가합니다.]
[하급 퀘스트 보드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경비대에 제출할 보고서를 습득했습니다.]
길드 직원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가급적이면 모험가 길드에서 보고서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의미지?”
“경비들은 날도둑이거든요. 그 자리에서 검문을 당하면 소지품 검사도 받고, 수익의 10%에 해당하는 현물을 뜯겨요.”
미궁도시에서는 없던 일이다.
나는 인상을 구겼다.
“버릇이 나쁜 녀석들이군.”
“후후. 대신 길드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면 예상수익금을 작성하고 그 금액의 10%를 지급하죠.”
“그렇다는 건...”
“길드와의 협상에 따라 금액을 조정하고, 이득으로 굳은 금액의 일부를 저희에게 주시는 거죠. 이번에는 처음으로 보고서를 이용하셨으니 특별히 저렴한 액수를 적었어요.”
“어차피 고블린 밖에 안 잡았다만.”
뭘 생색내는 거냐, 이 직원은.
1실버에서 10% 떼도 10쿠퍼잖아.
딱히 부담 안 된다고.
“어... 경비대는 현상금도 10% 뜯으려고 들 걸요?”
“배려에 감사한다.”
“후후. 모험가끼리는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아참, 제 이름은 에릴이에요. 절 지명해주시면 전담으로 업무 봐드릴게요.”
소소한 부분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가 있었다. 경비대의 강제징수나 모험가 길드의 보고서, 지명 직원 등등.
세계관이 확장된 만큼 새로운 요소가 늘어났다는 게 흥미롭기도 하고, 우려가 되기도 했다.
당장은 변화를 빠르게 인지할 수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어떤 변화가 갑자기 튀어나와 발목을 붙잡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카이사르와 리나는 엄청나게 강했다. 무력이 필요한 변화라면 대부분 이 부하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다.
에이잇.
귀찮은 일은 이제 그만 생각 할란다. 랭커를 목표로 하는 건 개인적인 성취감 때문이고, 게임에서 돈을 벌려는 건 벌면 좋으니까 그런 거다.
딱히 미궁을 나오자마자 일에 매달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부하들에게 선언했다.
“오늘은 고급여관에서 숙박한다.”
“감사합니다.”
“와아! 보스 최고!”
여관방을 따로 잡아봤자 멋대로 내 방에 쳐들어오잖아.
오는 도중에 몇 명이 희생당할지도 모르고.
나름 수고하기도 했으니 포상을 겸해 내린 선택이다.
여관에 방을 잡고 목욕탕에서 깨끗하게 몸을 씻은 뒤.
우리는 한결 개운한 상태로 테이블에 모였다.
범죄길드의 이목을 피해야하기에 리나는 여전히 밋밋한 회색로브를 뒤집어썼다.
“우우, 싫다 진짜.”
“얌전히 굴면 맛있는 걸 사주지.”
“꿀꺽.”
맛없는 비상식량에 비하면 고급여관의 요리는 극락이다. 구수한 김이 오르는 통닭에 뜨뜻한 옥수수스프, 마무리로 시원한 맥주까지 더해 풍족한 한상이 차려졌다.
“크으~ 행복해!”
16살이라고는 해도 아직 어린 리나가 맥주를 마셔도 되나 싶었지만 애초에 사람도 죽이는 암살자한테 고작 그런 걸로 태클을 거는 게 의미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15살인 카이사르는 옆 테이블의 용병들 못지않게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마시고 있는데 알게 뭐람.
개운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면서 나는 이번 미궁탐사로 느낀 점을 밝혔다.
“파티의 전원이 길치인 상태로는 탐사가 힘들겠더군.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다만. 리나, 스킬을 배울 생각은?”
“전혀 없음!”
“역시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보스의 뜻대로 하십시오.”
“도적을 구해보고, 안 되면 지도를 구매하겠다.”
성가신 문제에 대한 방침을 밝힌 뒤.
“두 사람. 주량은 어떻게 되지?”
카이사르는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리나는 풉, 하고 웃으며 손가락을 네 개 펼쳤다.
“그래서, 단위가?”
혹시나 하고 던진 물음에 역시나 카이사르가 충격적인 단위를 밝혔다.
“세 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통은 큼지막한 술통을 말한다.
애초에 이 동네에서 사용하는 술컵은 커다란 2000cc 맥주컵인데, 술통은 이 맥주컵으로 맥주를 건져내기를 백 번도 더 해야 바닥이 난다.
최소 20만cc 술통이 세 개면 카이사르의 주량은 못해도 60만cc다. 이것도 ‘안 취하고 마시는 주량’이란다.
“네 컵...”
시무룩하게 말하는 리나도 한 컵 가득 담는 게 2000cc임을 감안하면 8000cc를 마신다. 몸 많이 쓰는 건강한 암살자라는 걸 감안해도 예사롭지 않은 주량이다.
건강한 암살자라니까 뭔가 어감이 희한해지네.
“그러고 보니 보스는 주량이 어떻게 돼?”
갑자기 카이사르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보스. 벌써 한 컵 마시지 않았습니까?”
“어? 어. 그러네.”
벌떡!
카이사르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냐.”
하도 표정이 심각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어째서 무리하게 저희들과 어울려주신 겁니까. 보스의 주량은 한 모금이 아니었습니까!”
미친. 그게 사람이냐.
빌헬름 마이어는 설정 상으로 얼마나 연약했던 건데.
체질 능력치도 10인데 몸이 걸레짝보다 못하네.
“당장 프리스트를 구해오겠습니다. 리나, 너는 보스를 숙실로 모셔라.”
우당탕탕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카이사르는 여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제 와서 술이 쌔졌으니 프리스트는 구하지 않아도 된다, 같은 말은 죽어도 못할 분위기다.
“보스... 첫 탐사를 기념해서 무리한 거야?”
“아니, 그냥 기분 내려고 마신 거다.”
“무리해서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일단 숙소로 가자. 응?”
아니, 뭐 이런.
나 맥주 마시고 싶다고!
“보스, 빨리이─!”
조그마한 녀석이 나를 부축하려고 낑낑끙끙 거리는데 무시하고 앉아서 맥주나 처마실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미련이 남아서 맥주잔을 돌아보니 리나가 다 이해한다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걱정 마. 남은 음식은 포장해서 위로 가져오라고 할게. 첫 탐사 기념은 우리끼리 위에서 음식만 먹으면서 해도 되잖아.”
“아니, 나는 맥주를…”
“보스도 참. 알았어, 맥주도 올려 보내라고 할 게.”
오오, 역시 융통성이 있군.
알아주었구나?
카이사르가 호들갑을 떤 거라고.
“나랑 살인광 녀석이 침울해지는 게 싫은 거지? 보스의 몫까지 둘이서 시원하게 마실 테니까, 그렇게 걱정해주지 않아도 돼! 신경 써줘서 고마워!”
[리나의 호감도가 3 상승합니다.]
[리나의 충성도가 1 상승합니다.]
이런 시발.
부하라는 연놈들이 아무도 내 말을 듣질 않잖아.
“보스, 몸이 아프면 안마라도 해줄까?”
“...좋다.”
그래도 기특하니까 참아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안마를 해주는 부하라는 건 꽤 좋다.
맥주나 마시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으음. 피곤하군.”
숙소는 3인실이니까 부담 없이 잠들 수 있다.
탐사를 마치고 쌓인 피로도 몰려오고, 안마도 받아서 몸의 긴장이 잔뜩 풀렸다.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은 몸을 이끌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미안하지만 카이사르가 오면 깨워주겠나.”
“걱정 말고 자, 보스.”
기특한 녀석.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웠다.
몸은 빠르게 수면을 취했다.
[수면모드에 돌입합니다.]
[이벤트가 발생하거나 피로가 모두 회복되기 전까지 수면상태를 유지합니다.]
* * *
[Tip> 수면 중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야영지를 노리고 모여든 몬스터들의 급습, 재산을 노리는 도둑의 침입. 대부분의 이벤트는 당신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이런 상황을 알려줄 동료가 없다면... 그저 운이 좋기만을 바라십시오. 당신이 깨어날 확률은 우연히 예민한 감각으로 깨닫거나 운 좋게 눈을 뜨는 수밖에 없습니다.]
* * *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수면이 종료됩니다.]
[소모된 건강상태가 상당히 회복되었습니다.]
졸음이 밀려난다. 느릿하게, 점차 또렷해지는 감각 너머로 카이사르의 굵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보스. 프리스트를 데려왔습니다.”
진짜 데려왔냐…….
어쩌지.
딱히 아픈 곳도 없는데.
그보다 진짜 쓸데없는 부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유능하네.
프리스트가 데려오고 싶다고 데려올 수 있는 거였나.
“어디서 온 프리스트인가.”
“종말의 교단에 소속된 사제분입니다. 정말로 어렵게 모셔왔습니다.”
“반갑소. 본관은 종말의 사제, 루블릭이라 하오.”
시발.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종말의 사제라니.
이건 뭐 내 숙취와 목숨을 사이좋게 끝장내려는 거냐?
============================ 작품 후기 ============================
선추쿠 및 쪽지, 여러분의 많은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