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4 - 내 조직이 이상한 유명세를 얻었다 =========================
#4 - 내 조직이 이상한 유명세를 얻었다(22)
브람 시의 유력자들은 숨죽이며 존재감을 낮췄다.
평범한 폭동 따위가 아니다.
도시의 지배체제 그 자체가 뒤틀릴 수 있는 대소동이다.
자칫 잘못 휘말렸다간 반역자가 될 수도 있고, 양 진영에 물자징발을 당해 전 재산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안전한 쪽을 택하면 된다는 물러터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색은 투명할수록 좋다. 괜히 한쪽 진영과 연관되어 자칫 줄타기에 실패했다간 그대로 목숨을 잃는다.
위험한 도박에 나설 바에야 모두가 중립을 선언하며 승리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 낫다.
“이게 가장 옳은 선택이다.”
유력자들의 대표는 대마법사 하인즈. 백발이 성성한 외모 못지않게 축적된 지혜와 연륜을 지닌 자다.
마나의 힘을 사역하며 육체의 노화마저도 미루어가며 생을 유지한지 어느덧 130년째. 마도의 길을 개척해낸 일대종사로서 [증폭학]의 선구자라는 명성마저 습득했다.
“틀림없다.”
유력자들이 그를 인정하고 조언을 구하며 모두가 불만 없이 따르는 것도 당연했다. 이 도시에서 연륜과 경험, 실력 면에서 그 이상 가는 유력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의 선택이 진정으로 옳았는지 고뇌에 빠지기 시작했다.
“틀림없을 터이나... 아무리 지혜에 통달한 나라도 미처 이 상황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암흑가 일존육강을 주축으로 한 공성측 대 하이칼 경비총장과 알큐러스 기사단장을 주축으로 한 수성측의 전쟁. 여기까지라면 최악의 사태라고 상정하고 대비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 미궁도시 브람에는 또 하나의 신흥세력이 활개치며 거대한 변수를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흑산회 보스, 빌헬름 마이어. 6강의 일원이니 당연히 공성측에 참여해야 할 그가 흑산회의 전 병력을 동원해가며 공석이 된 [시장]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하인즈 대마법사님. 이들이 내세운 카드는 상당합니다. 도로시 이지스와의 혼약이라면 저희들로서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피잔 내무총장과 패트리 정보총장도 그를 지지한다고 합니다. 시장을 암살한 반역도당도 그들이 받아들인 암살길드의 일원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범은 하이칼 경비총장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공성측과 수성측 모두 믿을 자들이 못 됩니다. 흑산회를 따르는 게 대세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유력자들은 이미 마음이 기운 모양이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오. 이대로 빌헬름 마이어에게 지지선언을 내릴 수는 없소. 그는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오.”
“대체 어떤 고비가 남아있단 말입니까?”
유력자들의 물음에 대한 답이야 뻔했다.
“본래 도로시 이지스와 혼약을 맺을 예정이었던 제 3 왕자가 남았소. 그가 살아있는 한 왕실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당연히 시장즉위 또한 불가하지.”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망나니 녀석이 성욕에 눈이 멀어서 브람 시에 방문한 이상, 이번 사태에 휘말려 덜컥 죽기라도 하면 왕가도 방법이 없습니다.”
“소동이 벌어지자마자 종적을 감춘 왕자를 어찌 찾아낸단 말이오. 유력자들의 정보력으로도 신원을 확보할 수 없는 왕자를 찾아내는 게 정녕 가능하리라 믿소?”
제 3 왕자.
그의 신변을 찾아낼 수 없는 이상, 흑산회의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왕자를 숨긴 건 하인즈 그 자신이었다.
‘본래는 멸혼객에게 인질로 잡힐 것을 우려하여 몸을 숨기도록 조치한 것이었지만... 이유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빌헬름 마이어가 내 거처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흑산회에 마법사 전력이 없다는 건 일찌감치 확인했다. 설령 숨겨둔 전력이 있더라도 대마법사인 그가 결계마법까지 걸어둔 은신처를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핫산 상단주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보고를 할 때에는 그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큰일입니다! 왕자가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뭣!? 대체 어떻게!”
“마법스크롤로 결계를 탐지한 흑산회에서 암살자를 보내 왕자를 제거했다고 합니다!”
송골이 묘연해졌다.
그저 불운하게 탐지에 걸린 게 아니다.
마법스크롤은 값이 비싸다.
‘이유 없이 그냥 찢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왕자가 도시 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위치에 결계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존재했다.
마법이 아니라면 정보력으로 찾아낸 것이다.
수도의 동향을 주시할만한 인물.
대마법사인 그의 은신처를 알만한 인물.
적어도 두 명의 강력한 실력자들이 흑산회를 도왔다.
‘현재 흑산회의 적이 아닌 사람 중에서 왕자가 도시에 출입했음을 알 수 있는 인물은... 시장의 최측근. 그 중 행방이 묘연한 피쟌 자작과 패트리 자작밖에 없다.’
아니. 아직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는 갖춰지더라도 패트리 정보총장이 그의 아지트를 파악할 수는 없다.
별도의 정보망이 필요하다.
마법적인 지식 또한 갖춘, 시장의 정보조직을 능가하는 정보력을 지닌 누군가가...
벌떡!
“하인즈님?”
“상급정보상인...”
“예?”
틀림없다.
대마법사의 결계마법조차 우습게 여기며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건 상급정보상인밖에 없다.
한 도시에 한 명조차도 체류할까 말까하며, 그 영향력은 능히 한 국가에 파란을 일으키며 대륙 전역에까지 파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라고 여겨진다.
‘아무나 상급정보상인과 거래를 할 수는 없어.’
거대조직의 수장이나 영웅급 강자, 일국의 최고수뇌부 정도가 아니라면 상급정보상인은 거래를 하지 않는다.
흑산회? 거대조직이라 불리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조직으로서의 역량을 한참은 더 키워야 할 거다.
일국의 최고수뇌부는 당연히 될 수 없다. 느닷없이 빌헬름 마이어가 왕이라는 소리가 성립될 리 없다. 그렇다면 현실성이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 뿐.
‘그가... 실력을 숨긴 영웅급 강자란 말인가!?’
도시의 유력자들 중에서도 정상급 실력을 지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영웅급 강자’라는 게 어떤 수준인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건 [반 영웅 멸혼객] 같은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그 정도가 되지 않으면 영웅 취급은 받을 수 없다.
즉, 달리 말하자면 빌헬름 마이어는 멸혼객과 동급이다.
“그런 거였는가!!”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맞물리지 않았던 상황과 알 수 없는 의혹들이 일제히 해소되었다.
흑산회 보스, 빌헬름 마이어.
그가 영웅급의 강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멸혼객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탄 이유가 설명된다. 상급 정보상인에게 정보를 구매한 이유가 설명된다.
“큰일입니다! 흑산회가, 흑산회가 찾아왔습니다!”
“으으음...!”
마침내 올 것이 와버렸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자들이 앞장서서 길을 트고, 그들의 사이로 실력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 자들은...!”
놀랍게도 나타난 면면들은 보통 인선이 아니었다.
“내무부의 피쟌 자작에 정보부의 패트리 자작!? 실종됐다고 알려진 저들이 어째서...!”
“저자들이다! 현상수배지가 붙은 시장을 암살한 암살조직의 일원들이야! 저들이 시장의 최측근 가신들과 함께 한다는 건... 역시 하이칼 경비총장이 씌운 누명이었던 건가!”
“정보부의 비밀요원들이 틀림없어. 저만한 실력을 지닌 자들이 느닷없이 나타날 리도 없으니까. 공성측도 수성측도 전부 쓰레기들이었어!”
격분하는 유력자들을 향해 한 남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진정하시지요. 노기를 드러내기에는 시기도 지리도 걸맞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서야 할 자리는 이런 비좁은 은거지가 아닙니다.”
“맙소사! 저 자는 치유의 교단 사제장!? 치유의 교단까지 흑산회를 지지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희는 빌헬름 마이어와 도로시 이지스의 혼례를 지지합니다. 이들이야말로 브람 시를 대표하는 연인이 되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바로잡을 인재들입니다.”
마침내 인파의 너머로 누가 봐도 싸이코처럼 생긴 악명이 자자한 카이사르와 귀여운 금발 여자아이 리나가 나타났다. 빌헬름이 가장 아끼는 두 부하의 등장이었다.
“으음. 악마계약자라던 소문은 허명이 아닐지도 모르겠어. 저 사악한 얼굴을 보면 왠지 모르게 온 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어.”
“듣기로는 저 여자아이가 빌헬름 마이어의 노리개라지? 대단한 실력의 단검술을 지니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저만한 미색이라면.. 흠흠.”
“적어도 실력 면에서 보스의 총애를 받는 두 부하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은 없군. 능히 6강의 반열에 들 만한 실력이야. 저런 부하가 있으니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지.”
이윽고 두 사람의 뒤로 흑산회의 보스, 빌헬름 마이어와 도로시 이지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도로시 이지스의 미모가 예사롭지 않기는 하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그녀에게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다.
빌헬름 마이어의 한없이 느긋하고 나른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그의 기백에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짓눌리는 것만 같은 엄청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장난이 아니군. 교주 라만과는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맹세컨대 그의 기백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좌중을 휘어잡는 장악력은 단언컨대 발군이다.”
“파괴자 루커스로도 견줄 수 없어. 이 남자의 기백은 한층 더 짙어. 그래. 연륜과 노련함이라는 게 느껴지는 기백이다. 마치 백전노장 같은 기세라고 할까.”
“그렇다고 기세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건... 그래. 직접 본 건 단 한 번밖에 없었지만 영혼살해자의 기세가 딱 이랬었지. 그게 누구냐고? 멸혼객 말이야, 멸혼객!”
유력자들은 빌헬름 마이어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했다.
“가차 없이 삼 왕자를 제거하는 판단력과 실행력으로 보아 정치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는 자다. 실무적인 능력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소문으로는 흑산회가 블랙마켓을 강탈하고 내부운영을 순조롭게 마친 뒤, 이익을 모조리 강탈했다고 하더군. 그걸 듣고도 떠올리는 바가 없는가?”
“맙소사! 자신의 조직도 아닌 적대조직의 정보를 순식간에 모두 파악하고 그걸 토대로 블랙마켓을 운영해? 흑산회에 모략가는 있더라도 내정형 인재는 없어. 그렇다면...”
빌헬름 마이어는 실무적인 능력마저도 갖추었다.
“무력으로는 교주 라만에게 가르침을 베풀 정도다.”
“정치력으로는 삼 왕자를 제거할 정도다.”
“내정력으로는 블랙마켓을 단기간에 운영할 정도다.”
무력과 정치력, 내정력을 고루 갖춘 인재.
“심지어 그는 멸혼객에 버금갈만한 실력을 지녔고.”
“멸혼객은 반 영웅. 다크히어로이지.”
“하인즈 대마법사님!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하인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능형 영웅이오.”
역사 상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만능형 영웅의 출현.
전대미문의 실력을 지닌 자가 나타났다.
흑산회 보스, 빌헬름 마이어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저 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아니...! 빌헬름 마이어의 뒤에, 그보다 더한 자가 있다고!?”
“만능형 영웅보다 더한 무언가를 지닌...!? 대체 어떤 능력을 지녔지? 우리들의 안목으로는 파악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천외천의 존재란 말인가!?”
너울 치는 파도처럼 격렬하게 동요를 금치 못하는 유력자들의 태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람은 뻘쭘하니 대답했다.
“도로시 아가씨의 유모인데요.”
“헷갈리게 시리!!”
“이상한 데서 튀어나오지 말고 한쪽에 짜져있어!!”
유모는 시무룩하니 행렬의 한편으로 물러났다. 도로시는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해져서 양손을 들어 고개를 묻었다.
어색해진 분위기가 이어지기도 잠시. 마침내 빌헬름 마이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본인은 도로시 이지스와의 혼인 및 차기 시장즉위를 인정받고자 이 자리에 나섰다.”
유력자들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잇따라 대답했다.
“핫산 연합상단은 빌헬름 마이어를 인정하겠습니다.”
“장인협회는 빌헬름 마이어를 인정하겠습니다.”
“모험가길드는 빌헬름 마이어를 인정하겠습니다.”
모든 유력자들이 대답을 마치자 마지막으로 하인즈 대마법사 또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본 유력자 일동은 두 분의 혼례를 축하드리며 빌헬름 마이어님의 시장즉위를 지지하겠소.”
“.......”
“단순한 겉치레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오? 과연 악명이 자자한 흑산회 보스답군. 충성의 증표를 원한다면 휘하 세력을 모두 동원하여 세를 불려드리겠소.”
빌헬름 마이어는 대뜸 지들 멋대로 항복하니까 할 말이 없어서 침묵했을 뿐이다.
물론 하인즈 대마법사와 유력자들은 그런 진상 따위는 상상조차도 못한 채, 헛물을 들이키고 결혼선물이다 시장즉위선물이다 하며 수많은 희생 및 출혈을 각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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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보스 유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