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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하들이 미친듯이 유능하다-153화 (153/224)

00153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3)

하인즈 대마법사는 간신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게 제안인지 협박인지는 둘째 치더라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 아니겠는가.

“보스도 참. 마음 씀씀이가 너무 무르다니깐!”

“그런가.”

“리나였으면 절대로 토마토를 수확했다구!”

응, 그게 문제야.

그거 무서워서 쟤 편을 못 들어주고 내가 개새끼가 됐어.

“늙은이가 쓸모 있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오냐오냐 해주다보면 주제도 모르고 또 금세 까불게 된다고?”

“으음.”

“야금야금 그렇게 이권을 하나씩 넘겨주다보면 어느새 저 영감이 없으면 곤란한 상황이 될지도 몰라!”

지금 그 발언을 너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시켜봐라.

그럼 내 지난 2년간의 행적이 된다.

“그래도 다행이지? 똑 부러지게 현명한 리나가 곁에 있으니까!”

“그렇군. 네가 있군.”

“그러니까 다른 여자한테 한 눈 팔면 안 돼? 다른 남자랑 할아버지한테도 한 눈 팔면 안 되고?”

“남자랑 할아버지는 뭐냐.”

“보스가 리나에게 좀처럼 소시지를 먹게 해주지 않으니까 걱정되잖아. 혹시 남들이 모르는 독특한 습관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바보 카이사르도 공공연한 미소년 애호자였고.”

그 바보의 취향 따위를 내가 알까보냐!

그래도 화제를 돌리는 데에는 그럭저럭 도움이 될 것 같다.

조금이라도 빨리 불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보자.

“그보다 용케도 기억하는군. 2년 전에 사라진 녀석의 취향을.”

“짜증나는 녀석이기는 했어도 돌이켜보면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함께 보스를 보필해온 건 그 바보랑 리나 뿐이었잖아?”

“그렇지. 직계부하라고 할 건 녀석과 너뿐이니까.”

“녀석과 너 인가..”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밝은 얼굴로 웃고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지쳐 보인다.

리나에게도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가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암살행을 꾸준히 다녀서 피로한 걸지도 모른다.

“휴가라도 원하는가?”

“응?”

“피로해보여서.”

리나는 내숭떠는 일 없이 내 어깨에 몸을 기대며 칭얼거렸다.

“물론 피로하지. 보스 말고는 아무도 리나의 고생을 알아주지 않는 걸.”

“제법 어른다운 소리를 할 수 있게 되었군.”

“후후. 이제 리나도 예전처럼 마냥 아이가 아니라고? 보스의 눈에는 아직 아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보일지도 모르지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아이처럼 보인다.

“아. 그래도 귀여운 내 부하들은 예외야. 같은 고충을 겪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정을 이해하거든. 부하라는 게 생겨서 보스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 더 잘 이해하게 됐지 뭐야?”

“같은 고충?”

“세상을 파멸시킬 암흑조직의 보스를 모시는 고충이지. 보스는 인간을 등진 배덕한 존재들의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나약한 인간들의 시대를 바꾸려는 거잖아?”

리나의 말을 듣고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녀를 등용할 무렵, 비슷한 느낌의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이 녀석, 설마... 처음부터 내가 이딴 짓을 하고 다니려고 흑산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그렇지만 이미 착각이라는 말도 못 꺼낼 정도로 먼 길을 건넜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꺼내봤자 살해당할 뿐이다.

“그렇다. 고작 미궁 따위에 굴한 패배자들의 세상, 약해빠진 선의의 빛에 취해 폭력에 굴복할 뿐이라면 세상을 집어삼킬 어둠이 되어주겠다. 나야말로 이 세상을 굴복시킬 남자다.”

“꺄아! 보스는 정말 대단해! 어떤 남자라도 보스처럼 원대한 사명을 지니고 대업을 해보이지는 못할 거야!”

“지금까지 수고가 많았다. 네게는 카이사르의 몫까지 많은 부분을 의지해왔었지.”

리나가 갑자기 쭈뼛거리며 볼을 붉혔다.

“그, 그런... 갑자기 칭찬해도 뭐 안 나온다고?”

“앞으로는 더욱 가혹한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수라의 길을 걸을 준비는 되었는가?”

“당연하지! 보스를 위해서라면 교단의 교주부터 일국의 국왕까지 누구라도 전부 암살할 수 있어! 사랑에 빠진 여자아이의 힘은 대단한 걸!”

그거 정말로 대단하네.

소름이 돋다 못해 오싹한 기분에 오한이 치밀 지경이다.

“그럼 평소대로의 포상을..”

“보스의 포상이라면 좀 더 아래여도 괜찮다고?”

리나는 덥썩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내렸다.

턱 끝에서 가녀린 목으로, 매혹적인 쇄골로, 그 아래의…….

“재미난 도발이군. 허나 응해주지는 않겠다.”

“너무해!”

“나 자신이 즐거울 따름이라면 수라의 길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리나는 나를 무슨 히틀러 같은 새끼로 생각하고 있다.

세상을 부숴버릴 것처럼 여기고 있지.

그렇기에 그걸 핑계 삼으면 순순히 납득해줄 거다.

“정말이지... 보스는 스스로에게도 지나치게 엄격하다니깐.”

못마땅한 표정으로 리나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래도 이내 내 결정을 존중하고는 자세를 달리하며 여느 때처럼 전속호위 겸 비서로서 내게 묻는다.

“오늘 저녁 일정은 어떻게 할 거야? 원래는 연합기관의 간부들과 정기회담을 나눌 시간이었는데.”

“하인즈 대마법사와 독대를 마친 이상, 자잘한 건에 대한 용무는 필요 없다.”

“정기회담은 일정에서 제외할게. 그럼 비는 시간은?”

“심공의 연마를 한다.”

“알겠어. 보스를 위해 전용수련 마나응집진을 가동시켜둘게.”

2년의 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평화롭지는 않았지만 리나와 함께 한 시간마저 모두 거짓된 건 아니었다.

분명 리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거짓투성이인 세상에서 단 하나의 유대쯤은 진실한 게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위안을 가지며 나는 슬며시 웃어주었다.

* * *

게이머 이호연의 동기화 비율은 1%이다. 그가 어떤 감정을 품고 어떤 표정을 보여주고 싶더라도 그 감정과 표정은 결코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동기화 비율 10% 미만의 게이머는 눈매나 행동이 나른해지고 섬세함이 사라진다.

동기화 비율 1%의 게이머에게는 한 치의 속내도 읽을 수 없는 무심함이 기본 베이스로 깔리며 일말의 감정조차도 피력하지 않는 기계적인 존재로 보인다.

그런 그에게서 그나마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그가 직접 취하는 ‘언행’이었다.

말과 행동은 아무리 간소화되어 그 자체로 결과를 남긴다.

그렇기에 모두가 빌헬름 마이어의 나른한 눈매나 그조차도 넘어선 무심한 표정에 소름이 끼쳐도 그런대로 그가 인간미를 지닌 존재라고 여겼다.

그랬던 것조차도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그런 이해는 모두 2년 전에나 가능했던 것들이었다. 2년 전, 카이사르가 실종되고 정복전쟁이 실패한 그날부터 그는 달라졌다.

“보스는 멋져졌지.”

카리스마 능력치가 한계수치까지 상승하였다.

마스터 등급에 달한 보스의 기백 스킬이 엄청난 속도로 숙련도를 쌓았다.

이미 그가 지닌 존재감은 현인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점점 모르겠어. 보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리나는 울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과거에는 그런대로 말과 행동에서 따스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카이사르가 죽은 이후로는 조금도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리스마 능력치의 상승과 보스의 기백 스킬 숙련도 상승에 의한 위엄보정이 권위적이지 않은 면모를 모조리 권위적으로 치환시켜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보스는 리나가 싫어진 걸까?”

리나는 예전처럼 보스의 감정을 느껴보고자 최선을 다해서 암살에 나섰다. 견습암살자들도 자신보다는 못해도 어디 가서 일류 소리는 능히 듣고도 남을 실력자들도 키워내었다.

보스를 적대하는 자들은 모두 죽이고, 은밀하게 다가오는 위협은 전부 배제하였다.

그런데도 이전이라면 나른한 눈매 너머로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온기가, 무심한 표정 아래에 감추었을 거라 생각했던 호의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암살단 부대장 소녀, 이질이 위로를 건넸다.

“리나 대장은 보스의 단 한 명뿐인 이해자입니다.”

“그렇지?”

“보스는 그저 감정에 솔직해질 수 없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감정에 솔직해질 수 없다니. 혹시 리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까봐 부끄러워서? 꺄~!”

“보스의 대업은 미궁정복입니다. 지상에는 뜻이 없다는 것도 이번 대담으로 확고히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미궁을 정복한다면 그 이후는 어떨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얼굴 위로 자연스레 피어나던 웃음꽃이 급격히 시들었다.

그제야 리나는 깨달았다.

“없어. 보스는 단 한 번도 정복 후를 언급하지 않았어.”

“분명 그렇기 때문일 겁니다.”

“모르겠어. 리나는 전혀 모르겠다고. 이질은 보스가 무슨 의도를 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질은 무표정한 얼굴로 리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엾은 대장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서 되묻는 거다.

“보스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미궁에서 최후를 맞이할 작정이실 겁니다.”

“거짓말! 그런 건 거짓말이야!”

“보스는 리나 대장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리나 대장을 아끼기에 더욱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미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단이 흐려지지 않도록.”

보스는 망설임을 끊고자 감정을 죽였다. 이질의 말을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의 말이 옳다는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런 건 비겁해. 2년만 참으면 보스의 소시지를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된다고 했는걸. 리나는 그 말만 믿고 있었는데...”

“그럼 단념하실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그치만... 리나의 마음이 보스가 대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면...”

이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가 중요한 분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사람은 리나 대장입니다.”

“이질...?”

“설령 보스의 대업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대장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마음은 고맙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보스는 그렇게나 돈이 많으면서도 딱히 쓰지도 않고, 사치도 조금밖에 안 즐기는 철인이라구...”

“그래도 남자인 이상 욕망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보스의 식사에 미약을 타서 관계를 맺게 하고 리나 대장이 아이를 낳는다면 어쩔 수 없이 미궁공략은 미뤄지게 됩니다.”

터무니없는 폭론에 리나는 화들짝 놀랐다.

“무, 무,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미약으로 성관계라니 그런 짓을 리나가 할 리가 없잖아!”

“보스가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는 내역이 카이사르 대장의 친위대원들이나 저희 암살단, 리나 대장에게 제공하는 품위유지비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게 머 어쨌다구!”

“보스는 감정을 죽이는 데 능숙한 분이시지만 관심마저 없앨 수는 없습니다. 품위유지비는 보스가 저희에게 품은 보이지 않는 감정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리나는 속으로 품위유지비를 헤아려보았다.

친위대원 한 명과 암살단원 한 명의 품위유지비는 같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품위유지비를 합친 것의 약 백 배 가량이 리나에게 주어지는 품위유지비다.

잔돈이 없어서 노점상에서 파는 핫도그를 바라보며 힝 거리고 있자니 그날 이후로 나날이 말도 안 되는 거금을 주고 있다.

“그건... 맞을지도...”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감정을 죽인 것처럼 보이지만, 보스는 아직 모든 감정을 죽이지는 못한 겁니다. 그리고 분명 보스가 리나 대장에게 품은 감정은 보통 감정이 아닙니다.”

“보, 보통 감정이 아니야...?”

“리나 대장이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보스는 반드시 유혹에 넘어올 겁니다. 적어도 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되는 그 날까지만 함께 하자고 한다면 넘어올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

“역시 리나 대장은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질은 미약 대신 단검을 꺼내들었다.

“같은 남자에게 반한 여자끼리 캣파이트, 아니 대련은 어떠십니까.”

“그걸 정정한다고 앞에 한 말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

리나는 가볍게 눈을 흘기면서도 설핏 미소 지으며 마주 단검을 꺼내들었다.

빌헬름 마이어와 리나가 서로에게 품은 마음은 모든 게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만큼은 같다.

암살단 부대장은 내심 가드가 너무 철벽이 아니냐며 혼자만의 불만을 품었다. 그는 그저 귀여운 아이들과 놀아주었을 뿐이지만 이처럼 당사자들에게는 보답 받지 못할 연심만이 남았다.

============================ 작품 후기 ============================

탭댄스를 추던 부단주가 엑스트라에서 조연으로 비중이 상승했습니다.

다만 이번 챕터의 조연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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