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이버(3)
최수호는 이를 갈며,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감히 날 무시해?’
엘리드 3년 차. 레벨 140 달성이라는 기록 달성. PVP 전적은 126전 120승 6패로 천재 소리를 들으며 엘리드에 적응했다.
그 누구도 최수호를 무시하지 못했으며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갑옷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한 거지새끼가 계속해서 도발해온다.
‘저 새끼가 도민준을 잡았다고?’
약간 걸리는 게 있다면 척결 길마인 화민서의 발언 정도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도민준은 랭킹 10위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거물. 저딴 거지 새끼한데 죽었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뭔가 걸리는 게 있어 대충 둘러댄 거겠지.’
화민서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걸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띠링-
[강우빈 용사님이 PVP를 신청하였습니다.]
[PVP를 수락하시겠습니까?]
‘······’
PVP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많이 해봤다.
엘리드로 전이되고 용사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주인공이라 생각하며 날뛰기 일쑤였으니까.
띠링-
[상대방이 보상을 등록하였습니다.]
‘이게 말이 돼?’
최수호는 혹시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적거리며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띠링-
[설정된 보상: 4,000,000룬]
(최소 가치 4,000,000룬 이상의 물품을 설정해주세요.)
‘400만 룬이라고?’
보상 설정은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설정 자체를 하지 못한다.
그렇다는 건 저놈이 진짜 400만 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
‘개 갑부잖아···’
지금 착용한 장비를 전부 팔아도 저 금액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400만 룬을 만져본 적이 있었던가?
룬은 모으는 족족 스테이터스를 투자하거나 장비를 강화하는 데 사용했으니 만져봤을 리가 없었다.
꿀꺽-
‘무조건 받아야 돼.’
이유가 어찌 됐든 PVP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승리한 보상이 무려 400만 룬이다.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이딴 잡일 말고 제대로 된 공략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다.
띠링-
[상품의 가치가 낮아서 PVP를 수락할 수 없습니다.]
대등한 보상을 등록할 수가 없어 PVP를 수락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최수호가 고민에 빠진 그때, 우빈이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물어왔다.
사람을 깔보는 표정이 죽빵을 부른다. 원래라면 바로 쌍욕을 박았겠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씨발···’
뭐라고 답해야 할까. 룬을 구해올 테니까 기다려달라고 해?
애초에 길드에서 지원을 받고, 창고에 넣어둔 아이템을 전부 처분해도 100만룬이 되지 않는다.
‘아!’
그때 문뜩 하나의 아이템이 떠올랐다.
‘선배가 가진 그거라면.’
한 달 전, 선배의 각성 기념으로 마스터에게 하사받은 아이템이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선배가 목숨보다 더 애지중지한다는 건데.
‘어떻게든 설득해보자.’
판단을 내린 최수호는 무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입을 뗐다.
“잠깐만 시간을 줘.”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리고 부탁하는 태도치곤 말이 좀 짧네요?”
꽈드득-
최수호가 입술을 잘근 물어 씹는다.
“10분만 시간 좀 주세요.”
“잘 안 들립니다.”
“10분만 시간 좀 주세요!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최수호가 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떨군다. 우빈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 그렇게까지 부탁하신다니 특별히 들어드리겠습니다. 넉넉하게 30분 드릴게요.”
최수호가 눈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꾸벅한다.
우빈은 분해서 부들거리는 최수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완전 눈 돌아갔는데.’
도발에 분노를 주체못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일확천금의 보상을 보고, 감정만 앞서던 폭력이 손익을 따지는 전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확인 좀 해볼까.’
우빈은 최수호를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확인할 게 있었다.
두근-두근-
필드 보스보다 더 많은 경험치를 준 도민준이 과연 어떤 아이템을 떨궜는지를.
***
쏴아아-
싱그러운 바람에 낙엽이 흩날린다.
어느 평범한 숲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4명의 표정은 지옥에 떨어진 듯 좋지 않았다.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희빈이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그들의 앞에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을 도와주러 이곳까지 찾아온 세이버 소속 서희빈입니다.”
어느 회사에나 있을법한 명함을 건네며 입을 뗀다.
“저희 세이버 길드는 엘리드 1위 길드로서 요식, 사냥, 제작 등 다양한 업종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소유한 영지는 도시 2개를 꾸릴 수준이며···.”
자랑이 이어졌다. 저게 믿을만한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사실이라면 좋은 집단이란 건 확실해보였다.
“저를 따라가실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저희 길드로 오신다면 엘리드 최고의 지원을 받으실 수 있다고 감히 약속드리겠습니다.”
영업용 맨트가 끝나자 한 사내가 관심을 보인다.
“지원이요? 어떤 걸 받을 수 있는데요?”
“뭐긴요. 앞으로 생존에 필요한 전부죠. 의식주를 포함에, 엘리드에서 생존할 지식까지 전부.”
“계속 엘리드 엘리드 거리는데, 엘리드가 뭐예요? 처음들어보는 나라인데. 여기 한국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러면···”
“쉽게 말해서 사후 세계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네? 사후 세계요?! 우리가 죽었다고요?”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편할 거란 비유입니다. 엘리드는 지구가 아닙니다. 아예 다른 세계죠.”
“······.”
서희빈의 대답에 사내가 입을 닫는다.
‘조금만 더 하면 되겠는데.’
서희빈은 신입 용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불안한 듯 눈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한다. 그러다 서희빈의 얼굴을 힐긋 본다.
무지라는 공포 때문에 의지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서희빈은 씨익 웃으며 호감도를 올렸다.
모든 게 매뉴얼에 적힌 대로 착착 흘러갔다.
이제 달콤한 미끼를 던지기만 하면 4명 중 1명 정도는 데려갈 수 있을 터.
‘왜 보고만 있지.’
서희빈은 가만히 앉아 있는 화민서를 바라봤다.
처음엔 신입 용사를 돕는가 싶더니 어느 시점이 되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입 영입을 위해 여기 온 게 아닌가?
‘도민준을 죽여서 해탈이라도 한 건가.’
화민서와 도민준의 이야기는 엘리드에서 유명했다.
부길마인 도민준이 길드 마스터인 김후영을 살해하고 아이템을 강탈.
그 이후 동료 길드원 중 절반 이상을 살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자극적인 소문이지 않은가.
그를 뒷받침하듯, 화민서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도민준의 행적을 묻고 다녔다.
그 복수의 끝이 오늘인 것이다.
신입 영입 같은 일은 눈에 잡히지도 않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녀가 느낄 감정이 후련함일지, 허무함일지는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겠지만은.
서희빈은 시선을 돌려, 두 번째 인물을 응시했다.
상의조차 입지 않은 거지꼴로 구석에서 무언갈 만지작거린다.
신입 용사한테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개지랄을 떨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잠잠하다.
어찌 되었든 서희빈에겐 나쁜 흐름은 아니었다.
“자, 그러면.”
“선배!”
서희빈이 절망에 빠진 신입 용사들에게 희망을 던져주려는 그때였다.
“잠깐 대화 좀 해요.”
“왜?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잠깐이면 돼요.”
최수호가 갑자기 나타나 일을 방해해왔다.
거지새끼랑 싸울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조용해져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갑자기 훼방을 놓아?
“싫어. 이따가 말해.”
“안 돼요. 급한 거란 말이에요.”
“이 새끼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신입 용사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참자···’
아직 호감도 제대로 쌓지 않았는데, 폭력적인 행동은 지양해야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동료랑 잠시 대화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이건 제가 드리는 소정의 선물입니다.”
서희빈은 인벤토리에서 음식을 꺼내, 신입 용사들 앞에 놔두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였다.
음식을 보자, 신입 용사들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든다.
“따라와.”
서희빈은 최수호의 팔을 붙잡고 구석진 장소로 걸어갔다.
도착하자마자 빡!!! 뒤통수를 크게 후려쳤다.
“진짜! 너 우리가 여기 왜 왔는지 잊어버렸어? 신입 영입하러 온 거잖아!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아야야. 알죠. 제가 여기 찾았잖아요.”
“···.”
그러고 보니, 최수호가 이 장소를 찾지 않았던가. 그것만으로 제 할 일은 충분히 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 그래서! 찾았으면 끝이야? 어떻게든 설득해서 데려가야 할 거 아니야!”
“알죠. 그건 선배한테 맡길게요.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빠직-
서희빈의 이마로 핏줄이 솟구친다.
‘이걸 그냥 죽여?’
하늘 같은 선배한테 짬처리를 시키겠다. 아주 대놓고 말한다. 새끼가 눈치가 없는 건, 진즉 알았지만 이건 선을 넘었다.
‘후···. 참자, 참아.’
그래도 신입 용사를 찾은 건 크게 칭찬해야 할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신입 용사를 빠르게 찾는 게 가장 어려운 요소였으니까.
“선배, 마스터한테 선물 받은 화기의 반지 좀 빌려주세요.”
띠링-
[메가 익스플로젼을 시전하였습니다.]
쾅!!!!!
강렬한 폭발이 최수호의 육신을 두드렸다.
파스스-
뿌연 연기가 거치자 최수호의 모습이 드러난다.
“으아, 이럴 줄 알았다니까.”
최수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치켜든 방패를 내린다. 폭발이 날아올 걸 예측이라도 한 듯 공격을 완벽히 막은 상태였다.
“이 새끼가 돌았나. 오냐오냐하니까.”
“잠깐이면 돼요!”
“꺼져!”
“150만 룬!”
“뭐?”
“빌려주시면 150만룬 드릴게요.”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개소리가 확실했지만, 150만 룬이라는 수치는 서희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최수호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조금 전 우빈과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 새끼가 400만 룬을 걸고 pvp를 신청했다고?”
“네. 그렇다니깐요. 잠깐만 빌려주세요. 이기고 다시 돌려드릴게요.”
“싫어.”
“왜요? 설마, 제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
저래 보여도, 최수호는 길드에서 인정하는 천재이다.
레벨이 고작 140밖에 되지 않았지만, PVP론 170대 용사를 가지고 논다.
그렇기에 길드에서 차세대 메인 용사로 선택되었다.
지금 하고 있는 신입 용사 영입은 길드에서 신뢰하고 인정받는 인원만이 할 수 있는 임무였으니까.
“그런데 왜요? 제가 이기면 150만 룬 드린다니까요?”
“마스터한테 받은 물건을 내기 보상으로 건다는 것 자체가 싫어.”
“하아··· 진짜. 알겠어요. 170만 룬! 이기면 170만 룬 드릴게요.”
“안된다고!”
“아, 진짜! 200만 룬! 조금만 더 보태면 선배가 맨날 노래 부르던 펜리르도 살 수 있는 금액이잖아요!”
펜리르란 단어에 서희빈의 귀가 쫑긋한다.
“펜리르? 크흠! 진짜 안 되는데···”
“230만! 진짜 더는 양보 못 해요. 노력은 내가 하는데, 하아···”
“230만?!”
“속고만 사셨나. 저 못 믿어요? 비기너 PVP 17대 우승자 최수호! 한입으로 거짓말은 안 합니다!”
최수호의 호언장담에 서희빈의 손가락에 끼워진 붉은 반지가 최수호의 손바닥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