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역습(1)
쏴아아아아아-
경쾌할 정도로 강렬한 폭우가 쏟아진다.
사방이 빗물로 가득했지만,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주희가 모닥불 앞에 앉아 고개를 들어 올린다.
“이런 식으로 비를 피할 수도 있네요.”
“원래는 이렇게 못 해요. 아무리 커 봤자, 4M를 넘기 힘들거든요.”
오유주가 민주희의 물음에 답한다.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드래곤이 날개를 원형으로 접어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무려 L등급의 영체로 비를 막는 데 사용하다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었다.
“그런데 저분 괜찮은 거 맞아요? 머리 위에 붉은 이름이···”
주희가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우빈에게 묻는다. 주희가 바라보는 곳엔 한 사내가 앉아있었다.
[최수호]
사내의 머리 위로 붉은 글자가 선명하다. 수배에 올라 타락한 용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현상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일단, 드시죠.”
우빈이 모닥불에 익은 고기를 건네자 주희와 유주가 고기를 뜯기 시작한다.
우빈 역시 잘 익은 고기를 들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기름기 가득한 껍데기가 바짝 익어 바삭한 식감을 안겨준다.
짭조름하면서도 풍미 가득한 육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민서 씨도 어서 드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입맛이 없어서요.”
그런 민주희의 옆으로 화민서가 앉아 모닥불을 응시한다.
우빈은 배를 채우며 화민서를 보곤 눈매를 좁혔다.
‘이걸로 약속은 끝인가.’
우빈의 목적은 처음부터 화민서의 확보였다.
고지태와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평생을 다해 복종하는 대신 화민서를 구해달라고.
그렇기에 우빈은 하선율을 뒤쫓아 미행했다.
‘레이핀이 움직일 줄이야···’
그 과정에서 세이버 쪽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있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했었다.
화민서의 존재는 회의에 앞서 변수로 작용할 요소였으니까. 하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세계수의 정령인 레이핀이 하선율을 공격해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함지연이 화민서를 납치했고.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딱히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
이미 함지연의 기억까지 엿보고 온 상태였다. 함지연의 기억 속엔 특별한 정보는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화민서가 모닥불을 보며, 고민하다 결심을 했는지, 딱딱한 표정으로 우빈에게 물었다.
“뭘 말씀하시는 거죠?”
“정현태에 이어서 함지연까지. 세이버의 정보를 원하시던 것도 그렇고. 세이버한테 원한이 있으신 거 아닌가요?”
화민서 입장에선 우빈의 목적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차주성을 잡으러 갈 겁니다.”
우빈의 말에 허망함으로 가득하던 화민서의 표정이 변한다.
“뭔가 알고 있는 거 맞죠? 차주성은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건가요?”
아마 부신에서 있었던 일이 궁금한 모양인데.
“글쎄요.”
이유를 대충 알고 있긴 했지만, 말해주기 귀찮았다. 그리고 알려준다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우빈이 부정적으로 반응하자, 화민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꽉 쥐곤, 부탁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도 같이 할 수 있을까요?”
“네? 뭘요?”
“차주성을 치러가는 거요.”
화민서가 우빈의 눈을 응시하며, 의지를 내비친다. 우빈은 그런 화민서의 몰골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진다.
고급스러운 가죽 슈트, 화려한 활은 세련되다 못해, 고풍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화민서는 우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푸러 해쳐진 채, 진흙과 흙먼지로 가득했으며, 옷은 누더기가 되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무기 또한 처참했다. 급하게 상점에서 아무거나 구매했는지,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척결이라는 길드를 이끌던 수장이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장비조차 없는데 과연 전력에 도움이 될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일단은 알겠습니다.”
우빈의 긍정적인 반응에 화민서의 표정이 밝아진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셀로니의 샘에서 회의를 연다고 했죠? 오늘 바로 출발하나요?”
화민서가 다급하게 말을 쏘아붙인다. 분노가 가득하면서도 처절한 감정이 가득하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우빈 역시 크로노스 던전에서 막 탈출했을 당시엔 화민서와 비슷한 심경이었으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드세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려면 컨디션을 되돌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네···”
우빈의 단호함에 화민서가 건넨 고기를 잡아든다. 크게 한입 베어 물곤, 붉은 입술을 오물오물 거리며 고기를 씹는다.
그녀의 표정에서 미묘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떠오른다.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동안 참았던 울음이 폭발한 듯싶었다.
하긴 화민서는 대의를 중요시하던, 인물이지 않은가.
성을 무너트린 걸 시작으로, 자신을 믿고 따라주던 길드원들을 지키지 못했다.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곽정수에게 당하지 않았더라면, 모두를 살릴 수도 있었을 테니까.
우빈은 화민서로부터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앉아있는 사내, 최수호를 응시했다.
[최수호]
붉은 글자 위로 오직 우빈만이 볼 수 있는 글귀가 눈을 사로잡는다.
[살해]
칭호: 동족을 지킨 수호자로 인해, 최수호의 심리가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맛있겠다··· 나도 구워 먹을까? 아··· 맞다. 나 이제 경매장 못 쓰지. 조금만 달라고 해볼까···』
조금 전까지 죽을 고비를 넘긴 놈치곤, 생각하는 게 참 단순했다.
‘나름 쓸만하려나.’
저놈에겐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함지연의 기억을 엿봤기에, 저놈이 죽인 인물의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태양.
신화 길드의 부길마이자, 랭킹 6위에 랭크된 괴물. 그런 존재가 저놈의 방패치기 1방에 장기가 터져 즉사했다.
너무 이상했다.
최수호라면 민주희를 만났을 당시 직접 싸워본 대상이지 않았던가.
화민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어중이떠중이가 확실했다.
그런데 어떻게 랭킹 6위를 단순한 충격으로 즉사시킬 수 있었을까?
우빈은 호기심에 최수호의 기억을 엿봤고, 최수호의 기억 속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피티니 가드]
종류: 특성
등급: S
효과
-퍼팩트 가드에 성공 시 데미지를 축적합니다. 축적한 수치에 따라 특별한 효과를 얻습니다.
-현재 축적된 데미지: 1,541,461,512,124
(축적된 데미지는 초당 100씩 감소합니다.)
[추가 효과]
-방어력 100% 증가.
-퍼팩트 가드 시 방어력 150 증가.
-모든 스테이터스 5 상승.
........
.....
....
..
.
우빈과의 PVP가 끝난 직후. 최수호의 기억 속 상태 창이다.
최수호는 단순히 버그로 치부했지만, 우빈만은 아니었다.
PVP 당시, 최수호는 우빈의 주먹을 완벽히 가드 했다. 그 결과 데미지가 축적되고 충격을 버티지 못한 몸은 폭사했다.
저 수치는 그 결과였다.
다시금 PVP를 신청해서 최수호를 강타하면 어떻게 될까.
‘싹을 자르는 게 좋으려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최수호의 능력치가 우빈은 뛰어넘을 거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먹 강타를 버틸 육체를 손에 넣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아··· 배고파.』
꼬르륵-
저 멀리 있는 최수호의 뱃속에서 요란한 울림이 울려 퍼진다.
자연스럽게 민주희의 시선이 최수호로 향한다.
“저분한테 조금 드려도 괜찮을까요? 뭔가 우리만 먹기 좀 민망해서···”
우빈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사인을 보내자, 민주희가 최수호를 향해 고기를 들고 다가간다.
“이것 좀 드실래요?”
“우와··· 주시는 거예요? 네! 먹을래요! 감사합니다.”
최수호가 고기를 게걸스럽게 뜯어 먹는다.
‘바보인가?’
성격이 좋은 거인지, 정신 연령이 떨어지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놈이었다.
우빈이 최수호의 처리를 고민하던 그때였다.
“으아··· 온몸이 아파··· 뭐야··· 어떻게 된 거지? 김씨 아저씨?! 괜찮으세요!”
함지연에게 당했던, 신화 길드원이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아야야야, 으··· 태양 씨는?”
“모르겠어요.”
먼저 깬 젊은 사내는 하경수.
머리를 붙잡으며, 인상을 찡그리는 중년은 김씨 아저씨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우빈 일행을 발견한다.
“어?! 저분들은···”
하선율이 하몬으로 떠난 시점에 화민서와 우빈을 감시하던 이들이지 않은가. 우빈을 보자 바로 알아차렸다.
아직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든지, 휘청거리며, 우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건가요? 태양 씨는요?!”
하경수는 우빈에게 질문을 던지며, 최근의 기억을 더듬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하선율의 지시를 받고, 주변 일대를 수색하다 산 중턱에서 거대한 불길을 발견했다.
화염 필드는 이태양의 특성이 발현될 때 나오는 현상.
김씨 아저씨와 하경수는 다급히 그 장소로 이동했지만, 도착하기 직전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이태양 용사님이 길드를 탈퇴하였습니다.]
어느샌가 식어버린 대지 위로 쓰러진 이태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뭔가 있었는데···’
쓰러진 이태양의 옆으로 거대한 날개와 전신으로 비늘이 돋아난 괴물이 서 있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어져 있었다.
무차별적인 폭력과 뜨거운 고통이 있었다는 건 기억이 났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렇게 살아있고, 이 사내가 여기 있다는 건, 이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거일 텐데.
여러 생각이 교차하던 그때, 우빈의 답이 돌아왔다.
“이태양 씨라면 사망하셨습니다.”
우빈이 손바닥으로 한 장소를 가리킨다.
그 장소엔 숯덩이가 된 검은 물체가 있었다. 감히 사람이라고는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김씨 아저씨와 하경수는 저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태양이 형?”
“말도 안 돼···.”
숯덩이가 된 존재가 착용한 갑옷에 너무나도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우빈은 망연자실한 두 사내에게 물었다.
“지금쯤이면 회의 결과가 나왔을 거 같은데. 어떻게 되었나요?”
“회의요?”
질문이고 뭐고, 전부 무시하고 싶었지만, 우빈의 질문은 꽤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태양의 길드 탈퇴 소식은 회의에 참여한 하선율에게도 전달되었을 메시지였으니까.
애써 평정심을 찾은 김씨 아저씨가 다급히 길드 메신저를 열었다.
[메신저+131]
백여 개의 메시지가 도착한 상태였다.
-아저씨 어떻게 됐어요? 태양씨 찾으셨나요?
-태양이 형이 길드를 탈퇴했어요! 빨리 찾아보세요.
-아저씨! 큰일 났어요. 갑자기 길드장님이 날뛰어서, 길드장님이 붙잡혔다고요! 빨리 와주세요.
-아저씨? 경수야! 뭐라고 답 좀 줘봐!
........
.....
....
.
수많은 메시지가 안 좋은 상황을 말해주었고, 최근 메시지를 본 김씨 아저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김씨 아저씨 경수야. 메시지 보면, 셀로니의 샘으로 오지 말고, 바로 부신으로 출발해.
-부신을 먹은 그 새끼가 전부 꾸민 일이었어. 우리 전부 그놈한테 놀아난 거라고!
****
끼에엑-
거대한 짐승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 귀찮아. 전부 강우빈이라는 새끼가 한 일이라고? 완전 또라이 새끼 아니야.”
“그래도 난놈은 난놈이네. 부신까지 꿀꺽하고 하선율을 속여서 내부 분열까지 꾀한 거 보니까 보통 놈이 아니야.”
짐승 위로 용사들이 하나둘씩 올라타며, 우빈을 언급했다.
차주성은 확신에 찬 용사들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차주성은 서희빈의 특성 심안의 주인을 통해 이정훈 때처럼 하선율의 내면을 훔쳐보았다.
그러자 설마 했던 사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미있네.’
하선율조차 못한 화민서를 주먹질 한 방에 제압하는 것을 시작으로 부신을 먹고, 하선율을 설득하는 내용까지.
차주성은 이 장면은 여기에 있는 모두에게 공유했다.
-뭐야? 이게 하선율의 기억이라고? 개 사기잖아···
-이런 인재가 있었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죠. 신기하다.
처음엔 서희빈의 능력에 감탄했지만, 영상이 재생되어가자, 관심은 온통 한 사내에게 쏠렸다.
-저 새끼 뭔데, 하선율도 못 잡은 보스를 가지고 노냐?
상식을 초월하는 무력.
-와··· 저 영체 개쩐다. 어디서 구한거지?
이해할 수 없는 재력.
호기심과 경계심이 공존하던 그때. 문제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 사내는 부신을 먹곤, 하선율을 찾아와 제안을 해왔다.
그 사내는 하선율이 긴급회의에서 보여준 것처럼 영체를 소환하고 포션을 욱여넣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하선율 역시 그 사내에게 물었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질문이 잘못됐습니다.”
“뭐?”
“누가 만들었는지가 중요하죠.”
“진짜, 말 한번 이쁘게 하네. 그래, 누가 만들었는데?”
하선율의 질문에 그 사내는 한 남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차주성.”
그 순간 수십 명의 시선이 차주성에게 향했다.
황당하다는 표정을 시작으로 설마 하는 의아함까지.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적의같은 건 품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포션, 저 새끼가 만든 거 아니야?”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러면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져요. 선율 씨도 못 잡은 보스를 저렇게 쉽게 제압한 것도 그렇고. 부신을 먹은 것도 그렇고. 바이러스의 약점을 알고 있는 거겠죠.”
물론, 이 이후 이세현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들 역시 생각이 바뀌었겠지만, 굳이 불리한 장면까진 보여주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여기 있는 전원이 우빈을 적으로 간주하고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차주성은 사람들을 뒤따르며 우빈을 떠올렸다.
막연하게 허점을 이용해 현태와 세현이를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선율의 기억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우빈은 이세현을 죽이지 않았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하게 차주성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어떻게 한 거지? 현태도 아직 살아있는 건가?
차주성의 호기심이 극에 달하던 그 순간이었다. 차주성의 눈앞으로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함지연 용사님이 길드를 탈퇴하였습니다.]
상황을 즐기던 차주성의 표정이 사늘하게 내려앉았다.
‘재미있네.’
차주성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체스와 같았다.
함지연이 쓸데없이 나대서 이태양을 죽였어도. 이세현과 정현태가 강우빈 쪽에 붙었어도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띠링-
[크로노스의 회중시계]
종류: 액세서리
내구력: 5/10
등급: UL
효과
-사망 시 10일 전으로 되돌아갑니다.
(쿨타임: 10일)
이 시계만 있다면, 상황을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함지연까지 당한 걸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뭔가 있다. 이거지.’
확실하게 알아내야만 했다.
그 새끼가 무슨 능력을 갖췄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67. 역습(2)
쏴아아아-
고요함 속 오직 빗소리만이 주변을 가득 메운다.
‘왜 저러지?’
우빈은 말을 걸어오던, 신화 길드원 두 명을 응시했다.
길드 메신저를 확인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곤,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뒷걸음질 친다.
“왜 그러시죠? 회의는 어떻게 됐나요?”
우빈의 질문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경수와 김씨 아저씨는 우빈과 거리를 벌리며, 조용히 수군거린다.
“저 사람 말하는 거 맞죠?”
“진짜일까?”
“진짜겠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너무 작게 말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굳이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저 사람이 전부 꾸민 일이라고? 하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노예 거래] [살해] [사기]
김씨 아저씨는 아무런 상태창이 없는 반면, 하경수라는 사내의 머리 위론 악행이 떠올라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를 살려준 거지?』
메시지의 내용으로 보건대 대화를 주고받을 상황이 아닌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죄송합니다. 잠시 따로 대화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우빈의 시선을 느낀, 김씨 아저씨가 하경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우빈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여기에 있다고 알려야 하나.』
『10대 길드가 전부 움직이고 있다고?』
『길드장님은 왜 말씀이 없으시지?』
이미 원하는 정보가 실시간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읽어가던 우빈의 표정이 점점 내려앉던 그때였다.
“무슨 일이 있나 봐요?”
민주희가 심각한 두 사람을 보며, 우빈에게 질문을 던진다.
확실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긴 했다.
하경수의 생각을 종합해보자면, 긴급회의에서 적으로 특정한 대상이 있고, 엘리드에서 영향력 있는 길드가 그 대상을 처치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는데, 특정 대상이 우빈 자신이라는 것이 큰 문제였다.
‘어떻게 한 거지.’
우빈은 회의를 주최한 하선율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했다.
그 결과 하선율은 조금씩 우빈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아마 회의를 진행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차주성을 주시하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월드 메시지로 세이버 소속인 최수호가 수배에 올랐고, 하선율의 앞으론 이태양의 길드 탈퇴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선율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의심하던 우빈의 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 분명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왜 차주성이 아닌 나를 대상으로 지목하게 된 걸까? 차주성이 뭔가 수를 쓴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나.’
우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애초의 목표는 차주성을 짓밟은 것이지 않은가. 몸소 찾아와 주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거슬리는 게 있다면 불청객이 끼어들었다는 것 정도뿐인데.
‘치우면 그만이지.’
“어디 가세요?”
우빈이 자리를 떠나자, 주희와 유주가 다가왔다.
10대 길드의 표적이 된 이상,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빈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저 둘은 어떨까.
“같이하는 건 오늘까지로 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네? 갑자기요?”
“유주야, 이분 좀 보살펴줘. 세계수 주변이니까. 위험한 요소는 없을 거야.”
“네? 오빠 왜 그래요···. 진짜 무슨 일 터진 거예요?”
우빈의 말에 유주가 식은땀을 흘리며 두 손을 모았고, 주희는 당황한 듯 볼을 긁적거린다.
둘의 전력은 없느니만 못할 정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민주희를 파티에 넣은 이유인 18회차 버프는 충분히 효과를 받은 상태였고, 업그레이드할 영체와 스킬 카드는 이미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낸 상태이지 않은가.
유주 역시 레벨이 1로서 전력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굳이 둘에게 개죽음을 강요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빈은 길잃은 아이처럼 우빈을 올려다보는 두 여인을 보며,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만약, 크로노스 던전에서 막 나왔던 시점이라면 저 둘이 죽던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우빈의 목적은 복수로 가득했으며, 그 새끼들이 고통에 허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복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이제 남은 대상자는 곽정수와 차주성 단 둘뿐.
띠링-
[인벤토리에서 3,000,000룬을 불러옵니다.]
“이거면 어디 가서 굶지는 않을 거야. 둘이 나눠 써.”
“네? 잠깐만요!!”
우빈은 유주에게 룬이 가득 든 자루를 쥐여준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펜리르를 소환하려는데, 민주희가 양팔을 펼친 채, 우빈의 앞을 가로막는다.
“비키시죠?”
“싫어요. 저는 우빈씨한테 전부 걸었단 말이에요!”
“걸어요? 뭘요?”
“제 목숨이요! 그래서 여태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따른 거란 말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타지에서 누굴 믿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세요?”
민주희가 당돌하게 소리친다. 여태까지 고분고분하던 그녀이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게 새로웠다.
확실히 누굴 믿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장 우빈을 보아라, 지금조차 아무도 믿지 못한다. 그러나 주희는 달랐다.
우빈을 만난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별다른 불만, 의심 없이 우빈의 말을 믿고 따랐다.
굶으라면 굶었고, 싸우라면 싸웠다.
오직 믿음 하나로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이유 정도는 알려주는데 마땅한 도리인 듯싶었다.
우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수백 명의 인원이 저를 죽이러 올 겁니다. 같이 있으면 위험할 거예요.”
“네? 지금이요?”
“알려드릴건 전부 알려드렸습니다. 시간 없으니까 비키세요.”
띠링-
[블랙 펜리르를 소환합니다.]
우빈의 앞으로 거대한 늑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빈은 그대로 펜리르에게 올라타려다 문득 한 여인에게 시선이 꽂혔다.
“뭐해요? 안 타시나요?”
“네? 아, 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화민서였다.
화민서는 민주희나 오유주와는 달랐다. 제대로 된 세팅만 해준다면 둘 수 없는 전력이 될 터.
우빈이 펜리르의 등 뒤로 올라타자, 화민서가 자연스럽게 우빈의 뒤에 올라탄다.
그대로 출발하려는데, 유주와 주희가 화민서를 따라 펜리르의 등 뒤로 올라탔다.
“저도 같이 갈래요.”
“죽어도 같이 죽어요!”
우빈이 한마디 하려다 둘의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경직된 듯이 딱딱하면서도 눈에 빛이 가득했다. 지금 한 말이 그냥 한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뭐해요? 시간 없다면서요.”
우빈은 그 말에 시선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나중에 후회해도 나는 모릅니다.”
“후회할 거면 애초에 안 따라갔죠. 빨리 가죠!”
우빈은 망설임 없이 고삐를 움켜쥐었고, 펑!!! 쏘아진 펜리르의 속도감을 느끼며,
‘귀찮게 하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
후웅-
상쾌한 바람이 볼 끝을 스친다.
펑!
펜리르가 대지를 박찰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며, 앞으로 쏘아진다.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황금빛으로 가득한 대지가 주변을 꽉 메울 뿐이었다.
“우와······”
주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끝을 알 수 없는 나무가 하늘 높이 우뚝 솟아있다.
분명 우빈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죽이러 수백 명의 인파가 움직이고 있다고.
1분 1초가 두려움으로 가득해야 마땅했지만, 이 장소에 오자 걱정이 싹 가셨다. 아니, 두려움조차 느낄 수 없었다.
반딧불이 같은 황금빛 광채가 주변을 떠돌았으며, 솜사탕처럼 알록달록한 식물이 가득하다.
수천 마리의 새와 나비가 주변을 배회하며 주변을 떠돈다.
특히, 하늘 위로 쏴아아아- 흩날리는 수만 수억개의 낙엽은 그야말로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 정도로 황홀했다.
민주희가 주변의 풍경에 감탄하는 한편.
“어디에 가시는 건가요?”
“보면 몰라요? 세계수잖아요.”
화민서가 우빈에게 질문해왔다.
“그 뜻이 아니고요. 왜 여기로 오신 거예요?”
“그야, 여기에 그게 있으니까요.”
“네?”
화민서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처벅- 거대한 위용을 내뿜던 펜리르가 멈춰 섰다.
솜사탕 같은 나무와 황금빛 덩굴이 가득한 장소였다. 정면으론 끝을 알 수 없는 세계수가 우뚝 솟아올라 있었고.
“여기에 뭐가 있는데요?”
화민서의 질문에 우빈이 펜리르에서 내려, 세계수를 향해 걸어 나갔다.
“아주 오래전, 세계수에서 찾아낸 히든 던전입니다.”
“히든 던전이요?”
우빈이 세계수로 뻗어 오른 황금빛 덩굴을 움켜쥔다. 그대로 잡아 뜯자,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세련된 문양과 덩굴이 문 주변을 장식한다. 이렇게 마주한 것만으로 묘한 압도감이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유명했었는데, 모르세요? 3년 동안 이 문을 연다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우빈이 문을 손바닥으로 쓸며 말하자,
“아!”
화민서의 기억 속으로 과거의 기억이 번뜩였다.
‘세계수의 비밀 신전.’
10년 전이었던가. 세계수에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히든 던전이 발견되었다.
이 히든 던전의 소문은 다양했다.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엘리드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존재가 잠들어있다는 추측까지.
하긴, 엘리드에서 가장 신비한 존재라 하면 바로 세계수이지 않은가. 그런 세계수에 박혀있는 거대한 문이다.
상상력과 호기심을 건드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기에 초대 용사들은 수년간 이 문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히든 던전에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띠링-
[히든 던전에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열쇠를 삽입해주세요.]
던전에 입장하기 위해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으신 건가요?”
“아뇨.”
“네?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고···”
“부수면 되죠.”
“부순다고요?”
우빈의 말에 화민서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오른다.
지금이 던전이 지금 괜히 방치된 것이 아니었다.
수년 동안 수백 명이 머리를 맞대고 안 해본 시도가 없었다.
그중 당연히 무력을 통해 문을 여는 시도 또한 여러 차례 있었다.
온갖 스킬을 이용해 문을 폭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몬스터를 유인해, 공격하게 만드는 요행까지.
그 과정 중 레이핀을 유인해, 이 문을 후려치게 만든 것을 마지막으로 이 히든 던전은 모두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무력으로 문을 부순다는 걸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레이핀의 공격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여기로 데리고 와선 문을 부수겠다고? 레이핀의 공격조차 버틴 이 문을?
‘무슨 생각이지···’
도민준을 처치한 걸 시작으로 함지연을 제거한 기행까지. 우빈의 업적은 실로 놀라웠다.
그렇기에 아무 말 없이 우빈을 따라나섰다.
당연히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했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맥이 빠졌다.
화민서가 우빈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던 그때였다.
“떨어져 주세요.”
우빈이 노크하듯, 검지를 살짝 내밀곤, 거대한 문을 툭- 두드렸고,
띠링-
[주먹 강타를 사용하였습니다.]
쩡!!!!!!
거대한 충격과 함께. 우우우우웅- 세계수가 미묘하게 울리는 그 순간.
후두둑-
레이핀의 공격조차 굳건하게 버티던 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뭐, 뭐야···”
***
구우우우우-
망치로 쇠 파이프를 두드린 듯한 울림이, 세계수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황금빛 숲으로 수천 마리의 새가 하늘로 치솟았으며, 하늘 위론, 쏴아아아아- 수억 장의 벚꽃이 휘날리듯, 낙엽이 흩날렸다.
“와···”
민주희와 오유주는 고개를 들어, 주변 풍경에 감탄했지만, 화민서의 시선은 오직 정면만을 향했다.
뻥 뚫린 던전의 입구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열렸네.’
우빈은 뻥 뚫린 문으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띠링-
[히든 던전: 세계수의 비밀 신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어갈 수 없다고 뜨던 메시지가 바뀐 상태였다.
우빈 역시 문을 부술 수 있을지 없을지 반신반의했다.
솔직히 전력을 주먹을 내지르면 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최대한 약하게 때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세계수가 부러지면 엘리드 전체가 위기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걱정은 필요 없어 보였다.
“들어가면 되나요?”
“네.”
우빈이 답하자, 주희와 유주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구멍에 입장한다.
화민서까지 들어가자, 고요한 적막이 감돌았다.
우빈은 던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황금빛으로 가득한 숲을 응시했다.
『저기 히든 던전 아니야? 지금 열린 거야?』
저 멀리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은 거리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뚜렷하게 떠오른다.
‘잘 따라왔나 보네.’
저 메시지의 주인공은 신화 길드 소속인 하경수였다.
우빈은 일부러 저들이 쫓아올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해가며, 이 장소까지 왔다.
‘마지막이라면 역시 여기가 제격이지.’
우빈은 눈부실 정도로 황홀한 풍경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원래라면, 그 새끼들을 끌어들일 장소로 부신 선택하려 했다.
부신이라면 외곽지역을 개척하며, 전력을 모으고 있는 구시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고지태와 합류해 전력을 보탤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우빈은 계획을 수정했다.
[마스터 지도를 활성화합니다.]
띠링-
[다크 엘프의 무덤][던전]
[지룡의 습지대][던전]
........
.....
....
.
마스터 지도의 수많은 정보 속,
[세계수의 비밀 신전][히든 던전]
[등급:UL]
[적정 레벨: 200~250]
기억 속으로 잊혀졌던 히든 던전의 정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여기면 충분하겠지.’
지금까지 등장했던 던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적정 레벨과 등급이었다.
『세계수의 히든 던전. 지원 바랍니다!』
우빈은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거대한 구덩이를 향해 몸을 맡겼고,
띠링-
[세계수의 비밀 신전에 입장하였습니다.]
간결한 메시지와 함께. 화아악- 강렬한 빛이 시야 가득 차올랐다.
67. 역습(3)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한다. 사과와 포도를 섞은 향이라고 해야 할까.
입안 가득 침이 고일 정도로 강렬했다.
“여기 나무 속 맞죠?”
“맞긴 한데, 정확히 말하면 던전이라는 장소에요.”
“던전이요?”
“네. 뭐라고 해야 하지.”
주희의 질문에 유주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고민한다.
“그래, 다른 차원의 또 다른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될까요?”
나름 찰떡같은 비유라고 생각했는지, 유주가 유레카를 외치듯, 말한다.
“다른 차원··· 확실히. 그렇네요.”
주희가 유주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나무 속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늘 위론 천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하늘, 핑크빛과 보랏빛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구름이 하늘 위로 가득 피어있었다. 하늘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은 온통 붉은색 식물로 가득했다.
세계수의 주변은 황금빛으로 가득하다고 하면, 이 장소는 다채롭다고 해야 할까.
분명 풍경은 신비로웠지만, 여기서 사는 생명체는 아니었다.
끼리릭-
바로 앞으로 1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크기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무릎을 채 넘지 않는 생명체였다.
묘하게 토끼를 닮은 녀석이 붉은 눈을 하곤 총총 앞으로 뛰어간다. 그러다 끼리릭- 주희와 유주의 인기척에 반응한다.
끼리릭!!!
눈을 마주친 그 순간, 녀석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고, 본능이 위기를 감지할 때면,
띠링-
[주먹 강타를 사용하였습니다.]
퍼억-
간결한 충격과 함께.
띠링-
[강우빈 용사님이 세계수의 정령 레드 레빗을 처치하였습니다.]
[10,000,0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00의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100,000룬을 획득하였습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의 룬을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연속적인 메시지가 떠올랐다.
“와···. 경험치 봐··· 미쳤다.”
주희는 이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유주는 아닌 모양이었다.
“레벨이 이렇게 잘 오르는 건지 몰랐네요.”
유주는 자신의 레벨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분명 유주의 기억 속 자신의 레벨은 166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빈과 처음 만난 그때는 기점으로 레벨은 1로 초기화되어있었다.
다시 복구하려면 최소 10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큰 착각이었다.
띠링-
[오유주]
칭호: 3회차 용사
레벨: 161(160↑)
HP: 1,660/1,660
MP: 166/166
스태미나: 166
생명력: 5
정신력: 5
지구력: 5
근력: 5
기량: 5
체력: 5
지력: 5
감각: 5
행운: 5
미분배: 160
이 던전에 들어온 지 고작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기억 속 레벨과 얼추 비슷한 수치까지 성장한 것이었다.
경험치뿐만이 아니라, 들어오는 룬 또한 미친 수준이었다.
띠링-
[보유 룬: 4,321,517]
우빈이 주희와 나눠 쓰라고 준 300만 룬을 포함 400만 룬이라는 거금이 인벤토리에 들어온 상태였다.
‘이 정도면 전보다 훨씬 좋게 올릴 수 있겠는데···’
비정상적인 성장에 기쁘기도 전했지만,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빈이 그러지 않았던가. 자신을 죽이러 수백 명이 움직이고 있다고.
처음엔 그렇구나 싶을 뿐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장소로 데려오자 우빈의 의지가 느껴졌다.
‘알아서 살아남으시라는 거겠지.’
유주는 주먹을 꽉 쥐며,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오유주와 민주희가 가만히 앉아서 성장을 이어나가는 한편.
“허억···허억···”
화민서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야 여기···’
던전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화민서의 몰골은 처량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가죽 슈트는 아니어도, 세련된 복장의 갑옷이 그녀의 굴곡진 몸을 덮고 있었다.
-빌려드리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하면 그때 돌려주세요.
던전 입장과 동시 전부 우빈이 준 아이템이었다.
하나하나가 사기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당장 손에 끼워진 이 장갑을 보아라.
띠링-
[폭군의 장갑]
종류: 장갑
등급: S
내구력: 133/163
방어력: 9
근력:+7
체력:+1
행운:+1
효과
-근력 30% 증가
아무런 조건 없이 착용하는 것만으로 근력이 무려 30%나 증가하는 옵션이라니.
‘이건···.’
시장이나 경매장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기적인 효과여서 그럴까. 비슷한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던 여인을 알았다.
함지연.
분명,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장갑이 딱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함지연은 수배에도 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어떻게 아이템을 뺏은 거지?
화민서가 아이템의 출처에 의문을 품던 그때였다.
끼리릭-
화민서의 앞으로 50㎝ 남짓의 붉은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무려 세계수에서 생성된 히든 던전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난이도는 각오하고 들어왔는데, 처음 몬스터의 생김새를 보자, 김이 확 빠졌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끼리릭-
레드 레빗이 화민서를 발견하곤, 자세를 낮춘다.
엉덩이를 높이 쳐들며, 좌우로 흔드는가 싶더니. 펑!!! 대기를 박차며 쏘아진다.
화민서의 동공이 수축한다. 부신에서 곽정수에게 당할 때는 기습으로 어쩔 수 없이 당했지만, 화민서는 약하지 않았다.
단순한 속도와 기동성 면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자부할 정도로 높은 기량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흠칫!
레드 레빗이 쏘아졌다는 걸 인지했을 때면, 스르륵- 이미 레드 레빗은 화민서의 눈앞에 도달한 상태였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자 레드 레빗의 작은 몸이 바닥을 두드린다.
쾅!!!!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온다.
“윽!”
화민서의 육신이 거대한 충격에 튕겨 나가며, 날아간다.
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레드 레빗의 모습을 포착했다.
먼지가 자욱한 충격파의 근원지에서 레드 레빗이 작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우우웅-
입으로부터 붉은 무언가가 모여드는가 싶더니. 펑! 작은 구체가 쏘아졌다.
화민서는 날아가는 와중 몸을 비틀었다. 후웅- 화민서의 머리가 있던 위치로 작은 구체가 지나간다.
화민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레드 레빗의 머리를 향해 활의 시위를 당겼다.
띠링-
[레일 샷을 사용하였습니다.]
콰과과과과과과-
강렬한 선이 레드 레빗의 머리를 그대로 관통한다.
띠링-
[세계수의 정령 레드 레빗을 처치하였습니다.]
[100,000,0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000의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1,000,000룬을 획득하였습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0의 룬을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허억··· 허억···”
화민서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신의 머리로 쏘아진 구체가 날아간 장소를 응시했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움푹 패어있는 공간이 있었다. 만약, 저 구체를 직격으로 맞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꿀꺽-
‘필드 보스급이잖아···’
속도와 파괴력만 보자면 웬만한 필드 보스를 가볍게 웃돌 정도로 엄청났다.
그나마 맷집은 약해서 죽일 수는 있다만, 죽음을 각오하고 사냥해야 하는 만큼 피로도가 상당했다.
띠링-
[주먹 강타를 사용하였습니다.]
펑!!!!!
[강우빈 용사님이 세계수의 정령 레드 레빗을 처치하였습니다.]
[10,000,0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00의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100,000룬을 획득하였습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의 룬을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후웅-
섬뜩한 충격파가 화민서의 얼굴을 스친다.
화민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충격파의 근원지로 향한다.
필드 보스와 맞먹는 괴물, 레드 레빗 수십 마리가 주변을 배회한다.
화민서조차 저 정도 무리를 상대하는 건 감히 도전조차 할 수 없었다.
단 1번의 공격이 스치는 그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괴물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사내는 달랐다.
끼리릭-
수십 마리의 레드 레빗이 우빈을 발견하곤, 경계 태세에 돌입한다.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펑! 쏘아진다.
단순히 한 마리라면 달려오는 궤도를 보고 피하겠다마는, 수십 마리가 달려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절대 피할 수 없었다.
‘빠르다···’
우빈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후웅- 덥썩- 팔을 뻗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끼리릭!!!
우빈의 손아귀로 작은 레드 레빗의 대가리가 들려있다.
레드 레빗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발을 우빈의 팔을 향해 내지른다.
우빈은 그 행위를 보며, 망설임 없이 주먹으로 레빗의 머리를 툭 친다.
펑!!!!
[강우빈 용사님이 세계수의 정령 레드 레빗을 처치하였습니다.]
[10,000,0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00의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100,000룬을 획득하였습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의 룬을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엄청난 양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직접 사냥하는 것보다는 10분의 1수준으로 낮은 보상이었지만,
띠링-
[강우빈 용사님이 세계수의 정령 레드 레빗을 처치하였습니다.]
[10,000,0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00의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100,000룬을 획득하였습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의 룬을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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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처치하는 속도부터 차원이 달랐다. 마치 하급 고블린은 처치하듯, 저 괴물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도대체 기량이 몇인 거야···’
화민서는 우빈의 사냥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연하게 비정상적인 공격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속도는 또 뭐란 말인가.
“와···”
그렇게 화민서는 우빈의 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공간이 찢어진 듯, 울렁거리는 장소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다 모였으려나. 역시 들어오지는 않네.’
우빈은 그 공간을 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 찢어진 듯한 공간은 지금 있는 던전과 밖을 이어주는 포탈이었다.
기본적으로 엘리드의 던전은 출입이 자유롭다.
즉,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 장소에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빈은 일부러 흔적을 남기고, 이 던전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지금쯤이면, 우빈을 노리는 그 새끼들이 밖에서 진을 치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
당연히 우빈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정찰병 한두 명 정도는 보낼 줄 알았는데, 그 누구도 포탈 너머로 들어오지 않았다.
하긴 기다리기만 하면 사냥감이 나올 텐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은 거겠지.
“저한테 맡겨요!”
우빈은 몸을 일으켜 세워, 시끄러운 장소로 시선을 돌렸다.
유주가 자세를 낮추며, 어디선가 구한 방패를 치켜든다.
캉!!!!!
쏘아진 레드 레빗이 유주의 방패를 두드린다.
부딪힘과 동시, 유주의 육신으로 핏물이 왈칵 터져 나온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성배를 마시지 않는 이상 회복 불능에 빠졌겠지만, 유주는 달랐다.
어느샌가 핏물이 터진 육체가 그대로 수복되어있었다.
유주는 그대로 레드 레빗의 귀를 움켜쥐었다.
레드 레빗이 본능적으로 뒷다리를 날카롭게 세워 유주의 팔을 긁어낸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강렬한 저항이었지만, 유주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레드 레빗을 하늘 높이 집어던진다.
띠링-
[파괴 광선을 사용하였습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
거대한 불꽃 기둥이 하늘 높이 쏘아지자,
띠링-
[민주희 용사님이 세계수의 정령 레드 레빗을 처치하였습니다.]
[10,000,0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00의 경험치를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100,000룬을 획득하였습니다.]
[18회차 특전으로 인해 200,000의 룬을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던전에 들어오고 대략 20시간가량이 흘렀다.
별다른 기대는 없었지만, 보상은 실로 놀라웠다.
몬스터 한 마리당 주는 경험치는 필드 보스급이었으며, 이따금 드랍되는 아이템 또한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사기적인 옵션을 보여줬다.
그 결과.
띠링-
[민주희][LV.182][HP:2,870/MP:255]
[오유주][LV.177][HP:4,110/MP:195]
민주희와 오유주는 미친 듯한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확실히 안 오르네.’
우빈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 우빈의 레벨은 188이지 않았던가.
띠링-
[강우빈]
레벨: 197(9↑)
HP: 3,870/4,340
MP: 338/434
스태미나: 121/434
생명력: 246(9↑)
정신력: 246(9↑)
지구력: 246(9↑)
근력: 246(9↑)
기량: 246(9↑)
체력: 246(9↑)
지력: 246(9↑)
감각: 246(9↑)
행운: 246(9↑)
민주희와 오유주가 엄청난 성장을 이뤄낼 동안 고작 9레벨밖에 올리지 못했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애초에 이 장소에 온 이유는 고작 성장 따위를 하려고 들어온 게 아니었으니까.
-끼리릭!!!!!
우빈은 제압해놓은 레드 레빗의 귀를 움켜쥐었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레드 레빗이 처절하게 저항한다. 뒷다리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우빈의 팔을 할퀴고 몸을 찬다.
원래라면 팔이 뜯겨나갈 정도로 엄청난 데미지를 입어야 했지만, 우빈의 피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스킬 카드: 비브타노의 피부]
종류: 스킬 카드
등급: UL
레벨: 10
형태: 패시브
효과
-피부의 강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전부 이 스킬 카드 덕분이었다.
괜히 UL등급의 스킬이 아니었다.
당장 유주의 전투를 보아라, 괴물 같은 몬스터의 공격에 육체가 박살 나며, 엄청난 상처를 입지 않던가.
[피의 재생]
종류: 특성
등급: A
효과
-HP가 감소할 때마다 재생력이 증가합니다.
물론, 특성 때문에 바로바로 회복할 수 있었지만, 1번의 전투가 끝날 때마다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우빈은 달랐다.
여기 있는 그 어떤 생명체의 공격을 받아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물론, 공격을 맞는 상황조차 나오지 않기는 했다만.
우빈은 강렬하게 저항하는 레빗을 들곤, 손바닥을 펼쳤다.
띠링-
[크로노스의 비밀 작업실과 연결된 문(마이룸)을 생성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거대한 문이 생성된다.
굳이 부신이 아닌 이 던전에 온 이유는 단순한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되려나.’
우빈은 흥미로운 실험에 앞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고,
[크르노스의 비밀 작업실에 입장하였습니다.]
“제발!!! 그만해!!!!!!”
처절한 비명이 우빈을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