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함지연(4)
화르륵-
소름 끼치는 열기가 주변을 뒤덮는다.
딱딱한 대지가 붉게 달아오르며, 용암처럼 요동친다.
이렇게까지 강렬한 열기는 오랜만이었다.
도대체 어떤 효과를 가진 능력이길래, 광범위한 지역을 불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우빈의 시선이 손바닥으로 향한다.
띠링-
[마검: 기간테스+8의 내구력이 1 감소합니다.]
[마검: 기간테스+8의 내구력이 1 감소합니다.]
........
.....
....
.
마검의 내구도가 초 단위로 1씩 감소한다.
기간테스뿐만이 아니었다.
착용한 아이템이 전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띠링-
[칭호:한계를 뛰어넘은 용사가 화룡의 숨결을 저항합니다.]
물론 우빈은 이 지옥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거슬리는 게 있다면 애써 구한 아이템이 전부 망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인데.
우빈은 판단을 내린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호흡을 시작으로 시야까지 별다른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허억···허억···”
하지만 함지연은 아닌 모양이었다.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비늘이 검게 타버리며, 부서져 내린다.
호흡조차 쉽지 않은지 휘청거린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다.
“너 뭐야,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함지연이 무릎을 꿇는다. 눈까지 멀어버렸는지, 우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끝났네.’
참으로 허무한 마지막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가 사용한 능력에 잡아먹혀, 쓰러지는 엔딩이라니.
하긴 이 열기를 버틴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빈 역시 이 칭호가 없었다면, 단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즉사할 정도로 강렬한 화력이었으니까.
“허억···허억···”
함지연의 호흡이 조금씩 약해진다. 숨을 들이켜 마시어도, 호흡이 충족되지 않는지, 꺼억 되며, 연신 공기를 들이켜 마신다.
‘어딜 편하게 가려고.’
우빈은 저 증상을 알았다. 화마의 시련에서 죽기 전에 자주 보였던 모습이었으니까.
우빈은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며칠 정도 걸리려나.’
정현태와 이세현은 하루도 못 버티고, 우빈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과연 함지연은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까.
우빈은 앞으로 있을 상황을 떠올리며, 손바닥을 펼쳤고,
띠링-
[크로노스의 비밀 작업실과 연결된 문(마이룸)을 생성합니다.]
불지옥의 중심으로 하나의 문이 우뚝 솟아올랐다.
***
똑-똑-
천장으로부터 물방울이 떨어진다.
‘목말라.
이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물방울이 떨어진 바닥을 핥았다. 찌르는 듯한 쓴맛이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꼬르륵-
배가 고프다는 감각을 넘어, 위가 스스로를 소화시켰는지 쓰린 고통이 배를 꼭꼭 쑤셔 왔다.
하지만 참을만했다.
지옥의 1분보다 수십 일의 굶주림이 차라리 더 나을 정도로 시련은 끔찍했으니까.
띠링-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합니다.]
화아악-
이세현의 손아귀로부터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온다.
수천 장에 육박하던 스킬 카드가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세현은 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완성한 스킬 카드를 응시했다.
영혼석을 연금할 때의 경험을 살려서 그런지, 나름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눈에 띄는 효과를 가진 카드는 총 31장.
그중 이세현조차 혹할만한 스킬 카드가 있었다.
띠링-
[스킬 카드: 대마법사의 지혜]
종류: 스킬 카드
등급: F
레벨: 1
형태: 패시브
효과
-마법 스킬의 효율이 상승합니다.
스킬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다.
효과는 효율 상승, 어떤 효과가 추가로 붙는 것일까?
이런 스킬 카드는 특성과 동급이라 불릴 정도로 한 장 한 장의 가치가 높았다.
레벨을 올려봐야 어떤 효과가 붙을지 알 수 있겠지만, 스킬 데미지 증가나 속성이 추가로 붙지 않을까?
‘A등급만 됐었어도, 부르는 게 값이었을 텐데.’
만약, 이 스킬 카드가 A급 아니, B급만 되었어도 엄청난 값어치를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카드엔 그럴만한 가치가 없었다.
아무리 효과가 사기적이면 뭐하겠는가.
F 등급에서 오는 한계가 명확할 텐데.
이걸 쓸 바엔, B급 스킬 카드 중, 국민 스킬 카드라 불리는 마법의 재능을 착용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이런 걸 왜 계속 만들라고 하는 거지?’
이세현은 문득 우빈의 명령에 의구심이 들었다.
영혼석 때는 다시 고문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로 가득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런 귀찮은 작업을 왜 시키는 것일까?
설마, 스킬 카드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이라도 있는 건가.
‘에이 설마.’
여러 의문이 계속되던 와중, 문득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순간 오소소 전신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우빈에게 납치를 당하고 죽은 횟수만 처도 수천 번이 넘어간다. 그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문구와 함께. 되살아났다.
어떻게 하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고민하던 이세현은 붉은 입술을 잘끈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망칠 떠오르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복종.
우빈에게 복종해서, 전에 풀어준 그 사내처럼 자유를 되찾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의구심이 떠올랐다.
‘왜 더 안 데려오는 거지?’
이곳에는 시간을 측정한 시계도 창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체감상으론 수년이 지난 것 같은데, 우빈의 복수 대상인 차주성, 곽정수, 함지연. 이 세 명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왜일까?
‘잡을 수 없는 거구나.’
하긴, 차주성은 바보가 아니다.
현태가 길드를 탈퇴한 것까지는 배신이나 암살을 당했다. 칠 수가 있겠지만, 세현까지 사라진 지금.
차주성은 대비하였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고, 죽이려고 한다고.
지금쯤이면 그 대상이 우빈이라는 것까지 알아냈을지도 몰랐다.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어둠으로 가득하던 절망 속에서 희망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정현태와 이세현은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다 누군가 노린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방심을 했지만, 나머지 셋은 아니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남은 저 세 명은 단순한 무력을 떠나 엘리드에서 손꼽히는 괴물들이었으니까.
우빈이 아무리 준비했다 한들, 차주성은 고사하고 당장 함지연조차 쉽게 잡지 못할 것이다.
그를 증명하듯, 수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붙잡지 못하고 있기도 했고.
‘최대한 버티자.’
꺾여가던 이세현의 눈빛에 빛이 서린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티면 누군가는 구해줄 거라는 확실한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열려고 노력해도 굳게 닫혀서 열리지 않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망막으로 강렬한 빛이 들어와 인상이 찡그려진다.
“우빈아! 시킨 데로 전부 만들어놓아···.”
무의식적으로 우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을 이어나가는데, 화르륵- 엄청난 불길이 이세현의 육신을 뒤덮었다.
띠링-
[이세현 용사님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크로노스의 축복이 이세현 용사님에게 깃듭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허억.”
순간 목숨을 잃었다 되살아난 이세현은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우빈을 올려다보았다.
불길이 훑고 간 문 앞으로 우빈과 우빈의 손에 끌려 온 한 생명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숯덩이는 뭐지?’
이세현의 시선이 검게 타버린 생명체로 향한다.
짐짝 끌려오듯 우빈의 팔에 끌려온 존재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허억···허억···”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검게 타 있었는데, 굴곡진 몸매와 얇은 팔다리가 여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얼굴이 익다 못해, 타버려서 누군지 알아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설마···”
이세현은 저 존재가 누군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니겠지.’
애써 추측을 부정하는데, 우빈의 섬뜩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해, 지연아. 친구끼리 봤으면 인사해야지.”
그 말에 이세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미약하게 커지던 빛이 처절하게 꺼지며, 절망이 차오른다.
“저게, 지, 지연이라고···.”
***
[정현태님이 강탈을 사용했습니다.]
[아이템을 빼앗겼습니다.]
[정현태님이 강탈을 사용했습니다.]
[아이템을 빼앗겼습니다.]
........
.....
....
.
기분 나쁜 메시지가 연속적으로 떠오른다.
“으··· 아파.”
함지연은 욱씬 쑤셔 오는 고통을 참으며, 눈을 천천히 뜨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이 드문드문 흐릿했다.
분명, 이태양의 특성을 취하고, 최수호와의 PVP를 이어나가던 도중. 누군가 나타났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아?!”
‘강우빈!’
함지연이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함지연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확인했다.
십자가 같은 구속 장치에 양팔과 다리가 속박된 상태였다.
순간 소름이 돋아났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화룡의 숨결로 인해, 전신이 불타버리지 않았던가.
그 여파로 눈과 귀까지 먹었던 걸 느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누군가 성배를 먹여, 회복을 시킨 것이었다.
‘누가··· 왜?’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 십자가 아래로 익숙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정현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정현태가 버젓이 살아 있었다.
“뭐야? 살아있었어? 너 괜찮냐?”
반가움에 여러 질문을 건넸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현태는 그저 함지연의 몸에 손을 올리더니,
띠링-
[정현태님이 강탈을 사용했습니다.]
[아이템을 빼앗겼습니다.]
아이템을 하나씩 빼가고 있을 뿐이었다.
“미쳤어? 뭐하냐? 빨리 이것 좀 풀어봐!”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정현태의 옆으로 익숙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드 드래곤을 처치하고 차주성에게 하사받은 용의 갑주를 시작으로, 수십 년간 어렵게 모은 스킬 카드와 무기까지.
“야! 그걸 왜 빼가. 일단 이것 좀 풀어봐”
정현태의 등 뒤로 익숙한 여인 역시 발견할 수 있었다.
“이세현? 세현아!”
정현태뿐만 아니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세현 역시 있던 것이다.
“세현아, 나 지연이야. 현태 좀 말려봐! 아니다. 우선 이것 좀 풀어줘. 빨리!”
함지연이 애타게 호소했지만, 이세현의 반응은 무미건조했다.
“세현아···? 왜 그래···”
함지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어간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꽉 짓누르던 그때였다.
“형, 이게 마지막이야. 나 잘했지?”
정현태가 바닥을 네발로 기며 한 사내에게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우빈을 발견한 함지연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린다.
“우, 우빈아.”
그제서야 함지연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빈아, 일단 진정해. 우리 꽤 친했었잖아? 내가 너 맨날 훈련해주던 거 기억 안 나?”
정현태와 이세현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정을 들먹이며, 동정심을 유도했다.
‘훈련이라···’
함지연의 모습을 보는 우빈의 표정이 사늘하게 내려앉는다.
던전에 버린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는데, 그 괴롭힘을 훈련이라 포장하는 걸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작해.”
우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세현이 주황빛으로 가득한 포션을 들고 함지연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게 뭐야. 설마 실험하던 그 포션은 아니지? 세현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절규하는 함지연의 아가리 속으로 주황빛 포션이 가득 차오른다.
“커억···”
함지연의 전신으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가슴팍으로 주황빛 광석이 생성된다.
“씨발! 미쳤어! 이걸 왜 먹여!!!!”
버럭 소리치는 함지연의 입속으로 두 번째 실험 포션이 주입된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바들바들 떤다. 손톱이 빠지고, 눈과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수십 병의 실험 포션이 함지연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함지연은 이세현과 다르게, 쉽게 죽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전부 빠지고, 눈알이 녹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피부가 진흙처럼 녹아내려 장기가 바닥을 적셨지만, 쉽사리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만.”
그런 와중에도 이성을 가지고 생명을 구걸했다.
생명력 하나는 진짜 끈질겼다. 하지만 그 생명력도 이제 한계인 듯싶었다.
이세현의 손에 의해 쪼르르- 51번째 액체가 함지연의 위 속으로 들어간 그 순간.
띠링-
[52,471,579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기꺼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함지연 용사님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크로노스의 축복이 함지연 용사님에게 깃듭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
고개를 높이 들어도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다.
가까이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의 열기에 최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와··· 미쳤다.”
최수호는 입을 쩍 벌리며,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죽음을 각오한 그때, 한 사내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그 사내는 함지연과 구면인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라운 상황이 펼쳐졌다.
‘센 줄은 알았는데 진짜, 괴물이었구나.’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그토록 괴물 같던 함지연을 가지고 놀 듯 짓밟아 버린 것이다.
순간 현실감을 멀게 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사내는 너무 자만했다.
화르륵-
멀리서 바라만 보는데도, 얼굴이 익으며, HP가 깎여나간다.
지금까지 보여준 화력은 장난이었다는 듯, 차원이 다른 열기가 모든 것을 불태운다.
과연 저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죽었겠지···”
사내는 함지연을 무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을 때, 확실하게 끝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사내는 함지연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불기둥이었다.
‘일단 뜨자.’
지금쯤이면, 사내는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그대로 불타 죽었을 것이다.
다음 타겟이 되기 전에 빨리 이 자리를 떠야만 했다.
최수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판단을 내리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파스스- 강렬하게 불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어?!”
무의식적으로 돌아본 그 장소엔 상처하나 입지 않은 존재가 서 있었다.
“말도 안 돼···”